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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8월
평점 :
‘인간’이라는 존재는 지극히 고유하고 개별적이다. 끝없이 탐구되고 존중되어야 할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한 순수한 존재에 의식주, 교육, 정치, 조직이라는 것이 더해지고, 도덕성, 역할, 의무가 주어진다면 그 존재의 삶은 더 이상 개별적이지 않고 복잡하게 분산된다. 인간에게 희망과 선한 동기를 주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똑같이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서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신의 말씀도, 조직과 목적에 연루되면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상대방을 이용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고자 아무 연관도 없는, 버려도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먼 길을 떠나게 하는 ‘엔도 슈사쿠’의 『사무라이』는 처음에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으로 읽힌다. 실제의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픽션이 얹힌 이 소설은 종교와 믿음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곧 사무라이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이해되지 않은 소임을 다하기 위해, 끝없이 계속되는 고난을 겪고, 거기에 따른 그들의 묵묵한 인내에 ‘사람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가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선택되고 버려지는 것들로, 또 그 결말로 결국 이 소설은 ‘나는 누구인가?’를 근엄하고 깊이 묻고 있다.
[1624년에서 1858년까지 일본의 외교정책이었던 쇄국제도는 그리스도교 금지와 막부의 무역독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처음에 무역을 촉진하려는 목적에서 그리스도교를 묵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잇달아 선교사가 도래하고 신자가 늘어나자 1612년 직할도시에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내린다. 이 금교 정책은 단계적으로 강화되어 1622년 55명에 이르는 선교사와 신자가 나가사끼에서 처형되고 1624년에는 스페인선박의 일본도항이 금지되었다. 1637년 10월 그리스도교 농민신자를 중심으로 발생한 대규모 ‘백성잇끼’는 가혹한 정치와 그리스도교 탄압에 저항해 3만7천여 명이 봉기했으나 네덜란드 선박의 엄호사격으로 진압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금지의 목적은 거의 달성되었다 -‘새로 쓴 일본사’, 창비, p275~276에서 발췌]
척박한 땅, 골짜기에서 세 마을을 책임지는 총령의 자리에 있는 사무라이, ‘하세쿠라 로쿠에몬’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다. 말수도 적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도 드물다. 일 년에 한 번씩 영주에게 연공을 바치고, 부역의 의무를 지며, 전쟁이 나면 영주를 위해 화살과 총알이 쏟아지는 곳을 뛰어다녀야 하는 낮은 신분의 사무라이이다. 11년 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금의 골짜기보다 훨씬 기름진 땅인 구로카와의 땅 대신 이 골짜기가 주어져 이곳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 전쟁이 나서 공을 세우기 전에는 그 땅을 찾을 기회가 없다.
바울회(본래는 프란치스코회)소속인 벨라스코 신부는 일본을 기리시탄(포르투갈어로 ‘그리스도교도’라는 의미이며, 가톨릭의 신자, 전도자 또는 그 활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의 나라로 만들고, 자신은 일본에서 주교가 되기를 원하는 야심가이다. 자신들보다 앞서 일본에 들어 온 베드로회(예수회)신부들과 일본에 대한 종교의 지배권을 갖기 위해 서로를 비판하며 반목하고 있다. 일본이 원하는 남만인과의 무역에 이익을 주고 그 대신 자신은 일본에서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포교도 외교처럼 술책을 부리고 흥정을 하고 위협을 하고 때로는 타협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운 무역항을 만들어 마닐라를 거치지 않고 직접 멕시코와의 무역을 원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남만의 기리시탄인이 필요했다. 그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등 신교도들도 일본과의 무역을 원했다. 가톨릭과 신교도들은 일본에서 무역 독점권과 종교의 포교를 선점하기 위해 막후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렇게 정치와 종교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만나야 했고, 순수하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필요한 사람과, 전혀 ‘그리스도교’가 필요 없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일본은 쓰키노우라항에서 스페인 뱃사람의 도움으로 만든 갤리언선인 ‘산 후안 바우티스타’를 띄우고 그들의 목적을 위해 여러 뱃사람, 상인, 그리고 사무라이와 벨라스코 신부 등을 태워 출항시킨다.
배에 탄 사무라이들은 네 명이었다. 마쓰키 주사쿠, 다나카 다로자에몬, 니시 규스케, 하세쿠라 로쿠에몬은 사무라이 중에서도 신분이 낮은 ‘메시다시슈’ 출신인데 그들은 왜 자신들이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이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에게는 기름진 옛 영토를 되찾아야만 하는 바램이 있기에 자유롭게 직접적인 무역을 원한다는 영주의 편지를 멕시코의 태수에게 전해야 하는 소임을 맡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역할이고 그들은 그런 정신을 받드는 사무라이였다.
‘일본인에게 바다는 오랫동안 오랑캐로부터 섬을 지키는 커다란 해자’였을 뿐이었던 망망대해의 바다는 그들에게 새로운 문명을 마주하고 변화와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신호탄이었다.
