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
사울 레이터 지음, 송예슬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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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사진: (c)사울 레이터




평범한 일상에서 놀라운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

- 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

(원제: The Unseen Saul Leiter)

 


사울 레이터(사진), 마깃 어브 & 마이클 파릴로(편집/) | [윌북] (2022)

 



언젠가 뉴욕 맨해튼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도시의 모습이 궁금하여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랬다. 제한된 시간과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대략 18시간을, 도시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북쪽의 200번가에서 무역센터가 무너졌던 남쪽의 그라운드제로까지, 그리고 강 건너 브루클린까지 말이다. 12시가 다 되어 가던 맨해튼의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후드 티를 입고 마주 오던 사람과 지나칠 때 등골이 서늘했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일부러 이런 경험을 하진 마시길.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제는 시간과 돈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다니질 못할 테지만, 그 때는 내게 그런 절실함이 있었던 것 같다.


마천루 사이로 비치는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떠다니던 하얀 구름들, 군데군데 영원히 계속 이어질 것 같은 도시의 보수공사 현장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던 하안 연기들, 도로 위로 아치의 일부처럼 뻗어 있던 노란 신호등 기둥과 여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신호등, 노란 택시, 노란 백열등이 켜져 있던 집과 가게의 실내, 빨간 색의 우체통과 코카콜라 광고, 붉은 벽돌집, 차이나타운의 붉은 글씨나 가게 천막, 가끔 볼 수 있는 붉은 코트나 드레스를 입은 여인,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많이 쓰던 초록색 등등. 내가 기억하던 도시의 색이 있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기억에 남아 있는 도시의 색은 대략 흰색,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이 모든 색들을 사울 레이터의 슬라이드 사진집 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소 빛이 바랜 상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내 기억 속의 맨해튼과 여러 색들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은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출간된 사진집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영원히 사울 레이터는 이미 공개되어 있던 그의 대표작을 보여주는 도록 같은 느낌에 흑백 사진이 섞여 있어서 다소 아쉬운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컬러 사진집은 1만장이 넘는 슬라이드 사진 가운데 76장이 선별되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책 전체는 마치 레이터의 사진을 환등기에 꽂아서 그가 직접 보여주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이번 사진집은 좀 더 사진집다운 모습을 갖추어 더 마음이 간다. 사울 레이터가 생전에 친구들에게 자신의 사진을 환등기로 비추어 보여주길 좋아했다는 편집자의 글을 보니, 다른 이들도 사진집을 펼치면 환등기로 슬라이드 사진을 보는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지금까지 공개된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보면, 그가 깨어 있던 시간이라면 줄곧 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면밀히 바라보고 있었을 것 같다. 철학자들처럼 삶을 추상적으로 통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오감과 직관을 총 동원하여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차 안에서 창밖을 보거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 반사된 상과 만나는 새로운 형태를 찾아낸다. 혹은 거리의 난간 뒤에서 숨죽이며 바라보았을 사진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사울 레이터가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양산을 든 여인이 멀리서 지나가는 장면을 목격하는 사진을 보자(98). 현상되어 마운트에 끼워진 필름을 라이트박스 위에 올려놓고 웅크린 채 루페(loupe)로 이 사진을 들여다보았을 사진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분명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놀라워했으리라.


레이터의 사진에 남아 있는 빛바랜 뉴욕의 색은 눈 오는 길거리에서 차가 지나가는 사진(27)에도 남아 있다. 형체가 분명하진 않지만 노란색과 초록색이 있는 전경의 차와 원경의 빨간 차가, 그리고 길게 늘어진 흰 눈의 이미지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줄 뿐이다. 이어지는 몇 장의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거리의 붉은 리본과 노란색 차나 빨간색 글자, 어느 가을날 거리 벤치에 앉아 연인에게 키스하는, 빨간 코트를 입은 여인의 모습에서 내가 기억하던 맨해튼의 색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강렬하지만 오래된 코다크롬 필름 특유의 빛바랜 상태로 말이다. 20대에 입성하여 집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해외 전시나 강연을 제외하고는 거의 뉴욕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레이터에게 이 지역은 익숙한 장소, 익숙한 거리였을 테다. 하지만 업으로 패션 사진을 찍던 사람의 눈이 거리로 향했을 때, 그 눈은 뻔해 보이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지치지 않고 발견해나갔다.


사울 레이터 재단의 이사장이면서 이번 사진집 제작에 참여했던 마이클 파릴로는 레이터를 아주 평범한 것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즐겁다”(67)라고 말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화가의 재능을 지니기도 했던 레이터가 나에게 일러주는 삶의 깨달음은 일상의 삶 속에 놀라움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분수사진에서처럼 서로 무관한 사건, 이를테면 멀리서 양산을 들고 가는 여인의 이미지와 가까운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분수사이의 우발적인 관계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하듯 말이다. 하지만 분수사진은 전통적인 흑백 사진의 문법이 강하게 엿보인다.


여기에 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레이터의 사진을 흑백으로 바꾸어보면, 대부분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발견의 즐거움이나 잔잔한 감흥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반면 나와는 무관한 대상들을 찍었지만 오래된 슬라이드 필름 특유의 빛바랜 사진들은 내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아픔의 기억이나 상처를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이 작용이 레이터의 사진과 내가 연결되고 내가 비로소 그의 사진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색은 추상적인 요소다. 누군가에겐 우리의 유한한 삶의 덧없음을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에겐 흑백사진의 명암 변화에 버금가는 사진의 정서와 분위기를 더해주며 컬러 사진을 완결하기도 한다. 내겐 사울 레이터의 아름다운 컬러 사진들이 바로 그렇다.


물론 이 사진집은 사울 레이터가 직접 편집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운 감은 있다. 하지만 그가 우선 골라놓은 사진 중에서 사진가를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선별한 것이기에 같은 사진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 차이가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독자가 레이터의 사진으로부터 받는 즐거움과 감동이 덜하진 않을 것이다. 문자텍스트로 이루어진 다른 책들의 운명처럼 원고 혹은 책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이를 즐기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것이 레이터가 대중들에게 자신의 사진에 대한 설명이나 분석하는 일을 거절했던 이유일 테다.


10여 년 전에 사울 레이터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말년에 그가 살던 장소, 그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도시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신기한 느낌이 든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고 방황했던 시절, 그의 존재를 알았다면 필름 카메라를 메고 한번쯤 그를 찾아가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레이터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고 대뜸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 ‘나도 필름카메라를 꽤 오래 썼지.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 써. 디카로 찍기 시작한지 한 10년쯤 되었을 거야. 필름카메라로 찍고 결과물을 볼 때가 더 재미있긴 했었어. 필름카메라를 쓰고 있다면 익숙한 주변에서 계속 찍어 보라구. 시간은 사진가의 편이니까!*’(마지막 문장은 사울 레이터가 한 말(98)에서 인용함.)






