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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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존재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글쓰기

- 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까치] (2025)

 




나는 머나먼 것들을 끊임없이 동경하고 갈망하는 사람이다. 나는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야만인의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좋아한다.

- 허먼 멜빌, 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42p

 


19세기 중반에 출판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은 인류의 대항해시대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서 출현했다. 이 이야기는 경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바다 위를 떠다니며 뭍(육지)의 세계를 지탱할 자원을 캐내던 사람들의 서사로 볼 수도 있다. 특히 포경선은 세계의 여러 곳에서 몰려든 다양한 젊은이들이 부대끼는 고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위에 인용한 문구는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는 고래잡이 항해를 받아들이는 이유를 독백처럼 말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이 나에게 인상 깊게 남는 이유 하나는 작가가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대해 잠시나마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만으로 판단할 때, ‘문명에 속해 있는 이슈메일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해안을 야만인의 그것으로 상정하는, 백인의 시선도 살짝 엿보인다.


 

내가 이 대목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즈텍 연구의 권위 있는 역사학자 캐럴라인 도즈 페넉의 책 야만의 해변에서을 만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노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아프리카 원주민’, ‘검은 피부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접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캐럴라인은 관심의 대상을 조금 달리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에 주목한다. 캐럴라인의 책을 만나기 전까진 그토록 많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도 자신이 조상들과 더불어 살아왔던 터전으로부터 단절을 강요당하고, 구세계인(유럽인)들에 의해 납치·감금·폭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의 시선이 백인 중심의 상투적 시선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책이기도 하다.


 

따져보자. 한 인간 존재가 다른 인간에 의해 의지와 자유를 빼앗기고,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일을 우리는 과연 상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역사학자인 캐럴라인은 마치 내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오래된 1차 사료들(이를테면 노예 거래 관련 서류, 법원에서의 소송 기록, 영수증과 같은 자료들)을 찾아 헤맸을 것이었다. 역사학자로서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당연한 듯 여겨지는 역사 서술의 관점은, ‘문명 vs. 야만의 이분법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받아들여지는 것은, ‘문명에 속하고 있다는 전제다. 이러한 시각이 자연스럽게 정해지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인디저너스(Indigenous, 토착민)이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이 우리에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유럽인들의 목소리에 덮이고, 인디저너스의 존재 증거는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에 의해 가려져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디저너스들은 삶의 터전으로부터 단절되어 강제 이주당한 상황뿐만 아니라 감금·폭행의 일상적인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당시 유럽인들에 의해 대상화된 인디저너스들은 일개 사물로서 취급당했다. “(인디저너스들은) 유럽인들의 사상과 열망이 깃든 일종의 암호가 되어 갔다.”(32)는 표현이 처음부터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저자의 서술방식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특징은, 인디저너스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부단히 상상했다는 점이다. 역사가 엄밀한 사실에 기반 한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캐럴라인의 서술방식은 좀 독특하다. 서술자 자신이 인디저너스의 입장이 되어보길 주저하지 않는 듯 보이는 까닭이다. 어쩌면 학계에서 동료 학자들의 비판을 상당히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을 더욱더 열심히 찾아내야 한다”(84)며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고 있지만, ‘문명야만의 시선에 주목할 때 흔히 떠오르는 텍스트는 몽테뉴의 에세. 몽테뉴는 자신의 식인종에 관해서라는 글 중에서, 브라질의 한 마을에서 유럽에 온 3명의 투피남바인과 대화했던 장면을 집어 넣었다. 그러면서 우리(유럽인들)’가 그들보다 더 야만적이라고 한 바 있다. 훗날 에세를 탐독했던 허먼 멜빌의 야만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작품 속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를 테면, “만취한 기독교인보다는 정신이 맑은 식인종과 자는 게 나을지도 몰라.”(모비 딕,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2, 64p)라며 야만인에 대한 편견에 저항하고, ‘문명 세계의 한 단면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가 버젓이 존재하던 고려할 때, 몽테뉴나 멜빌 모두 캐럴라인의 지적대로, “야만과 문명이 상대적이라는 점을 인식”(302)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디저너스의 역사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줄곧 애도의 성격을 띠는 듯하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유럽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또 그만큼 많은 수가 여정 중에 바다에 버려지기도 했다. 유럽 땅에 도착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노예 제도 시스템과 평범한많은 유럽인들에 의해 소유되고 매매되었으며, 때론 낙인이 찍히고 폭행을 당했다. 인간성이 박탈된 역사였다. 따라서 저자의 연구와 저술 작업은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사라져간 인디저너스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독이는 의식(ritual)으로도 보였다. 그들은 대다수가 애도 받지도 못했던 이들이다. 역사학자 캐럴라인의 역사 서술이 내게는 잃어버린 존재들의 간극을 상상하고 이를 인간의 일로 채우는 작업처럼 보인다. 한 가지 생각을 덧붙이자면,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인디저너스의 시선에서 야만의 해변이란 어쩌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자유와 신체를 구속하고 억압하던 구세계 문명의 해안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경계의 어느 쪽에 발을 딛고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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