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과 타자에 대한 철학자의 탁월한 시선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어떻게 살 것인가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상운 옮김 [arte] (2025)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통독하면서 우선 떠오른 감상은 ‘탁월하다’는 표현입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은 많이 없지만, 저자가 철학자인지라 ‘한가함’과 ‘지루함’이라는 개념부터 정리하고 논의를 시작합니다. 사람이 토끼 사냥을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그에게 고되고 때로는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사냥 활동에 나가는 대신 잡은 토끼를 던져줄 때, 그 사람이 행복할까라고 묻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어요. 저자는 그 이유가, 인간은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진단합니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라고 말이죠.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에게 열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몰입의 대상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지복에 이르는 열쇠 한 가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줄곧 저자의 글에 ‘탁월하다’를 연발하는 이유는, ‘한가함’과 ‘지루함’이라는 키워드로 인류 문명의 핵심을, 그리고 우리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저에게도 이해가 가도록 쉽게 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글쓰기를 하는 저자를 ‘또 다른 수준(another level)'의 저자라고 분류합니다. 철학 전공자가 보시기에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적어도 저에게는 이 책과의 만남이 여러 모로 놀라움을 줍니다.
어떤 면에선 재독 철학자 한병철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일본의 한병철이라고 평가한다면, 좀 더 친근하게 여기실 수 있으실지. 다만 한병철의 문장은 좀 더 압축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문장 자체가 고이치로의 문장보다는 좀 더 밀도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철학 비전공자에겐 고이치로의 문장이 좀 더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 그리고 문화를 진단하고 요약하면서 독자가 잘 이해하도록 글쓰기를 하는 저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철학 비전공 독자로서는 우리 현대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써주는 저자의 등장이 반가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탁월하다’는 생각을 줄곧 하게 됩니다. 이 책으로 저자의 글에 입문했는데, 곧바로 팬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만큼 현재 제 수준에서 저자의 사유와 글쓰기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책의 6장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인간학」 때문입니다. 이 장의 부제는 ‘도마뱀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인데요, 도대체 한가함과 지루함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도마뱀이 갑자기 뭔 소리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 장(chapter)의 시작은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햇볕을 쬐고 있는 도마뱀은 햇볕과 바위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라고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 한 생물학자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 6장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움벨트(umwelt, 둘레세계, 주변세계)이라는 개념인데요,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건 19-20세기에 걸쳐 살았던 에스토니아 출신의 동물행동학자 야콥 폰 윅스퀼입니다. 그는 1934년에 출간한 책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이 ‘둘레세계’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이 개념은 생물이 저마다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한 세계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각 생물체의 감각을 통해 인지된(혹은 구성된)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플라톤 철학과 연결 짓자면, 각 존재마다 감각기관을 통해 구성된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를 말하죠. 모든 ‘감각적인 생물’의 주체성에 주목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와 같은 사람에게서 말이죠.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려 합니다. 어쨌든 이 모든 생물체의 ‘주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의 문을 연 칸트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윅스퀼은 ‘칸트주의 생물(생태)학자’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올해부터 진행하는 과학책 읽기 모임의 두 번째 선정도서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의 6장에 주목하면, 이 장이 바로 윅스퀼이 제시한 ‘둘레세계’의 개념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처음에 햇볕을 쬐는 도마뱀에서 진드기로 갔다가 결국에는 인간에 이르고 있는데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둘레세계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335)라고 비판했다고 고이치로는 말해줍니다. 하이데거는 당대의 생물학자 윅스퀼을 비판했다고 소개하는 거죠. 그 이유는 ‘동물은 그 자체로서의 사물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336). 하지만 고이치로는 오히려 하이데거의 논리를 비판합니다. 하이데거가 ‘동물은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고이치로의 말대로라면 대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부분에서만큼은 다소 무리수를 둔 것 같거든요. 하이데거는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신념을 갖고, 이에 합치되는 주장을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어쩌면 동물과 인간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의 관점을 지녔던 것이 아닐까요? 데카르트는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고 신체만 있는 기계라고 보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는 인간을 ‘영혼이 있는 기계’로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특별하다.’는 관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는 저도 시간이 필요할 듯하므로, 이장의 결론으로 곧장 나아가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이죠. 각 존재의 둘레세계는 생물마다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감각기관의 차이가 종마다 크게 다르니까요. 각 종이 인지한 세계의 모습은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차이를 저자 고이치로는 인지된 둘레세계를 넘어 이동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생물은 이 둘레세계 사이를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동물 보다는) “인간이 다른 동무에 비해 매우 높은 둘레세계 이동능력을 가지고 있다”(352)는 의미로 풀어 설명합니다. 이를 제가 이해한 바로 풀어 설명해보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상상력이 뛰어나다’라는 것입니다. 고이치로는 이 능력을 가리켜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inter-umwelt mobility)라고 좀 더 폼나게 정의합니다. 제게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인간이 보다 뛰어난 ‘역지사지’의 능력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자, 이제 고이치로가 인간의 ‘한가함과 지루함’을 다룬 책에서 둘레세계(움벨트)를 이야기한 이유에 한 발 더 나아간 듯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저자는, 인간은 뛰어난 상상력과 공감력을 통해, 다른 둘레세계로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에 ‘지루해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저자의 표현을 가져와 정리해볼까요. “인간은 둘레세계를 상당한 자유도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해 하는 것이다.”(355)라고요. 지루해하지 않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지루해하는 이유를 윅스퀼이 제시한 개념을 기반으로 설명해내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에 동물의 감각에 주목한 후대의 과학 연구자들은 보다 많은 동물이 인간에 상응하는 ‘둘레 세계 간 이동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몇몇 동물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루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어미 앞에서 대나무를 입에 물고 앞구르기를 하는 팬더 ‘푸바오’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단지 생존을 위해, 본능에만 따른 행동은 아닐 것 같은데요.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합니다. 이 점은 물론 더 많은 연구와 확인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저자는 6장을 마무리하면서 이 책의 제목인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떡밥을 던집니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었으니 마지막 장 까지 힘을 내서 읽어줄 것을 기대하겠죠.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눈앞인데, 정녕 책을 덮을 것이냐?’고 독자를 유혹하는 듯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탁월한 책을 읽어보시길.
개인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인간의 뛰어난 공감력/상상력으로 둘레세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도 긍정과 부정의 영향이 따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저자는 여기에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윤리학’의 작동 원리는 ‘판단하기 전에 여러 조건을 검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입장에서 행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죠. 달리 말하면, 다른 둘레세계를 검토하고 다가가려는 태도/마음가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윤리학’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 고쿠분 고이치로의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 입문하자마자, 바로 저자의 팬이 되어버린 ‘철알못’ 독자의 감상이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행복의 비결이 뭔지 알고 싶은 독자라면 한 가지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아보시라는 겁니다. ‘강남 아파트 입성’을 이야기하는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어 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을 발견하는 데 더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 참으로 탁월하군요!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참고로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움벨트'개념이 소개되는 다른 책을 추가해봅니다.
- 에드 용 <이토록 굉장한 세계>
-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