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얼간이
체탄 바갓 지음, 정승원 옮김 / 북스퀘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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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영화 하면 동시개봉이다 , 역대 최강의 스펙타클이다 하는  대표하는 것으로 헐리우드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무궁무진한 소재의 다양성을 필두로 막강한 체계하에 결코 실패를 할 줄모르는 자본주의 영화의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은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인도의 영화- 

바로 발리우드로 불리는 곳이다.  (긴 요즘엔 나이지리아 영화도 유행이라고 한다.)

이 책을 먼저 읽기 전에 지금은 국내 개봉중이지만 사실 카페가입을 통한 영화모임을 통해서 영화를 먼저 보게됬다. 

인도 특유의 선정성 있는 장면이나 원색적인 표현법이 아닌 정말 그 민족 특유의 흥이 넘치고 세  배우들의 능청스런 연기에 제 3세계의 영화라곤 할  수없을 정도로 많은 공감과 웃음이 뻥 터지는 아주 유쾌한 영화로, 반면엔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인도의 최고 공과대학에 입학한 수재란 수재는 전부 모인 IIT공과대학의 세 인물이 주인공이다.  

하리 쿠마르- 326등 

알록굽타 - 453등 

라이언 오베로이 - 9등 

첫 날 선배들의 전통적인 신입생 맞이 행사에서 라이언의 행동으로 무사히 빠져나오게 된 세 사람은 이후 틀에 박힌 공부, 공부, 실험, 무작위 퀴즈시험에 삶을 통째로 포기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날 라이언의 반기로 시험중임에도 영화를 보러가게 되고 시험은 예상대로 대학내에서도 좀체 나오기 힘든 평균이하인 5점대를 받게된다. 

이후 라이언의 제안으로 하루 세시간 반 동안만 공부하고, ( 지배를 위한 협력이란 이름하에 )본인들이 즐기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로 결정, 그대로 그들은 세 얼간이를 자처하면서 성적엔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간다.  

조깅으로 인해서 자신의 전공인 기계공학과장 체리안 교수의  딸인 네하와 사랑에 빠져 아슬한 곡예적인 사랑을 나누는 하리, 종합성적의 결과가 기대만큼 못미치지자 라이언과 다툰 뒤 다른 친구에게 공부하러 간 알록,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자 무한한 즐거운 삶을 살지만 결코 부모에겐 편지를 쓰지 않는 부유한 라이언의 대학 생활을 보여준다.  

1년이 지난 후 다시 의기투합해서 다시금 분업형태로 각자의 공부량을 채워나가지만 어느 날 막바지 시험점수를 올려보겠다고 체리안 교수방에 침입, 시험지를 발견하는데 성공하지만 알록의 전화거는 것 때문에 현장에서 잡힌다.  

이후 그들의 인생항로는 라인언과 잘 맞는 교수의 배려로 정학기간에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학점 인정을 받는 동시에 각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취업에 성공하거나 연구실에 남는 것으로 자신들의 학창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이 책을 보면 유쾌한 반란 반, 진지한 삶에 대한 성찰 반으로 차 있다.  

고등학교 내내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하리가 막상 대학에서 첫 시험 성적을 5점대로 받고서 실망하는 장면은 수재들이 모인 가운데서 은연중 자신만의 자신감으로 꽉 찬 젊은이가 생전 처음 좌절하는 장면으로 기억이 되며 이후 천연덕스럽게 "넌 인생에서 뭘 원해? 2분 줄테니까 생각해 봐." 라고 물어보는 라이언의 질문에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자신의 선망대상인 너를 닮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네하와 잘 되고 싶단 말로 얼버무리게 된는 주인공 하리와 역시 현실적인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인 좋은 회사에 취직해 누나 결혼과 아버지 병원비를 충당하고 싶다는 알록의 대답은 현재의 우리들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꿈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청춘기의 각양각색인 생각들이 모여서 창의적인 생각에 무게를 두기 보단 학업성적위주로 원하는 곳에 취업을 하기 위해 들어간 대학이지만 막상 삭막한 그 곳에서 라인언은 자신의 창의적인 프로젝트가 교수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자 실망, 비록 5점대를 맴돌지만 자신만이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일들(테니스, 영화보기, 스쿠터 타고 시내 나가기...)을 두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대담한 행동들을 한다.  

