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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 르완다 대학살
필립 고레비치 지음, 강미경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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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프리카에서도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르완다.
너무나 작은 국토때문에 자신의 나라표기조차도 이웃영토에까지 쓰일만큼 조그마한 나라인 르완다는 원주민인 피그미족(트와족으로 나중에 불린다.)이 살고 있었고 언제부터인가 후투족과 투치족이란 종족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서로간의 동일언어, 풍습을 가진탓에 서로간의 결혼도 오간 정말 사이좋은 부족이었다.
이런 부족들간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독일에 이은 벨기에의 식민정치의 실현이 구체화 되면서 자신들의 편의대로 투치족을 정치와 그 밖의 모든 중요직을 차지하게 하고 그 밑으로 후치족을 다스리게 되는 구조를 취한 결과였다.
다분히 자신들의 편의대로 식민지에 대한 이익을 추구한 나머지 그들간의 점차 벌어진 틈은 마침내 1960대의 학살사건과 연이어서 1994년 봄과 여름에 걸쳐 인류역사적으로 대 기록을 세우게 되는 제노사이드가 실현이 되는 암울한 시대를 거치게된다.
벨기에의 영향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카톨릭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성당에 모여 피신한 투치족을 보호하기는 커녕 후치족이 마체테(풀을 베기위해 사용하는 칼) 와 마수(못이 박힌 곤봉)을 이용해 무참히 살해하는 광기의 현장을 일러바치는 성직자들의 반 인륜적 행위,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낳았을 현장을 서서히 뼈아픈 고통속에 죽게하는 처리방식으로 휘두른 무기앞에 사지에 대한 고통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저자는 4~5차례 르완다를 방문하면서 현장에서 보고느낀 바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기저에는 함족신화라 불리는 후치족과 투치족의 생김새부터 다름에 대한 편이한 인식아래 만행을 저질러졌고 투치족 부인을 둔 후치족 남편이라도 처남이나 처가 사람들을 죽이는데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간다로 피신해 자란 젊은 르완다인들로 구성된 르완다애국전선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게됨으로써 후치족은 이웃나라인 자이르(훗날 콩고공화국)로 밀려나게 되고 세계각국의 강대국들은 오히려 후치족을 뒤에서 지원(프랑스)하는 상태로까지 번져 더욱 큰 사태로 발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보고서 조차도 사전에 제노사이드에 대한 의심과 경고를 가졌지만 그저 무심히 흘렸을 뿐이고 학살이 지연되는 와중에도 도와달란 애국전선의 간절한 소리에도 사형은 하지 말아야한단 일관된 소리만 외칠뿐이었다. (나중에 주동이 된 후치족 범죄인들은 모든 시설이 갖추어진 스웨덴 감옥에 수감이 되고 르완다 감옥안에서 조차도 신분차별, 즉 직업에 따른 서열에 따라서 감방이나 그 외 바깥 지역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탈출한 난민캠프내에서도 후투파워라 불린 자들에게 수시로 위협을 받은 후투족사람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다시 새로운 르완다를 건설하려는 애국전선의 길을 막고 온갖 구호품을 선취함으로써 난민들을 오히려 양쪽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사태를 겪는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기존의 투치족에 대한 학살이 진행될 때는 무관심속에 자국들의 이익을 주판알로 튀기고 있을 강대국들이 취한 태도이다.
국제적인 보고는 연일 투치족이 후퇴한 후치족을 학살한다는 현장을 실어나름으로써 새삼 관심을 끌게되는 현상으로 번져가고 세계의 제1인자임을 자처하는 미국은 오히려 자국의 무기를 대여료를 받는 조건으로 빌려주는 대목이다. 이마저도 차일피일 미루다 그 사이에 또한 무수한 르완다인들은 처절이 학살의 현장으로 사라진다.