[번역에 관한 사항]

121면에 사울 레이터가 <에스콰이어> 작업용으로 촬영한 슬라이드 500여 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어서 재즈 연주자 찰리 파커에 관한 기사 새의 발라드(Ballad of the Bird, 1957)’를 언급하는데, 아마 번역가는 찰리 파커의 별명이 (the Bird)’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만 여기에 주석을 더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the Bird'를 단순히 로 번역했는지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신 찰리라고 번역해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단순히 라고 번역을 해두면 이 가 찰리 파커와 무슨 상관인지 그 뉘앙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번역자와 편집자의 결정일 테다. 아쉬운 것은 모든 독자가 이런 점을 알지 못할 테니, 주석을 달아 주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1] "우리는 색채의 세상에서, 색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67)

[2] "어째서 색을 홀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색은 삶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사진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합니다."(67)
- 2002년 뉴욕 유대인 박물관 강연에서 사울 레이터가 ‘색’에 대해 한 말

[3] "아주 평범한 것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즐겁다."(67)
- 내가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

[4] "컬러 슬라이드는 벽에 영사해 볼 수도 있고, 인화해 볼 수도 있어요. 네거티브 필름과는 다르죠. 라이트테이블에 올려만 놓아도 그 고유하고 특별한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인 컬러 슬라이드는 라이트테이블 위에 올리는 순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입니다."(68)

[5]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는 그 나름의 고귀함이 있습니다."(68)
- 아마도 이 말의 진의는 사진의 본질 외에 사진을 꾸미려고 의도하거나 감상자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주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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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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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속에서도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인간의 모습

-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고


 

우리는 지구라는 환경에 맞추어 태어나 살아간다. 지역이나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환경에서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다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은 지구라는 환경에 한해 유효하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과 믿음은 지구를 벗어나면 곧바로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세계에 대한 앎이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 역사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단편 소설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과학 분야 지식의 거장들이 새로운 발견으로 기존의 앎이 도전을 받았던 순간, 무지(無知)의 지()와 마주했던 순간을 이야기한다. 만약 당신이 평생 믿어온 신념과 지식체계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어떻겠는가?


새벽녘에 슈바르츠실트는 자신이 파국을 발견한 것 같다고 말했다.”(70)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서 물리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군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같은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젊은 수학자 리하르트 쿠란트와 만나 밤새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고백을 한다. 슈바르츠실트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대한 정확한 답을 처음 얻은 인물이다. 그가 쿠란트에게 파국을 발견했다고 말했을 때, 이 파국은 특이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될 수 있는 블랙홀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계산해냈음을 의미했다. 빛마저도 탈출할 수 없는 이 영역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결코 정의되지 않았다. 이것이 위대한 천문학자, 수학자이기도 했던 슈바르츠실트가 맹점과도 같은 이 특이점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이유다. 이 지점에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법칙도, 나아가 물리학도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슈바르츠실트에게 특이점 발견이란 지적 파국의 순간이 있었다면, 20세기 초의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에게는 심장의 심장이라고 부른 실체가 있었다. 또 양자역학의 기초를 놓은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순수한 수학만으로 행렬에 기반을 둔 양자 역학을 구축했다. 슈뢰딩거의 양자 역학이 파동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반면, 하이젠베르크의 체계는 입자성에 토대를 두었다. 그동안 완벽하게 들어맞는 지식체계였던 뉴턴역학이 원자의 세계에서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놓였는데, 이 파국의 한 가운데에 자신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새로운 분야의 토대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여기게 되어 괴로워했다. 슈바르츠실트나 그로텐디크, 그리고 하이젠베르크 모두 자신들이 발견한 모순들에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신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파국의 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슈바르츠실트의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발견한 시공간 구조의 균열을 보수하고 우주를 파국적 중력 붕괴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감독한 독가스 공격으로 전장에서 많은 군인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인 이머바르는 분노와 절망을 안고 자살했다. 그녀 역시 화학박사였기에 남편이 관여한 일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었던 하버가 알아낸 지식이 절멸 수용소의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활용되었고, 그가 개발한 질소 고정법이 수백만 명을 죽인 화약과 폭약 제조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파국이었다. 반면 같은 기술이 비료 생산에 적용되어 수많은 이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세계 인구 증가에 기여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나아가 슈바르츠실트가 물질이 낳을 수 있는 파국이 인간의 정신과도 관계가 있을지 자문하는 대목은 자뭇 섬뜩하다. “인간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71) 이러한 장면에 대해 저자는 마지막 단편 밤의 정원사에서 화자의 입을 빌어 독자에게 메시지를 건네는 듯하다. 하나는 과학자들조차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몬 나무가 죽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정원사의 말에 따르면, 레몬 나무는 무수한 열매가 초과 중량으로 한꺼번에 익어 가지가 부러지고 죽어간다. 우리의 앎에 비판적인 성찰이 결여되어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파국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할 때,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믿음이 붕괴되는 파국의 순간에 우리는 세계와의 연대가 끊어지고 고립감을 느낄 것이다. 술집에 있던 한 사람이 하이젠베르크에게 말해봐요, 교수양반. 이 모든 광기는 어디서 시작됐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춘 겁니까?”(211)라고 물었던 것은, 우리가 세계와의 관계가 끊어질 때 광기가 시작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 같다. 특이점처럼 그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도, 정의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수학자 그로텐디크가 수학을 하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다”(99)고 말한 것처럼, 파국을 둘러싼 상황은 사랑과 관계의 경우에도 다를 바 없을 법하다. 나와 세계,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서 때론 불가피하게 파국을 맞는다. 우리가 이러한 파국을 두려워하여 세계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중단한다면 그야말로 관계회복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사랑과 관계 회복의 본질에 대한 실마리를 숨은 변수처럼 감춰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아낌없이 불태우다 마주한 파국 속에서도 다시 사랑하고, 관계 또는 삶을 회복하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조건은 아닐까.

 

 

 

 

 

 

[1] "새벽녘에 슈바르츠실트는 자신이 파국을 발견한 것 같다고 말했다."(70)

"진짜 두려운 것은 특이점이 맹점이며 기본적으로 불가지라는 사실이라고 그는 말했다."(70)

[2] "빛은 특이점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눈은 특이점을 볼 수 없다. 우리의 정신 또한 특이점을 이해할 수 없다. 특이점에서는 일반상대성 법칙이 여지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71)

[3] "그로텐디크는 다른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 없다. 그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웠는데, 그것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93)
- 수학자 그로텐디크 자신이 바로 정의되지 않는 특이점같은 존재가 아닐까.