대담한 행동들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이들에게 너희는 정말 얼간이로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까 묻고싶어진다.  

어쩌면 틀에 박힌 채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무엇인지, 이미 포기하고 살아가는 우리네의 모습들이 정말 얼간이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들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어려움에 봉착해 졸업은 커녕 취직 면접시험도 하지 못할 뻔 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이들은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기보단 이미 해 봤다는 행동 하나로  자신의인생의 한 면을 장식하고도 남는 훈을 얻진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알이즈 웰(ALL.is Well의 인도식 영어) 이라고 외치는 그들 청춘기를 읽으면서, 영화를 보면서 최고의 점수도 좋고, 성적도 좋지만 진정으로 이들의 창의적인 생각에 대한 뒷바침도 보완이 된다면 최고의 세 얼간이로 불리는 날도 곧 오지 않을까 싶다.  

영화, 소설 모두 각기의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대학생활의 아기자기, 때론 곳곳에 터지는 폭소를 감안한다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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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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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이지만 16살이라고 속이고 사는 딱부리란 별명을 지닌 소년과 그의 엄마가 어느 날 꽃섬이라고 불리는 쓰레기처리장에 자릴 잡는다.  

아는 오빠라 불린 아수라(딱부리가 지은 별명)의 소개로 쓰레기를 몰고오는 차에서 나오는 온갖 물건들을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사 자신들의 총수매값이 달라지는 세상이다. 

아수라에겐 땜통이라 불리는 그보단 나이가 적은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의 안내로 그들의 보금자리가 있는 강둑 너머의 찬란한 불빛이 보이는 평이한 세상의 구경을 한다. 

꽃섬이라 불린 곳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 신이 들렸다고 생각되는 빼빼엄마라 불린 딸과 만물상 할아버지, 그리고 땜통과 빼빼엄마가 보는 김서방네 사람들의 파란불빛을 통해서 딱부리는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땜통이 김서방네 가족이 알려준 곳에서 돈 뭉치와 금은 귀속품을 발견해 딱부리에게 줬을 때도, 딱부리는 자신이 살던 예전 동네를 기억하면서 온갖 몸에 밴 그 곳의 냄새로 부터 탈출해 잠시나마 땜통과 같이 평범한 세상으로 , 아니 이미 낯익은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하지만 돌아온 후의 쓰레기장에서 연쇄적으로 쌓인 물건에서 나오는 악취가스로 인한 폭발은 돈뭉치를 날리게되고 간신히 만물상 할아버지네 집으로 피신한 딱부리 모자는 땜통이 자신의 슈퍼마리오 장난감을 가지러 되돌아간 사실도 모른채 곧 오겠지하는 심정으로 기다리지만 이미 시신이 되어 발견이 된다.  

황석영 작가의 소설인 이번 낯익은 세상은 이미 익숙해질법한 세상에서 나오는 온갖 이물질의 쓰레기 더미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말처럼 예쁘지 않은 꽃섬에서 삶은 치열하게 이뤄지고 정부기관의 힘으로 끌려가 생사도 모른채 바른 사람으로 거듭나기위해 끌려간 아버지를 두고 생계의 책임을 진 엄마를 따라서 간 그 곳에서 소년은 자신의 학교도 거부한 채  그저 먹고 살기위한 현실의 생활에 참여를 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아수라와의 부부처럼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도 배신감을 느끼게되지맘 이 또한 그 곳 세상의 이치란걸 깨닫게 되는 한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야말로 쓰레기에서 나오는 온갖 오물과 먹다버린 음식에서 조차 희망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흡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카산드라에서 나오는 쓰레기 하차장을 연상케도 하고 난지도의 모습도 그려지게 되는 이 배경속에서 작가는 이 모든 것이 별개의 세상이 아닌 모두 두루두루 맺어져가고 있는 연결고리의 세상임을, 그 안에서도 혼령식을 나타나는 김서방네의 모습을 비춰줌으로써 모두 세 가지의 낯익은 세상을 제시해준다. 

