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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평점 :

동일한 실재는 없다 -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원제: The Rigor of Angels)
윌리엄 에긴턴 지음 | 김한영 옮김 [까치] (2025)
종종 한 권의 책을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천사들의 엄격함》을 읽고 나서 입가에 맴도는 단어는 백일몽이라는 단어다.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세 사람-칸트,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을 중심으로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서였다. 저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세 사람을 어떻게 주목하고 연결짓게 되었을까 놀랍다. 이 책에는 근대 철학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문학가이면서 실재와 영원성에 대해서도 깊이 사색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리고 양자 역학의 토대를 세우는데 기여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이 세 사람이 이 책에 모여 연결될 수 있었던 단초는 철학자 칸트가 제공했다. 칸트의 사상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창구이자 세계로 통하는 채널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제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감각이다.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 소환한 사상가 세 사람은 바로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실재’란, 존재에 의해 감각되어 재구성된 이미지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실재란, 측정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고, 칸트 역시 바라보는 존재(주체)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이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언급에서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저자가 보르헤스나 하이젠베르크가 모두 칸트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주목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생생한 인물의 모습으로 되살려 놓은 부분이다. 실재의 모습을 파악하는 문제에 있어 현대 물리학의 역사 일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본 느낌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은 상식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이, ‘실재하는’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 결국 이 문제는 존재와 우주의 근거를 설명하는 본질과 이어져 있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질문이 단순히 철학과 문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문제를 관통하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을 마련해주었다. 그렇다면 칸트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 인간이 파악한 ‘실재’란 같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동시대인에게도 이 ‘실재’란 같을 수 없지 않겠는가. 나아가 각 존재에 의해 구성된 실재는 각 주체가 세계로부터 추출한 극히 작은 이미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파악된 실재’는 결코 실재와 동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대한 에피소드는, 주체에 의해 파악된 실재의 이미지가 실제의 ‘실재’와 동일한 경우 그 주체는 자유를 잃고 그 ‘실재’에 구속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이 놀라운 능력과 반대로,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여 의미를 추출하는 일은 잘하지 못했다. 결국 ‘완벽한 기억’ 혹은 ‘완벽한 재현’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는 내부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조화하는 기능이 필요할 듯하다. 결국 주체가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로부터 흡수한 정보를 통합하고 의미를 추출하는 추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양자 역학의 토대를 놓은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행렬 역학’으로 양자 역학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화의 방법’이었다. 그는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지식이나 현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영역이 하이젠베르크가 생각했던 ‘중간 지대’에 가까운 것 같다. 하이젠베르크는 핵이나 전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와 다르고 때론 논쟁도 벌였던 닐스 보어, 이보다 더 큰 견해차를 지니고 대립했던 아인슈타인과도 ‘중간 지대’를 유지한 점에 주목해 본다. 이‘지대’는 그와 이 영역 내에서 공존했던 이들에게 서로의 논리를 다듬고 재점검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중간 지대’는 견해차에 따른 상대방을 배제하기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지대’는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에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가가 언급한‘실재’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주체가 파악하는‘실재’는 각 주체만큼이나 다양한‘실재’가 존재한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중간 지대’는 단지 학문적이고 심도 있는 대화를 위해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혹은 의식 있는 주체에게 필수적인 요건 혹은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계’가 경직되고 메말라가는 지금, 기후 정의와 같이 시급한 인류 공동의 문제를 직시하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전후 하이젠베르크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동료 과학자이면서 나치에 의해 부모님 모두 희생당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구드스미스와 하이젠베르크의 인연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다. 구드스미스가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거둔 것은, 어쩌면 저자가 말한대로 자신을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구드스미스 자신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스스로에게 관대해진 것은 아닐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타자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이 세상의 ‘실재’는 객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에게는 그만의 ‘실재’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부분은 나의 생각이지만, 타자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실재’의 개념을 마찬가지로 적용하면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세 사상가의 실재에 대한 주장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칸트의 사상이 보르헤스와 하이젠베르크에 영향을 주었고, 실재를 파악할 때 실재의 본질이 이를 바라보는 이, 곧 주체에 달려 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 각자는 세계라는 이미지가 통과하는 다른 렌즈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책은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현대 물리학사의 한 단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보른을 포함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집단과 슈뢰딩거 아인슈타인의 논쟁은 일단 현대 물리학계의 실험을 통해 하이젠베르크가 제안한 해석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은‘자유의지’라는, 사상사의 오랜 주제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생각해볼만 하다. 무엇보다 서로 무관해 보이기까지 한 세 명의 지식인들을 ‘실재’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저자의 통찰과 안목을 경험할 수 있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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