[4] "내가 추구하는 총체적 이해로부터 어떤 새로운 참상이 벌어질까? 인류가 심장의 심장에 도달하면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까?"(97)

[5] "하이젠베르크는 이 분야의 토대에 근본적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 결함이란 아이작 뉴턴의 시대 이래로 거시 세계에 그토록 완벽하게 들어맞던 법칙들이 원자 내부에만 적용할라치면 와르르 무너진다는 사실이었다."(122)

[6] "그(하이젠베르크)는 비유를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순수한 수학만 이용하여 뉴턴이 태양계를 묘사한 것처럼 아원자 세계를 묘사했다."(138)

[7] "드 브로이는 파동 함수를 존재의 확률 밀도로 번역했다. 흐릿한 이미지, 희미한 존재, 확산하고 막연한 것. 이 세상 것이 아닌 무언가의 모호한 윤곽."(206)

[8] "하나를 더 정확히 파악할수록 다른 하나는 더 불확실해졌다."(215)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서술.

"양자의 실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양자가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양자의 성질들 중 하나를 규명하면 다른 것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217)

[9] "과학자들조차 더는 세계를 이용하지 못한다."(252)

"우리는 양자역학을 이용할 줄 알며 양자역학은 마치 신기한 기적처럼 작동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이해하는 사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단 한 명도 없다."(253)
-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말했을 법한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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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비행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초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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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제약을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 도약 

- 마법의 비행


(원제) Flights of Fancy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지음 | 야나 렌초바(Jana Lenzova)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



 

지난 5(202285)에 날아올랐던 대한민국 최초의 달 궤도 탐사선 다누리가 순항중이라고 한다. 달에 도착하면 달 궤도를 돌면서 탐사활동을 하게 된다. 다누리를 탑재한 로켓이 하늘로 솟구치는 장면에서 어린 시절 할머니의 흑백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의 비상 장면을 떠올렸다. 꽤나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장면이었다. 마침 이번에 생물학자이자 저술가 리처드 도킨스가의 마법의 비행을 읽으면서, 그가 비행을 중력으로부터 새로운 차원으로의 탈출이라고 언급한 대목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생물학자로서, 도킨스는 수많은 육상 동물뿐만 하늘을 나는 동물들(, 곤충 등)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간직했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마법의 비행은 비행에 대한 저자의 호기심과 설레임이 담긴 책이 아닐까하는 인상을 받았다. 창조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진화론을 강력하게 옹호해온 과학자로서, 그에게 이번 책은 비행이라는 키워드 아래 동물의 비행과 인간이 쌓아 올린 비행으로의 도전 과정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이 책을 엔지니어이자 테슬라 자동차의 창업자, 민간우주기업 스페이스 X의 창업자인 일론 머스크에게 헌정한 것도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처음 던지는 질문은 생물들에게 비행이 필요한 이유다. 특히 진화적 관점에서 비행이 지니는 이점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많은 생물들이 날아다니게 된 것일까. 우선 주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생존을 위해 이주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지구는 자전축이 공전면에 대해 일정한 각도로 기울어져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돈다. 이것이 주기적인 계절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말은 지구상의 지역에 따라 거주 동물의 서식 환경이 변화한다는 의미다. 이 때 비행은 생물 종의 생존을 보장하는 해결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북국제비갈매기의 사례를 보자. 이 새는 두 달 간 북극권에서 남극권 사이를 오가며 매년 겨울 없이 여름만 두 번 보낸다고 한다. 날개가 있다는 것따라서 비행은 특정 생물이 환경 변화에 대해 융통성 있게 대응하도록 해주었다.

 


이와 달리 어느 지역 환경이 좋아서 생물이 이주할 필요가 없다면 어떨까? 특히 천적이 없고 이동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던 새는 날아다닐 필요가 없게 된다고 도킨스는 말한다. 한 사례로, 날개가 있지만 날 필요가 없게 된모리셔스 섬의 도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이 새는 비둘기과의 대형조류로 유럽에서 온 선원들에 의해 17세기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도와 마찬가지로 날 필요가 없게 된 새에는 날개가 퇴화해버린 뉴질랜드의 국조 키위, 아프리가의 타조, 남아메리카의 레아, 호주의 에뮤, 지금은 멸종해버린 뉴질랜드의 모아, 그리고 역시 멸종한 마다가스카르의 코끼리새가 있다. 도도를 제외하고 지금 언급한 새들은 모두 날지 못하지만 튼튼한 다리로 달리기를 잘하는 주금류(ratite, 走禽類)에 속한다.


 

여기에서 다시 궁금해지는 것은 북극제비갈매기와 도도가 모두 날개를 지니고 있지만, 어느 종은 날개의 기능을 다 하지만 또 다른 종에게 날개의 기능이 퇴화되는 이유다. 비둘기과에 속한다는 도도의 선조가 날 수 있었다면, 멸종하던 시기의 도도는 왜 날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냥 나는 기능을 유지하면 되는 것 아닐까싶은데 말이다. 저자는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큰 의문을 던지고 있다. 도킨스에 따르면, 비행이라는 것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진화적 관점에서 생물이 비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이 점을 짚고 가보겠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행은 생물들에게 보기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기능이다. 생물이 이 기능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만만치 않다. 깃털처럼 가벼운 벌새의 경우, 정지비행을 비롯한 정교한 비행 기술을 펼치기 위해서 몸집에 비해 매우 큰 용골돌기(가슴뼈)와 잘 발달된 날개근육을 필요로 한다. 반면 날개가 있는 여왕개미나 흰 개미 여왕은 평생 한 번 하는 짝짓기 후 자신의 날개를 떼어내는 행동을 한다(64, 67). 이들에게 날개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도구일지를 보여준다. 새뿐만 아니라 말벌도 비행을 위한 날갯짓에 엄청난 당을 태워야 한다. 게다가, 튼튼한 날개를 자라게 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결국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65). 따라서 모리셔스 섬의 도도처럼 날개가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도, 생존을 위해 날아야 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는 비행에 필요한 엄청난 에너지를 절약하여 이를 번식과 종족 보존에 더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곧 종의 생존 과정에는 한정된 자원과 생존을 위해 이 자원을 사용한 무기 장착 과정 사이의 경제학이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진화는 기회주의적이다.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보다 기존의 것을 땜질해 쓰곤 한다”(114)라고 한 이유를 검토해볼 수 있다. 예컨대, 칼새는 알을 낳고 품을 때만 지상에 내려오는 반면 짝찟기를 비롯하여 일생 대부분을 하늘에서 보낸다. 이렇게 에너지가 훨씬 많이 드는 비행을 칼새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반면, 갈비뼈가 양옆으로 나온 구조를 활공에 사용하는 날도마뱀이나(290) 갈비뼈를 양옆으로 내밀어 몸 전체를 납작하게 만들고 30미터를 활공하는 날뱀(309), 가슴의 겉뼈대가 자라 갖추어진 곤충의 날개(183)처럼 생물은 생존에 필요한 몸의 특정 기능을 새로 만들어내기 보다는 기존의 해부학적 구조를 변형 또는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고자 하지만, 조류의 깃털이 파충류의 비늘에서 변형된 것(119)이라는 설명은 여러 생물들이 자연의 제약 조건 아래에서 비행을 향해 보여주는 진화 과정(수렴 진화)을 잘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특정 개체, 혹은 종이 갖추게 된 생존전략의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물들은 거창하게 생존을 위한 장치부터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설계를 조금씩 변형해가는 방식을 취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러 변이를 통해 생존 확률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다. 물론 다양성을 갖추게 되는 변이의 과정이 이를 위한 목적을 갖추고 여기에 따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양성을 갖춘 변이를 통해 특정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한 개체들이 결과적으로남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경이 주는 선택압과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총동원하여 필요한 기능을 갖추되, 이를 이루기 위한 균형점을 찾는 융통성이 필요하게 된다. 이처럼 진화의 관점에서 생물의 비행은 생존에 필요한 경우 몸을 변형시켜서라도 갖추게 되지만, 어떤 이유로 필요 없어지면 곧바로 퇴화해버리는 값비싼 기능이었던 셈이다.