비록 땜통이 어이없이 슬프게 세상과 이별은 했지만 그 곳에서 풀이 자라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희망을 갖는 딱부리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재의 외면하고 싶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없어선 안될 쓰레기장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순수한 본연의 모습을 찾아보잔 의미로 들린다.  

세세한 쓰레기처리의 단계묘사와 음식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버린 음식의 형태, 결코 아파선 안되는 그  곳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여전히 자본주의의 한계를 느끼게도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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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 르완다 대학살
필립 고레비치 지음, 강미경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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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도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르완다. 

너무나 작은 국토때문에 자신의 나라표기조차도 이웃영토에까지 쓰일만큼 조그마한 나라인 르완다는 원주민인 피그미족(트와족으로 나중에 불린다.)이 살고 있었고 언제부터인가 후투족과 투치족이란 종족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서로간의 동일언어, 풍습을 가진탓에 서로간의 결혼도 오간 정말 사이좋은 부족이었다.  

이런 부족들간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독일에 이은 벨기에의 식민정치의 실현이 구체화 되면서 자신들의 편의대로 투치족을 정치와 그 밖의 모든 중요직을 차지하게 하고 그 밑으로 후치족을 다스리게 되는 구조를 취한 결과였다.  

다분히 자신들의 편의대로 식민지에 대한 이익을 추구한 나머지 그들간의 점차 벌어진 틈은 마침내 1960대의 학살사건과 연이어서 1994년 봄과 여름에 걸쳐 인류역사적으로 대 기록을 세우게 되는 제노사이드가 실현이 되는 암울한 시대를 거치게된다.  

벨기에의 영향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카톨릭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성당에 모여 피신한 투치족을 보호하기는 커녕 후치족이 마체테(풀을 베기위해 사용하는 칼) 와 마수(못이 박힌 곤봉)을 이용해 무참히 살해하는 광기의 현장을 일러바치는 성직자들의 반 인륜적 행위,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낳았을 현장을 서서히 뼈아픈 고통속에 죽게하는 처리방식으로 휘두른 무기앞에 사지에 대한 고통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저자는 4~5차례 르완다를 방문하면서 현장에서 보고느낀 바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기저에는 함족신화라 불리는 후치족과 투치족의 생김새부터 다름에 대한 편이한 인식아래 만행을 저질러졌고 투치족 부인을 둔 후치족 남편이라도 처남이나 처가 사람들을 죽이는데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간다로 피신해 자란 젊은 르완다인들로 구성된 르완다애국전선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게됨으로써 후치족은 이웃나라인 자이르(훗날 콩고공화국)로 밀려나게 되고 세계각국의 강대국들은 오히려 후치족을 뒤에서 지원(프랑스)하는 상태로까지 번져 더욱 큰 사태로 발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보고서 조차도 사전에 제노사이드에 대한 의심과 경고를 가졌지만  그저 무심히 흘렸을 뿐이고 학살이 지연되는 와중에도 도와달란 애국전선의 간절한 소리에도 사형은 하지 말아야한단 일관된 소리만 외칠뿐이었다.  (나중에 주동이 된 후치족 범죄인들은 모든 시설이 갖추어진 스웨덴 감옥에 수감이 되고 르완다 감옥안에서 조차도 신분차별, 즉 직업에 따른 서열에 따라서 감방이나 그 외 바깥 지역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탈출한 난민캠프내에서도 후투파워라 불린 자들에게 수시로 위협을 받은 후투족사람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다시 새로운 르완다를 건설하려는 애국전선의 길을 막고 온갖 구호품을 선취함으로써 난민들을 오히려 양쪽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사태를 겪는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기존의 투치족에 대한 학살이 진행될 때는 무관심속에 자국들의 이익을 주판알로 튀기고 있을 강대국들이 취한 태도이다.  