저자는 르완다의 학살현장과 그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이미 영화화 된 호텔 르완다의 주인공인 후치족 사람 호텔 직원 폴 루세사 바기나의 인터뷰을 곁들여서 자신이 보고 느끼고, 인터뷰를 한 정치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올림으로서 진정으로 유엔에서도 제노사이드란 이름으로 만들어낸 인간들의 극형에 달한 태도에 견제를 하지만 이는 그저 허공에 그친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고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아프리카가 아닌 서유럽이나 일반의 다른 좀 더 실리성을 갖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세계는 과연 가만있었겠는가?하는 물음을 던진다.
방송에서도 큰 비중이 아닌 작은 코너의 소개로 간간이 나온것으로 기억이 될 만큼 우리들 모두는 이들의 불운한 세태에 대해 그저 무관심을 가장한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미안함을 느끼게 한다.
비록 독립을 했다고하나 여전히 자신들의 과거속의 한 나라로 인식이 되고 더불어서 끊임없이 자신의 발 밑에 두고자 지원을 한 프랑스나, 인종구분 신분증을 철폐하란 영국의 요구에 겉으론 투치족을 응원한단 빌미아래 거절하지만 깊은 심중엔 앵글로색슨이 자릴 잡을 수 있단 의중이 곁들여진 이기심에 찬 행동들을 강대국들은 보여준다.
또한 세계의 민주주의의 표본이자 급한 불을 끄는데 맏형겪을 자초하는 미국의 태도는 여전히 잉해할 수 없는 의문을 준다.
비록 당시의 상황이 소말리아에서 자국의 군사들이 당한 테러에 대한 일로 신경쓸일이 있었다지만 추후의 클린턴 행정부의 연설발표문이나 행동은 기존의 행동을 비교해 보건대 자국의 이익앞에선 여지없이 무너지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 무너진면을 보여줬단 점에서 이 르완다 학살사건은 우리인류가 생겨난 이래 가장 혹독하고 무심하게 방치한 점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서 인간보편적인 진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르포타주로서 손색이 없다.
학살 사건 종결 후에도 여전히 자이르내에서 쫓겨난 후치족의 위치라든가 여전히 후투파워 앞에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행하는 게릴라식 학살은 정말이지 단지 이름하나 틀렸단 것으로 부족이아닌 한 소중한 인간들의 생명을 무심히 버리는 행동에 치를 떨게 만든다.
진정의 시간을 갖고 서서히 자신들이 가진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르완다의 국민들을 보면서 작가는 그 곳을 떠나오면서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되지만 책을 덮고서도 여전히 그 안의 국민들은 지나온 과거속에서 그 모든것을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가 다시 이웃해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는 기억의모토로서 자신들의 존재성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반면 르완다는 유태인들을 박해한 다른 나라인 독일이란 것만 다를뿐 학살이란 명제하에 자행된 행동은 유태인들과는 다른 그들에게 망각을 권유하면서 살란 권유에 다시 한 번 진정한 인류애는 무엇이며 생명의 존엄성은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사실적인 묘사장면과 성직자로서 행한 행동,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현실앞에서 무엇이 잘못이 되었단 사실조차도 잊은 채 살인에 맛을 느끼는 사람들의 행동, 여전히 자신들이 모든 것을 잃고 다시금 고향에 왔지만 이웃엔 학살의 장본인이 버젓이 살고 있단 투치족 사람들의 말 속에 이미 모든것에 대한 체념으로 가득찬 인간의 모습을, 세계의 모든 평화를 위해서 발로뛰고 중재자로서 확연한 책임의 수장기구로서 모습을 보여야 할 유엔의 소극적인 태도, 매뉴얼에 얽매인채 실지 난민들을 위한 행동이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의무와 태도에 스스로를 유엔구조위원회 직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 제노사이드 규약이라는 장미빛 약속은 인종청소 시도를 막아야 한다는 도덕명령이 독립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이해관계보다 우선 해야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P 210
*****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정의감을 일께워주었지만 소리높여 악을 비난하는 것과 묵묵히 선를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별개의 문제로 남아있다. -P 212
*****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끈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공백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의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P 221
***** 결국 정치는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의 중간쯤에서 이루어진다. P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