 

도킨스는 진화론의 옹호자로서, 그리고 무신론자로서 줄곧 창조론자들과 논쟁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동료 과학자들과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논쟁을 해온 과학자다. 자신의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이나 만들어진 신 비롯한 여러 작업을 통해 거침없고 신랄한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면밀한 관찰자로서 도킨스의 섬세한 설명이 돋보이는 부분도 만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동력 비행과 작동방식을 다룬 장에서 비행기 날개가 기류와 만나는 각도가 커져 비행기의 속도와 안정성이 크게 떨어지는 현상(실속)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그는 왜가리나 백로 같은 큰 새가 착륙할 때 일부러 실속(통제된 실속)을 일으킨다고 언급하는데, 이 새들이 내려앉을 때 뒤쪽 깃털이 위로 솟아오르는 것은 바로 이 실속 때문이라는 것이다. 항공기 전문가였다면, 새의 이런 미묘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 이유를 항공기 날개의 구조와 연관 지어 이처럼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은 도킨스의 섬세한 설명과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마법의 비행에서 다소 아쉬운 점 몇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앞부분에서 했던 내용이 뒤에서 여러 번 중복되어 설명되고 있어서 짜임새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나온다. 또 뒤로 갈수록 앞에서 유지되던 글의 힘과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른 아쉬운 점은 이 책에 참고도서 목록이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이 애초에 청소년 대상으로 집필된 책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외국의 교양과학서에 빠지지 않는 참고도서 목록이 원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참고도서 목록이 없다는 것은, 독자가 저자의 주장이나 근거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비행이라는 기능에 도달하고자 했던 노력을 종합하며 흥미 있게 전달한다. 생물학자의 관점에서 비행을 둘러싼 자연의 제약과 생존 전략 사이의 균형을 찾아온 자연의 사례를 흥미롭게 제시했다. 말벌이나 여왕개미와 같은 곤충의 날개나 흰 개미 여왕의 날개, 날다람쥐의 활공을 돕는 비막이나 박쥐의 날개 사례는 서로 독자적으로 몸의 일부 구조를 변형 또는 보완하여 비행이라는 기능을 갖춘 자연의 수렴진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에게 달 궤도 탐사선의 비상이 갖는 의미처럼, 인류에게 비행은 중력을 극복하여 인류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 도약을 의미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인간의 이성에 기반 한 과학 활동을 통해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이에 저자는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322)고 과학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수정 건의]

(41) ‘태양을 기준으로 을 수 없다 을 수 없다

(70) “한편 비둘기의 몸집은 점점 커졌다.” 도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비둘기를 언급하는데, 이 부분은 도도가 비둘기(pigeon & dove)를 포함하는 과(family)에 속하기 때문에 도킨스가 도도를 the pigeon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를 추가적으로 달지 않는 한, ‘비둘기를 그냥 도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혼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 "외딴섬은 대체로 포유류가 아니라 조류의 세상이다."(54)
- 모리셔스 섬의 도도와 이웃 섬의 날지 못하는 새(특히 주금류)에 대한 언급을 하며

[2] "진화는 기회주의적이다.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보다 기존의 것을 땜질해 쓰곤 한다."(114)

"진화는 기계 설계자처럼 처음부터 새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설계를 조금씩 하나하나 변형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 변형 단계에서 번식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278)

[3] "깃털은 세계의 경이 중 하나다. 공중에 띄울 수 있을 만치 튼튼하면서 뼈보다 딱딱하지 않은 경이로운 장치다."(116)

[4] "복잡한 기관과 행동은 많은 작은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단순한 규칙을 따를 때 출현한다. 즉, 복잡성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출현한다."(193)
- 찌르레기들의 군무와 창발(emergence)의 원리에 대한 언급.

[5]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322)

"비행이 중력으로부터 세 번째 차원으로의 탈출인 것처럼, 과학은 일상생활의 평범함으로부터 나선을 그리면서 상상력이 점점 희박해지는 높이까지 탈출하는 것이다."(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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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 : 분류된 단장 (프랑스어 원전 번역, 양장) 기독교 명작 베스트 6
블레즈 파스칼 지음, 김화영 옮김 / 선한청지기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도전해보는 파스칼의 호교론

- 팡세 - 분류된 단장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지음 | 김화영 옮김

[선한청지기] (2022)

 