국제적인 보고는 연일 투치족이 후퇴한 후치족을 학살한다는 현장을 실어나름으로써 새삼 관심을 끌게되는 현상으로 번져가고 세계의 제1인자임을 자처하는 미국은 오히려 자국의 무기를 대여료를 받는 조건으로 빌려주는 대목이다. 이마저도 차일피일 미루다 그 사이에 또한 무수한 르완다인들은 처절이 학살의 현장으로 사라진다.  

저자는 르완다의 학살현장과 그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이미 영화화 된 호텔 르완다의 주인공인 후치족 사람 호텔 직원 폴 루세사 바기나의 인터뷰을 곁들여서 자신이 보고 느끼고, 인터뷰를 한 정치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올림으로서 진정으로 유엔에서도 제노사이드란 이름으로 만들어낸 인간들의 극형에 달한 태도에 견제를 하지만 이는 그저 허공에 그친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고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아프리카가 아닌 서유럽이나 일반의 다른 좀 더 실리성을 갖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세계는 과연 가만있었겠는가?하는 물음을 던진다.  

 방송에서도 큰 비중이 아닌 작은 코너의 소개로 간간이 나온것으로 기억이 될 만큼 우리들 모두는 이들의 불운한 세태에 대해 그저 무관심을 가장한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미안함을 느끼게 한다.  

비록 독립을 했다고하나 여전히 자신들의 과거속의 한 나라로 인식이 되고 더불어서 끊임없이 자신의 발 밑에 두고자 지원을 한 프랑스나, 인종구분 신분증을 철폐하란 영국의 요구에 겉으론 투치족을 응원한단 빌미아래 거절하지만 깊은 심중엔 앵글로색슨이 자릴 잡을 수 있단 의중이 곁들여진 이기심에 찬 행동들을 강대국들은 보여준다.  

또한 세계의 민주주의의 표본이자 급한 불을 끄는데 맏형겪을 자초하는 미국의 태도는 여전히 잉해할 수 없는 의문을 준다.  

비록 당시의 상황이 소말리아에서 자국의 군사들이 당한 테러에 대한 일로 신경쓸일이 있었다지만 추후의 클린턴 행정부의 연설발표문이나 행동은 기존의 행동을 비교해 보건대 자국의 이익앞에선 여지없이 무너지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 무너진면을 보여줬단 점에서 이 르완다 학살사건은 우리인류가 생겨난 이래 가장 혹독하고 무심하게 방치한 점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서 인간보편적인 진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르포타주로서 손색이 없다.  

학살 사건 종결 후에도 여전히 자이르내에서 쫓겨난 후치족의 위치라든가 여전히 후투파워 앞에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행하는 게릴라식 학살은 정말이지 단지 이름하나 틀렸단 것으로 부족이아닌 한 소중한 인간들의 생명을 무심히 버리는 행동에 치를 떨게 만든다.  

진정의 시간을 갖고 서서히 자신들이 가진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르완다의 국민들을 보면서 작가는 그 곳을 떠나오면서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되지만 책을 덮고서도 여전히 그 안의 국민들은 지나온 과거속에서 그 모든것을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가 다시 이웃해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는 기억의모토로서 자신들의 존재성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반면 르완다는 유태인들을 박해한 다른 나라인 독일이란 것만 다를뿐 학살이란 명제하에 자행된 행동은 유태인들과는 다른 그들에게 망각을 권유하면서 살란 권유에 다시 한 번 진정한 인류애는 무엇이며 생명의 존엄성은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사실적인 묘사장면과 성직자로서 행한 행동,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현실앞에서 무엇이 잘못이 되었단 사실조차도 잊은 채 살인에 맛을 느끼는 사람들의 행동,  여전히 자신들이 모든 것을 잃고 다시금 고향에 왔지만 이웃엔 학살의 장본인이 버젓이 살고 있단 투치족 사람들의 말 속에 이미 모든것에 대한 체념으로 가득찬 인간의 모습을,   세계의 모든 평화를 위해서 발로뛰고 중재자로서 확연한 책임의 수장기구로서 모습을 보여야 할 유엔의 소극적인 태도, 매뉴얼에 얽매인채 실지 난민들을 위한 행동이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의무와 태도에 스스로를 유엔구조위원회 직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 제노사이드 규약이라는 장미빛 약속은 인종청소 시도를 막아야 한다는 도덕명령이 독립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이해관계보다 우선 해야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P 210 