[일동은 침묵한 채 오랫동안 큰 배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영주의 어떤 군선보다도 강력하고 남자다운 배였다. 그 배가 모레 자신들을 태우고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강렬한 느낌이 사무라이의 가슴을 덮쳤다. 골짜기에서의 조용한 인생이 막 떨어져 나가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p93}
항해는 만만치 않았다. 두 번의 큰 폭풍을 만나 몇 명이 죽어 나갔다. 벨라스코 신부는 멕시코라는 나라에서는 기리스탄만이 환영받을 수 있다고 하며 개종할 것을 원한다. 이익을 위해 이 배를 탄 상인들은 멕시코에서의 유리한 거래를 위해 세례를 받는다. 현세의 편안을 기원하기 위해 종교를 믿는 일본인의 특성과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어우러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이 받는 세례는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벨라스코 신부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도착한 소식은 암울했다. 그들이 떠난 직후 일본은 영국과의 통상을 인정했고, 비교적 포교에 관대했던 지역에서도 박해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소식을 듣고도 멕시코의 스페인 총독은 그들을 도울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사무라이와 벨라스코신부는 교황을 만나고 왕을 알현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기로 한다. 사무라이중 현실적이고 비판적인 마쓰키 주사쿠만이 일본행을 택한다. 스페인의 세비야에 도착하고도 그들에게 유리한 소식은 없었다. 그들은 소임을 완수하고자 마드리드에서 결국 마음에도 없는 세례를 받는다. 기리스탄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과 교황에게 보여주고자 연극을 한 것이다. 그들이 로마까지 가서 교황을 만나지만 단지 그것은 이 나라까지 와서 그들이 보여준 종교적 열성에 대한 가벼운 보답이었을 뿐이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나라와 통상을 원하지 않고 그 위험한 지역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었다. 그들은 소임을 완수하는데 실패했고 조상의 옛 땅을 되찾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나라는 처음부터 사무라이의 소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큰 배를 건조하고 멕시코까지의 뱃길을 알아내고자 그들을 이용한 것뿐이었다.
출발할 때의 마음과 목적은 달랐지만 기나긴 여정을 함께 함으로써 벨라스코 신부와 사무라이들은 점차 마음을 열고 서로 이해하게 된다. 벨라스코 신부는 사무라이가 보여주는 인내와 그들의 좌절을 통해 자신이 교만했음을, 너무 일본인의 특성을 간과했음을 뒤늦게 인식한다.
[일본인과 나는 안주할 땅을 찾아 방랑하는 유랑민과 비슷했다. 비 내리는 깜깜한 밤에 인가의 불빛을 찾아 헤매는 나그네 같기도 했다. -p351
그들은 믿고 있던 영주와 평정소에 배신당했다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내가 꿈꾸는 것을 주님이 버린 고통을 맛보았다. 지금에야 비로소 배신당한 자와 버림받은 자 사이에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듯한 우정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이 일본인들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p353]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지만 그들은 출발할 때의 사무라이가 아니었다. 넓고도 자유로운 세상을 보았다. 그 세계는 폐쇄적이고 철저하게 복종해야만 하는 일본과는 너무 달랐다. 그들과 그리스도는 아무 상관도 없었지만, 그리스도만을 믿는 나라를 다녀오며 점점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그 나라 어디를 가도 십자가에 매달린 추하고 말라빠진 사내의 나상을 볼 수 있다. 비쩍 마른, 돋보이지도 않고 그저 초라한, 위엄도 없이 옛날에 죽어버린 사내를 왜 믿는가를 궁금해 한다. 멕시코에서 만난 일본인 수도사와 인디오들을 통해, 자신이 겪어 낸 많은 일들로 인해 사무라이는 어렴풋이 예수에 대해 이해하고 그가 인간 삶의 어디쯤에 존재하는지도 알게 된다. 자신이 인식하기도 전에 살며시 스며든 예수가 사무라이에게 있었다.
함께 떠났던 사무라이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한다. 일본으로 돌아온 사무라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숨죽이며 다시 골짜기에서 살아간다. 소임을 완수하기 위한 4년 동안의 노력은 아무런 보상도 관심도 얻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한 벨라스코 신부와 함께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세쿠라와 벨라스코 신부의 이야기는 실제의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사무라이는 계속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벨라스코 신부는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이 책에서 보여 지는 사무라이는 개인의 자아와 선택이 부정되는 존재다.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인 산물의 결과인 인간의 삶에서 계급사회에서 존재하는 것은 주어진 명령에 대한 복종뿐 ‘나’라는 것은 철저히 배제된다. 정치와 조직이 우선되는 사회에서 한 인간의 억울함이나 슬픔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와 우리를 생각한다. 계급사회도 아닌, 충분한 자유를 누리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난 과연 얼마나 ‘나’답게 살고, 존중받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봐야했다.
소설을 읽고 글을 쓰기가 쉽지 않지만 특히 엔도 슈사쿠의 ‘사무라이’를 읽고, 거기에 대한 글을 쓰기가 너무 어려웠다. 작가가 서술하는 인물들의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그들의 상황과 감정에 이입하게 되고, 그것으로 지금의 나와 우리들을 자꾸 비교하게 만들었다. 거기에서 든 생각들과 복잡한 느낌이 너무 많은데도 이 지면에 다 옮기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엔 종교적인 구도의 문제도 많이 언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작품에도 그런 문제가 많이 나와 있는데 역시나 내가 느낀 종교에 대한 질문과 생각들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느린 듯한,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엔도 슈사쿠’의 문장도 나, 그리고 삶과 인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했다.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수많은 나라를 걸었다. 드넓은 바다도 횡단했다. 그런데도 결국 자신이 돌아온 것은 척박한 땅과 가난한 마을밖에 없는 이곳이라는 실감이 새삼 가슴에 차오른다. 그것으로 됐다고 사무라이는 생각한다. -p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