몇 년 전에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보려고 책을 펼쳤지만, 오래가지 않아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고전이라는 이유도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런 맥락 없이 시도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기대치는 높은 반면 분절된 단상 형식의 글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책을 무작정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단번에 이해해보고자 했던 것이 중단의 이유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이 고전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번역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번역자이자 파스칼 연구자인 김화영 교수가 이전에 참여했던 번역 작업에서 남겨놓았던 글들이 기억났다. 그의 글은 서문이나 에필로그 혹은 역자의 말 형태로 만났던 것인데, 언제든 작품에 대한 역자의 깊은 이해와 존중, 그리고 독자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팡세를 읽다보면 역자의 주석에 몽테뉴의 에세에서 가져온 문장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출생으로만 따지면 90년 늦게 태어난 파스칼이 몽테뉴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몽테뉴의 글을 읽어본 기억을 떠올려보면 인간에 대한 그의 정밀한 관찰과 이해가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곤 했다. 39세의 생애로 삶을 마감했던 파스칼 역시 인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팡세에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거의 4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다. 인간에 대한 적나라하고 놀라운 통찰이 담긴 파스칼의 문장과 만날 때마다 밑줄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번역자의 상세한 해설에 따르면, 파스칼은 진보적인 수학자이자 과학자로 이른 나이에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31세가 되던 1654년의 어느 날, 그는 성경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회심을 하게 된다. 이 일생일대의 경험은 파스칼의 글이 몽테뉴의 것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특징이 된다. 몽테뉴의 글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집필되었지만, 파스칼은 유신론자의 확신으로 써나갔다. 두 사람의 글이 갖는 공통점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점이겠다. 몽테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대상을 진실로 이해하고자 면밀히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주목했다. 따라서 에세의 근간을 이루는 관심사를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몽테뉴의 질문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이렇듯 몽테뉴의 관심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점이 자기 자신을 향한다. 이런 맥락에서 몽테뉴의 글이 회귀적이고 성찰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파스칼의 글이 몽테뉴와 마찬가지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관심은 결국 신을 향해 나아간다. 역자의 표현을 사용하면, 기독교적 신앙을 옹호하고 이를 되찾기를 바라는 호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몽테뉴의 관심이 자신을 향하는 회귀적인 글이라면, 파스칼의 글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며 독자를 설득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안내하는, 점진적이고 직선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신앙을 설파하는 글로는 상당히 인식론적이고 지적인 방식을 취하는 셈이다. 여기에서 파스칼은 일반적인 수학자 혹은 과학자들처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혹은 이성이 지니는 우월함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경계한다. 파스칼이 파스칼의 정리같은 수학적 업적이나 진공의 존재에 대한 실험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증명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누구보다도 이성의 힘과 그 한계를 잘 인식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회심의 경험 이후, 인간의 이성만능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신 앞에 보다 겸허한 자세를 취했던 것 같다.


 

팡세에는 파스칼이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 인간이 위치한 지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그는 이중적인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바로 비참하고 비열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존재인 인간의 모습이다. 상반되고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모습은 바로 이성만능주의에 대한 경계와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과정에서 제시된 인간의 조건이다. 이 점에 대해 파스칼이 인간이란 얼마나 괴이한 존재인지 이야기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인간이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가? 얼마나 진기하고 괴기스러우며, 혼돈하고 또 얼마나 모순투성이이며, 얼마나 경이로운가? 만물의 심판자이면서 쓸모없는 벌레, 진리의 수탁자이면서 불확실한 오류의 시궁창, 우주의 영광이면서 우주의 폐기물 같은 존재다.”(114)


 

파스칼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촌철살인의 통찰을 가끔씩 꺼내 독자에게 보여준다.


 

한편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통찰에서 놀라움과 감탄을 느끼면서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파스칼이 적어내려 갔던 생각들에 모두 동의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파스칼이 거역할 수 없는 기독교 권위 위에 수립된 신앙의 진리 두 가지를 언급한 대목이 그렇다.


 

하나는 인간은 창조의 상태에서든, 은총을 입은 상태에서든 모든 자연 만물보다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신성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죄와 타락의 상태에서 인간은 처음 상태에서 추락하여 짐승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명제 모두 견고하며 확실한 것이다.”(118)


 

우리는 인권과 더불어 동물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맥락에서 독자가 파스칼의 생각과 만나면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여럿 나올 것이다.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성찰에 감탄하는 부분이 훨씬 많이 나오지만, 이런 대목은 시대적인 변화와 역사적·문화적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본성은 400년 만에 변할 리는 없다.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깊은 이해를 여전히 참고하고 배울 수 있는 이유다. 반면 독자가 신앙을 회복하도록 의도한 파스칼의 접근 방식은 지금과 달리 당대에는 어떠했는지 이해하는 차원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파스칼이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다른 종에 대한 인간의 우월적 시각은, 파스칼이 비판하는 데카르트의 세계관과 더불어 현재 독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글이 단상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빠르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일관된 사고의 흐름 속에서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던 주제가 뒤의 단장에서 다시 변주되면서 반복되곤 한다. 따라서 팡세는 오히려 책의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접근이 가능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부터 읽어나가면 주석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읽어나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제1부에서 권태라는 소제목으로 묶인 단장을 읽고 나서 이번에는 오락/기분전환이라는 소제목 아래의 단장들을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치워두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읽으며 이해를 더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책에 좀 더 흥미를 느끼고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번역자의 서문과 세심한 해설 때문이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평생 프랑스 문학, 특히 파스칼을 연구해왔던 역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적극적으로 가미된 번역본이 다른 번역본과 다르게 느껴졌다. 한 번 도전 했다가 덮었던 파스칼의 책이 이번 기회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면 무엇보다 역자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역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대한 번역 표현을 위해 서양의 코에 대한 미학적·관상학적 측면까지 고민하고, 파스칼의 육체적 질병에 대한 사항까지 염두에 두고 번역을 했다. 고전 번역은 일반 독자로서 엄두가 잘 나지 않는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나아가 역자의 꼼꼼한 해설은 파스칼의 시대와 팡세가 집필된 이유와 맥락을 파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수학과 과학에 큰 기여를 하며 영민함과 오만함이 흘러 넘쳤을 청년 시절뿐만 아니라, 회심 후 인간에 대해 이해하여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설파하며 신에게 다가가고자 했을 30대의 파스칼까지. 이번 독서를 통해 파스칼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무리하면서 책의 구성에 대한 생각을 추가해본다. 우선 주석이 본문과 분리되어 책읽기가 편하지 않았다. 독자마다 책 읽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주석을 읽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주석이 너무 많다고 평점을 낮게 주는 독자도 보았는데, 나는 책을 천천히 읽더라도 주석을 대체로 다 읽는 편이다. 그러므로 팡세와 같은 책을 읽을 때는 본문 내에 주석이 괄호 안에 삽입된 형식이나 책 뒤에 주석이 들어가는 형식은 문장을 놓치게 되거나 피로감을 쉽게 느끼게 된다. 앞에서 끊어진 문장 뒤에 이어지는 지점을 찾거나, 책장을 계속 앞뒤로 들추어야 해서 읽는 흐름을 놓치고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역자의 주석이라면 나는 각주 형태를 선호한다.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궁금한 점을 곧바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석이 편집되어 있는 형태 중에 가장 피곤한 구성은 주석이 분리되어 각 장 뒤에 달린 형태인데, 아쉽게도 팡세-분류된 단장이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폰트 크기가 작아서 읽기도 쉽지 않다. 주석의 폰트를 좀 더 크게 하고 각주 형태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1] "상상력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49)

[2] "(우리는) 과거와 미래 속에서 헤매면서도 자기에게 속한 유일한 시간, 즉 현재를 고려하지 않는다."(52)

[3] "자신을 알아야 한다. (...)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다."(71)

[4] "생각하는 갈대. 나의 가치는 공간적 차원이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 우주가 공간으로 나를 포함하면 나는 하나의 점처럼 삼켜진다. 반면, 나는 생각으로 우주를 포함한다."(100)

[5]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만한 이성의 떠들썩한 움직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겸허한 굴복에 있다."(118)

"이성의 굴복과 활용. 참된 기독교는 이에 근거한다."(168)

[6] "인간 본성 전체를 이해한 다음에. 어떤 종교가 참된 것이 되려면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과 비루함, 그리고 각각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 이외에 어떤 종교가 그것을 알고 있었는가?"(207)

[7] "성경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이다."(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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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추석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2-09-08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2-09-08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팡세 엄청 어려워보입니다 ㅡㅡ 그래도 역시 당선! 축하드립니다 초란공님~!!
 



