*****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정의감을 일께워주었지만 소리높여 악을 비난하는 것과 묵묵히 선를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별개의 문제로 남아있다. -P 212 

*****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끈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공백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의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P 221 

***** 결국 정치는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의 중간쯤에서 이루어진다. P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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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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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신의 여성작가로서 보기 드물게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 

 그녀가 쓴 대표적인 책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접했을 때가 문득 생각이 난다.  

한 번에 나온 것이 아닌 한 해에 한 권꼴로 나온 덕분에 첫 1권서부터 출간되자마자 부리나케 신청해 읽은 기억과함께 그녀가 지은 책이라면 거의를 소장하고 있단 사실에서 나의 한 곳에 치우친 독서 편집에 대한 경고도 아울러서 새삼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그녀가 이번에 들고 나온 책은 바로 서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들에게는 성전의 의미 이상을 지닌 이슬람 대 기독교간의 전쟁을 다룬 십자군 이야기다.  

그녀가 지은 저서에도 간간이 십자군과 연결된 역사적인 사실들을 열거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한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집요하게 해석한 글의 내용이 사뭇 다른 책들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세계 주요종교에서 3개의 주요종교의 성전지로 여기고 있는 예루살렘.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공통된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를 두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일대 혈전을 벌이는 역사적인 사건을 작가는 일관된 냉철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특유의 생각을 펼친다.  

로마가 멸망 후 그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잔틴 로마문명권의 알렉시우스 황제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서로마의 수장인 카톨릭교의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것에서 부터 발단이 되는 이 역사의 시작은 애초에 교황이 가진 권위를 되찾고 아울러 황제의 권위와 권력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발 아래에 두고자 시작한 일이었다.  

즉 교황은 가지고 있지만 황제는 없는것- 바로 신의 대리인으로서 할 수있는 최고의 말1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 

새로 취임한 우르바누스 2세는 하인리히 황제의 견제를 위해서 행한 당시로서  보면 글로벌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면서 정치적인 인물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로 아주 철저하게 자신의 성직자의 권리를 십분 발휘한다.  

성전에 참여함으로써 그 간의 죄를 면죄부로서 감해주고 천국에 갈 수 있단 사실, 되돌아오면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단 말로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출발하게 한 점을 미뤄봐서도 알 수 있듯이 종교적인 자신의 개혁적인 성향과 더불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야심에 찬 교황의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출발은 자신이 생각했던 왕의 출발이 아닌 은둔자 피에로을 위시한 일반 가난한 민중들이 출발했고 기타 왕들의 불륜과 교황과의 사이가 나쁜점 때문에 제후들의 출발로 시작했단 특징을 지닌다.  

제후들 중에서도 정실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사람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선 성전으로 가는 길이 나름대로의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할 수있단 희망의 길이기도 했다.  

단합이 되어서 인솔자가 우선하여 이끈 행군이 아닌 각개의 개별적인 행동으로 모인 십자군은 우선 콘스탄티노플을 시작으로 하여 안티오키아의 처절한 공방전에 이은 함락성공,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이어지면서 각기 자신들이 공략한 곳에 영주로서의 다툼도 벌이게 된다.  

드디어 입성한 예루살렘에서의 영주의 자리를 확보한 고드푸루아는 즉위한 지 1년이 되서 죽음을 맞이하고 뒤이어서 그의 동생 보두앵이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실질적인 치세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지키기위해선 턱없이 부족한 병사들의 확보를 위해서 다시 유럽으로 떠나게 된 보에몬드나 그 밖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략한 성의 영주로서  그 자리에 터전을 잡게 되면서 예루살렘을 위시한 연방정부의 형태로 남으면서 제 1차 십자군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여기까지가 제 1권에 소개된 주된 내용이다.  