20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할버슈타트에 무슨 일이?

-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 지음 | 토마스 콤브링크 주해

이호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그 상품들은 아래 도시로 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주 비싼 물건들이지요. 실용적 관점에서 보아도 고향에서 많은 노동력을 들여 생산한 것을 산이나 빈 들판에 그냥 버릴 수는 없습니다.”(81)

 

인용문만을 보면 UN이나 국제인권단체에 속한 사람이 난민들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의 사람들에게 구호물자를 전하는 임무를 맡은 상황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숭고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의 자부심 어린 진술처럼 보이니 말이다. 여기에서 상품이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는가? 바로 폭격기에 매단 폭탄을 의미한다. , 다시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말을 한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8공군 여단장이었던 프레드릭 L. 앤더슨으로, 그가 한 독일 기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가져왔다.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의 작가 알렉산더 클루게는 독일의 소도시 할버슈타트 출신이다. 독일 작가이자 영화감독, 방송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무엇보다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여겨진다. 유대인 철학자 테어도어 아도르노와도 아주 가까운 교우관계를 맺었고, 그를 통해 프리츠 랑을 만나 영화계에도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클루게가 1932년 생이므로, 고향 할버슈타트가 연합군의 폭격기가 떨어뜨린 값비싼 상품으로 불타오를 때 겨우 13살이었다. 이 책은 할버슈타트 폭격 당시 살아남았던 여러 시민들의 증언도 기록하고 있다. 클루게의 경험담은 이 책의 해설을 담당한 토마스 콤브링크의 재인용으로 등장한다.


 

고폭탄의 폭발은 깊게 파인 자국을 남긴다. (...) 194548일 그런 것이 떨어져 파고드는 것을 나는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경험했다.”(197)





지금의 체코지역에서 태어난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1912년에 이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 할버슈타트를 방문하면서 자신의 일기에, ‘완전히 오래된 도시로 묘사했다. 사람들이 창 안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고도 기록해 놓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도시는 서기 804년에 카를 대제로부터 주교령으로 지정되어 종교적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던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는 194548, 30분 가량 이어지던 공습으로 고폭탄 504톤과 소이탄 50톤이 투하된 후 도심의 80%가 파괴되고, 2000명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작가 클루게는 이 폭격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시청사를 포함하여 도심부가 빈터로 변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숱한 잔해와 수많은 시신, 피의 냄새를 맡았으리라. 이 기록들이 소위 연합군의 적국 시민이 남긴 기록이므로, 그 피해가 과장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시 연합군에 소속되어 있던 미래의 유명 작가의 말도 들어보자.

 


내가 떠올린 이 작가는 바로 커트 보니것이다. 그는 제2차 대전 당시 육군 정찰병으로 참전했다가 치열했던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의 동부 지역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전쟁포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여기 있을 때 저 유명한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경험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25년 후에 쓴 소설이 바로 5도살장이다. 지금은 드레스덴이 독일의 반도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첨단 도시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방공호도 거의 없었고, 담배 공장이나 클라리넷 공장 정도가 전부였던 낙후된 중소도시였다고 한다. 폭격이 시작되자 보니것은 지하 2층의 거대한 고기 저장소로 몸을 피했는데, 폭격이 끝나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도시가 사라져있었다고 했다. 참고로 작가 맬컴 글래드웰은 어떤 선택의 재검토에서 영국 공군이 수행한 3일간의 폭격으로 65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드레스덴 중심지를 파괴하고 민간인 25000명을 죽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구약 성경창세기에는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느님이 보기에 이 도시의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질러 의인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유황과 불을 소나기처럼 퍼부으며 도시를 멸망시켜버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해버리는 도착적이고 모순적인 신에 관한 이야기는 제쳐두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힌두교의 신들 역시 창조와 파괴 행위를 하나의 우주 원리처럼 받아들이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적국의 시민 클루게와 연합군 소속 보니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값비싼 합성 마그마에도 끄떡없이 하느님이 지켜주었던 의인이었던 것일까. 물론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로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이 운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주제의 책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클루게의 전후 기록문학의 성격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전쟁과 자본주의의 논리


 

위에서 인용한 미 8공군 여단장 앤더슨의 말에는 전쟁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진실이 담겨있다. 클루게는 본문에서 할버슈타트의 여러 시민들이 남긴 증언과 자신이 기록한 내용을 종합해두었다. 하지만 이는 공습에 대한 분석보다는 1차 사료로서 중요성이 드러난다. 클루게의 기록들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은 주해를 맡은 콤브링크의 도움으로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다. 콤브링크에 따르면, “클루게는 공중전이 수요와 공급 체계를 통해 규율된다는 점과 이것이 경제 분과의 하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공중전을 도덕적 이유에서 좀처럼 정당화할 수 없을지라도 사람들은 실업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222) 이 진술은 클루게가 주목하고 지적하고자 했던 전쟁의 본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말하자면 할버슈타트 공습을 포함한 폭격전, 나아가 전쟁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후방의 고향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산업이라는 말이었다. 이는 전쟁이 어떤 근사한 명분을 내세우든, 혹은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할 수 있든, 우리의 일자리가 보전되고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한 전쟁에 한쪽 눈을 감고 찬성표를 던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클루게는 전쟁 뒤에 가려진 자본주의의 논리를 이토록 생생하게 간파해내고 있었다.


 

그러면 연합군의 폭격 정당성을 주장하는 연합군 측의 진술도 살펴보자. 당시 준장이었던 로버트 B. 윌리엄스는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거기 사는 주민들의 저항 정신을 없애버려야 합니다”(185)라고 말했다. 일견 그럴듯한 견해다. 전쟁은 한편으로는 심리전이기도 하다는 맥락에서 그렇다. 그리고 전쟁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빠른 시기에 종결짓는다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이들의 논리도 그럴듯해 보인다. 이 논리는 독일 도시들을 폭격했던 미 공군의 두 군부집단(폭격 마피아)의 논리를 보여준 맬컴 글래드웰의 저서 어떤 선택의 재검토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논리다. 이 두 집단의 차이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 논리는 제2차 대전, 혹은 지금까지도 적국의 시민들로 하여금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전쟁을 더 효과적으로 빠르게 종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 곧 적국의 시민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이들을 폭격대상으로 삼는 데 어떤 도덕적 논의도 불필요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맬컴 글래드웰도 책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듯이, 연합군이 독일 도시를 폭격할 때 우선 적용했던 폭격 방식으로 우선 도살자 해리스라고 불렸던 영국 공군 사령관 아서 해리스의 융단 폭격방식을 꼽을 수 있다. 해리스는 앞서 보니것이 경험했던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지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 폭격의 효과를 보다 높이기 위해 불에 잘 타는 목재가 많은 지역, 특히 구시가지의 빈곤한 지역을 중심으로 폭격이 계획되고 작전이 수행되었다. 할버슈타트의 구시가지는 30여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카프카가 자신의 일기에 남겼던 것처럼 중세식 목골조 건물이 많고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다. 여기에 고폭탄뿐만 아니라 합성 마그마나 다름없던 소이탄(화염방사 폭탄)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해보라. 소이탄은 하버드 대학의 화학 교수가 점성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달라붙어 복사에너지를 전달한다는 목표로 일본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무기다(맬컴 글래드웰, 어떤 선택의 재검토 7장 참조). 이를 쉽게 풀어 이야기하면 소이탄은 불꽃이 작게 나뉘어져도 불을 끄기 매우 어려워 달라붙은 모든 대상을 끊임없이 태우는 무기다.


 

또 소이탄(혹은 네이팜탄)은 베트남 전쟁 당시 숲과 민간인을 불태우는데 무수히 떨어졌던 폭탄인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이 인천의 월미도와 주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 사용했던 무기이기도 하다. 이 무기는 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두렵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문제는 이 무기가 적국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과 모순이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우군이었음에도 우리 시민들은 소이탄으로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한 마을에 함께 살던 일가친척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에는 미 군부가 주장하는 어떤 엄정한 도덕적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 폭격 마피아들에게는 오직 현재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 어디인가만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도시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82) 이 말은 앞에서 언급했던 미 8공군 여단장 앤더슨의 진술이다. 클루게의 기록에 앤더슨은 이런 말도 덧붙인다. ‘폭격에 침착한 접근이란 없으며, ‘의심 속의 접근만이 존재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앤더슨으로 대표되는 폭격 마피아들의 논리는 적군이거나 적군과 내통할 수 있다고 보이는 모든 시민들을 싹쓸이하듯 폭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다. 여기에 어떤 도덕적 정당성이 들어갈 여지가 있을까? 이들이 하는 말이 다 개소리라고 여기는 이유다. 오히려 앞에서 값비싼 상품(폭격기에 매단 폭탄)을 산이나 빈 들판에 그냥 버릴 수는 없다고 했던 프레드릭 앤더슨의 대답이 솔직하게 들린다. 이 폭격 마피아들이 주장하는 도덕적 정당성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며 부실한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만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콤브링크의 해설에 따르면, 클루게 역시 사기 저하용 폭격이라는 생각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근거는 당시 폭격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적하는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클루게는 폭격을 당하는 도시의 시민들이 처한 극단적이고 무력한 상황을 언급한다. ‘방어력이 전무한 상태에 있는 시민들과 폭격기 비행단 사이에 존재하는 동등하지 않은 부당한 관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콤브링크가 곁들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주민들은 항복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공격자와 공격당하는 자 사이에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접촉을 할 수 없기’(211) 때문이다.

 


또 현실적으로 폭격을 위해 값비싼 상품을 잔뜩 싣고 이륙한 폭격기들은 실제로 주민들이 항복 신호를 보내와도 발견하기 어렵고, 항복 신호를 보았다고 해도 이들이 현장에서 폭격을 중단할 권한은 없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오가는 이 순간에, 몇 시간이나 걸릴 수 있는 비행단 책임자들의 판단을 기다릴 수 있는 폭격수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폭탄을 잔뜩 싣고 돌아와서 착륙하는 행위는 또 다른 자살행위나 다름없이 위험한 행위다. 그러니 이 상품들은 이륙한 이상 반드시투하되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의 제약은 보다 큰 범주에서, 그러니까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전쟁이라는 범주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파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후방의 고향에서 일자리를 유지하고 경제를 부흥한다는 실질적인 효과에 비하면 논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루게의 할버슈타트 공습은 바로 서방에서 수행하는 전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이런 맥락을 제공한다.



 

전후 독일인들이 안게 된 도덕적 딜레마


 

독일 시민에 대한 공습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도살자 해리스’(영국 공군 사령관 아서 해리스)의 논리는 독일이 먼저 도시들을 공습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독일 시민의 이익에 관해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이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도덕적 감수성의 수준은 딱 이정도 수준에서만 작동했다. 얼마나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은 것과 무관하다. 또 이들이 가정에서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훌륭한 가장이자 부모였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조건과 별개로 현실은 보니것이 포로로 있던 드레스덴에 융단 폭격으로 싹쓸이하도록 지시했던 지도자의 도덕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1942년 영국 공군 선전 영화에서 아서 해리스가 구두로 한 표현을 콤브링크가 재인용한 대목을 다시 보자.


 

나치들은 마음대로 다른 누구나 폭격할 수 있는데 절대로 거꾸로 폭격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당히 유치한 미신을 가지고 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로테르담, 런던, 바르샤바와 거의 반백(半百)에 가까운 다른 장소에서 상당히 어리석은 자기 이론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바람의 씨를 부려놓았는데, 이제 그들은 폭풍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189)


 

나는 이 대목이 특히 소름이 돋았는데, 문득 생각나는 장면에 대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구약 성경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의 홍수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느님이 물로 세상을 멸망시킨 이후 노아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다. 영어판 성경에는 이 대목이 The fire next time!이라고 적혀있다. 이 표현은 이번에는 물로 했지만, 다음에는 불로 멸할 것이라고 전하는 하느님의 경고의 메시지였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해리스의 모습이 보복하는 신과 오버랩되었다. ‘도살자 해리스는 자본주의를 작동시켜주는 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서다. 아서 해리스는 내가 좋아하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등장하는 한 인물도 떠올리게 한다. 누구와 닮았을까? 나는 해리스의 진술을 읽으면서 나의 다리를 물어뜯어 갔으니 너는 나의 복수를 받을 것이다라고 외치던 선장 에이해브의 광기를 떠올렸다.