물론 전쟁사답게 그 안엔 처절한 공방의 사례와 무기와 창, 십자군이 입었던 상세한 의복까지 묘사한 부분도 있지만 작가가 아울러서 지적한 제 1차 십자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엔 유럽인들의 신을 위시한 종교에 의지한 철저한 심리를 이용한 교황의 계획과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도 서슴없이 내놓을 수 있었던 항전한 군사및 일반 시민들의 생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단점이다.  

이에 반해서 이슬람은 그 때까지만 해도 왜 먼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굳이 이 곳 예루살렘까지 와서 영토를 확장하려하는지에 대한 생각만으로 미쳤단 점에서 두 종교가 이룬 목적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있게 해 준다.  

더군다나 이슬람 안에서의 권력다툼과 분열 때문에 이런 현상은 십자군이 보다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었단 점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란 생각도 든다. 

이 과정에서 지형을 이용한 전쟁의 묘사 장면도 로마인 이야기나 그 밖의 책에서 서술한 형태의 군사적인 지식도 아울러지며 십자군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악랄한 살해나,약탈같은 행동은 종교를 기치로 건 사람들로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이런 행동이 신의 이름으로 출전한 성전이란 이름아래서 과연 신이 바랬던 일이었을까를 묻고 싶어진다.   

"선과 악인의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 인간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고 말했다. -P239

복잡한 당시의 세계편도와 권력, 자신의 상술과 전쟁무기를 십분활용해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도의 이권을 잡는 베네치아인 및, 제노바, 피사의 이탈리아인들의 행동엔 전쟁중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오로지 자신들만의 힘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단 역사에서 체험해 온 습성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있는 기회도 제공해 준다.  

귀스타브 도레란 사람이 그린 삽화가 들어있는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를 같이 곁들여 보면서 맨 처음엔 그림으로 설명된 십자군의 이야기를 맛배기로, 다시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면서는 다시 그 장면을 들처가면서 보는 맛이 이 책을 읽어나가는 즐거움이 아닐까싶다.  

파리 목숨처럼 역병에, 상대방의 무기에 힘없이 쓰러져 갔을 그 당시 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이 신의이름으로 이룬 성전의 결과대로 신의 뜻에 따라 천국에 갔을까도 생각하게 하는 이  책은 무려 80년 뒤에나 등장하는 아랍인의 장수 살라딘에 의해서 본격적인 전쟁의 의미를 알게된다는 말에서 근 200여년간 지속해 온 본격적인 십자군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문득 "킹 오브 더 헤븐" 이란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뇌리에 스친다.  

주인공 발리안이  성을 내주는 대신 자신의 군사들과 백성들의 목숨을 보전하고 안전하게 떠날 수 있게 약속한 살라딘에게 묻는다.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오래 전 봐서 정확한 대사는 아마도 이에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 

살라딘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 

뒤돌아 가면서 다시 돌아보며 하는 말, 

"그러나 그 모든것이기도 하다." 

 아마 당시의 사람들도 이런 생각으로 그 처절한 200년간에 대한 세월을 담보로 전쟁을 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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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본능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1920년 9.16 일 맨하튼 남주에 위치한 미 합중국 금융센터가 한 대의 마차속에 감추어진 폭탄의 세례를 맞고 무너진다.  

그 현장엔 뉴욕경창서 소속인 지미 리틀모어 경사와 전장에서 막 돌아온 의사인 스트래섬 영거 , 그리고 전장에서 퀴리부인의 제자로서 라듐을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환자치료에 도움을 준 프랑스 여인 콜레트,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인 실어증에 걸린 뤽이 동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문의 여인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솜뭉치속에 들어있던 사람의 어금니를 형사에게 보여주고 사건을 의뢰하던 중 납치를 당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범인 중 한 사람인 드로박이란 사람을 놓치게 된다.  

이후 사건은 건물 폭파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던 프랑스 고등판무관실에 근무하던 에디피셔란 사람을 알고 있던 케틀리란 사람으로부터 얼마 전 그가 준  편지에 미리 피신하란 내용을 접하고 에디를 찾고자 하지만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 

한편 콜레트는 영거에게 자신의 약혼자인 전장에서 만난 한스 그루버란 사람을 찾고싶단 부탁과 함께 그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있는 프로이드 박사집에 가게 되고 여기서 남동생을 치료하잔 말을 듣게 된다.  

리틀모어 또한 재무장관으로부터 자신과 함께 일하잔 권유를 받게되고 곧이어 이 사건이 멕시코가 자신의 나라일부를 되찾기 위해서 벌인 일인지, J.P모건의 라몬트의 계획에 따른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사건의 추적에 힘을 쏟는다. 

가까스로 한스를 만난 콜레트는 실은 약혼자가 아닌 자신의 부모를 죽인 범인임을 밝히게되고 한스는 영거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서 두 사람은 프로이트의 권유에 따라 남동생을 박사에게 맡기고 급히 미국길에 오른다.  

미국에 있는 리틀모어는 이 사건이 전적으로 정부의 고위 관리직에 의한 사건과 모건회사의 일부 금을 두고 벌인 사건임을 밝혀내면서 영거와 함께 사건해결을 마무리 짓는다.  

작가의 전작인 살인의 해석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작품을 접한 느낌은 우선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머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9.11사건을 연상짓게 한다.  

작가가 전공한 대로 소설은 크게 두 갈래의 길을 가면서 나중에 합쳐지는 형식으로 가고 있으며, 콜레트의 남동생의 실어증 현상에 대한 영거가 느끼는 정신세계에 대한 회의적 느낌과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살인 본능에 대한 충실한 해석을 답습하고 있어서 이 책은 시종 추리기법과 함께 자연적으로 정신학적인 의문에 관한 해소를 다소 해결하고 있단 느낌이 강하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자기 파괴를 초래하네. 죽음본능이 작용하는 예일세. 만일 세포가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포는 끊임없이 부자연스럽게 분할하며 재생산하네. 암이 되지. 그게 바로 암의 정체일세. 죽을 의지를 상실해 고통 받는 세포, 죽음 본능은 악하지 않네.”  

위의 말처럼 우리 인간들의 뇌리에 은연중에 세뇌되었다고 생각되는 죽음에 대한 생각, 이에 대한 실천과 그에 광분하는 광기에 대한 프로이트의 고찰적인 주장은 사뭇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아무런 연관도 없는 뉴욕시민을 대상으로 공공연히 죽음의 대상으로 내몰은 몰염치한 정치권의 세력들, 그리고 한 나라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회사 이익을 위해서 감쪽같이 속이고자 벌인 회사간부의 행동을 보면서 선.악에 대한 기준은 과연 누가 심판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좀 두터운 책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 안에 든 내용중 일부분이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대사의 맛도 느낄 수 있지만 다소 지루함을도 주는   이 책은 이 부분을 넘어선다면 그런대로 당시의 시대상활 재현이나 남.녀간의 사랑, 가장으로서 느끼는 일과 가정의 행복을 두고 고민에 빠진 리틀모어형사의 생각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느끼게 해 준다.  

실존 인물인 퀴리부인을 내세움으로서 그녀가 발견한 라듐의 이용가치를 두고서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인류의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 줄 수 있단 경고성의 느낌도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읽을거리를 준단 생각이 들었다. 
  

자세한 당시의 멕시코와 미국간의 정치적인 현안에 관한 문제의 조사를 토대로 한 구성적 플롯과 라듐이란 소재, 정신학의 대가인 프로이트를 접한단 것에서 이 소설은 정치, 정신학, 과학적인 하문을 두로 접할 수 있단 점에서 전작인 다른 작품을 들쳐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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