 

전후 기록문학으로서 클루게의 공습 기록을 높이 평가한 인물은 같은 독일인이었던 W.G. 제발트(Sebald)였다. 이 책의 해설을 담당했던 콤브링크의 언급에 따르면, ‘제발트는 공중전에 관한 모든 소설과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숫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중전에 대한 질적 분석이 더 중요하다’(200)면서 클루게의 할버슈타트 공습을 높게 평가했다고 말한다. 실제로도 연합군의 독일 도시 공습에 관해 강연하고 정리한 공중전과 문학에서 제발트는 클루게의 기록을 상당히 비중 있게 언급했다. 제발트는 할버슈타트 공습가운데, 폭격 직후 방공삽을 들고 영화관을 치우려 했던 영화관 직원 슈라더 부인의 이야기를 인용하는데, 이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슈라더 부인은 영화 상영이 시작될 오후까지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영화관을 치우려고 했다. 그녀는 영화관 지하실에서 발견한 불에 탄 시체 부위를 모아 빨래용 솥단지에 담으며 주변을 정리했다는 것이다(공중전과 문학, 61). 이 이야기의 진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불타는 도시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았지만 판단이 중지된 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제발트가 제기하는 또 다른 물음 가운데 전후 독일인들이 안게 된 도덕적 딜레마가 있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민족이 이를 응징하려던 연합군의 폭격을 받은 상황에서 시작해보자. 콤브링크는 히틀러를 권좌에 올려놓은 이 독일인들이 가해자인가 아니면 피해자인가를 물었던 제발트의 문제의식을 가져온다. 콤브링크는 이런 도덕적 책임에 관한 질문이 할버슈타트 공습과 같은 사건들에 대해 독일인들이 이야기를 꺼내길 주저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희생자는 자신에게 벌어진 부당함을 고발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그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자기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기 힘들다.”(189)고 말이다. 이런 상황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인권을 유린하며 자원과 재화를 약탈했던 일본 정치계 및 군부의 입장과도 조금 다른 결을 갖는다. 이들은 피해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언제나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하는 피해자에는 순수한 일본인들만이 포함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까다롭고 안타까운 상황 속에 있다.


 

제발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공중전에 대한 양적 분석 말고도 질적 분석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그 이유 가운데 한 가지를 생각해보면, 피해 보상에 대한 문제보다 희생된 자국 국민에 대한 애도가 전무한 상황 때문이다. 제발트는 희생자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 이들에 대한 애도가 없는 독일 사회에 분노하고 이를 비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폭격을 받는 도시의 시민들은 이 순간 항복 할 수 있는 길이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또 폭격 이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망각되어 갔다. 할버슈타트 공습 당시에 불 폭풍한 가운데 있던 당사자로서 클루게는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를 자신과 당시 시민들의 증언으로서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공중전과 폭격에 대한 양적 분석만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콤브링크가 인용한 볼프강 벤츠의 국가사회주의 백과사전에는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공습으로 독일 시민 약 60만 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188). 우리는 나치에 의해 사망한 600만 명의 유대인과 독일 시민의 희생자 수를 단순히 비교하여 도덕성을 결정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국이 일본에 두 개의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기 전에도 1945년의 6개월 간 일본의 도시 67개국을 공습했으며, 원자폭탄과 더불어 수 십 만 명의 희생자를 낸 것도 일본이 적국이어서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제발트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이를 계속 이야기해야만 한다.



 

전쟁에 당연한 것이란 없다: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클루게가 할버슈타트 공습을 발표한 이후 제발트와 같은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았겠지만, 많은 이들의 비판과 의구심도 받았을 테다. 특히 가해국의 시민이 제기하는 이런 문제는 특히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할버슈타트의 영화관 직원 슈라더 부인의 이야기는 믿기 힘들거나 과장된 이야기라고 의심할 수도 있겠다. 반면 기록문학으로서 그리고 폭격이 이루어지고 있던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작가의 이야기이므로 독자는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기록문학, 다큐멘터리 작업은 으레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여겨지지만, 콤브링크는 기록문학의 본질적인 문제도 놓치지 않고 언급한다. 바로 여러 사건과 글의 소재를 작가가 선별하고 조합한다는 문제다. 콤브링크는 작가가 개입하기 때문에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융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문제에 대한 클루게의 입장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무언가 더 그럴듯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 미심쩍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항상 현실인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저는 현실이란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자라고 보기 때문에 저에게는 종종 오류들이야말로 소위 팩트로서 더 정확한 증거가 됩니다.”(207)


 

따라서 아무리 핍진성을 전제로 하는 기록문학, 다큐멘터리 작업이라고 해도 내게는 작가가 어느 지점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가를 독자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만약 절대 현실이라는 것이 있다면, 다큐멘터리의 현실은 이 절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어느 지점에서 형성된 하나의 구성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전쟁의 현실에서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기에 기록문학 작가에 의해서 재구성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건을 제시해도 누군가에게는 그렇다면 다른 방식의 폭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공중전을 정당화한 이들의 논리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아마도 이들이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이 불합리해서가 결코 아니다. 다만 당신이 자본주의가 어때서? 라고 묻는다면, ‘자본주의만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은 것이다. 오로지 모비 딕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이 한 가지에만 미쳐 있는 에이해브 선장의 일신주의적 광기와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 알렉산더 클루게나 제발트뿐만아니라 독일인들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마주하고 극복해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클루게가 기록해놓은 대목 가운데 한 독일인 기자가 미 공군 여단장 프레드릭 앤더슨과 했던 인터뷰 중 질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기자는 독일 도시 폭격에 대한 대화를 나눈 후, 앤더슨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 공격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 상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83)라고. 물론 이들은 폭격 전에 면밀하게 상상해보긴 했을 것이다. 불에 잘 타는 목재가 많이 있는 구시가지에 집중적으로 폭격할 때 만들어지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가져오는 굴뚝효과에 대해서 말이다. 이 거대한 불기둥은 도시 주변의 신선한 공기를 계속 화재 지점으로 끌어와 부채질할 것이라는 점을 치밀하게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기자가 정말로 물었던 것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타게 될 도시에 있던 수많은 죄인들이 폭격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았냐는 질문이었다.


 

다시 정리하면, 전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들여다보아야 하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공중전과 공습은 산업화된 문명을 굴러가게 하는 바퀴의 한쪽 축이었다. 자본의 논리는 전쟁의 국면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무화시키는 절대 교리인 셈이다. 그럼에도 폭격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 이점이 알렉산더 클루게의 194548일 할버슈타트 공습이 내게 준 강력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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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07 17: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 반갑네요
읽으려고 쌓아놓고 있거든요
다른 일정에 밀려서 조금 늦춰지긴 했는데 조만간 읽으려구요

노아시대 불의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날까지는 이런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아는데...;;;
그 전의 전쟁과 고통은 인간들로부터 비롯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 2022-08-07 20:34   좋아요 1 | URL
불의 심판 모티브를 따오긴 했는데 제가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군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워낙 다르게 느껴지긴해요.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신의 설계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