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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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황금기는 씨 뿌리는 마음들에 달려 있다


-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2024)


 




미국의 황금기가 지금 시작됩니다.’(The Golden Age of America Begins Right Now)

 

이 문구는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공식 슬로건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이하 극단적 소수)를 출간할 당시(2023)만 해도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훨씬 낮아 보였을 것이다. ‘트럼프가 백악관을 떠나 민주주의가 다시 균형을 회복했다고 믿고 싶다던 저자의 바람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는 복귀에 성공했고 이제 막 100일이 지났다. 한 사회가 중요한 교훈을 배우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저자가 슬며시 내비치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극단적 소수에서 저자는 헝가리 독재자 빅토르 오르반에 대해 들려준다. 오르반은 성숙한 헝가리의 민주주의를 거의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완전히 허물어뜨린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그라면 트럼프 행정부의 귀환과 대한민국의 계엄 사태를 보고 정치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90), 우리의 상상력 부족(?)을 조롱했을 법하다. 이 책은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가 어떻게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탁월하게 분석한다. 한편 현대인이 살아가는 지배적인 환경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일러주고,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균형 있게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독자가 이 책을 펼쳐볼 이유는 바로 여기, 트럼프 행정부의 귀환과 대한민국의 계엄 사태가 교차하는 지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퇴행의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한 국가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는 무턱대고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아니다. 그럼 정말 위험한 존재는 누구인가?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주류 정치인들 중에서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에 충실해 보이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권력을 지닌 소수이지만, 기득권에 대한 집요함을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권력에 대한 의지는 정치인이라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소수만의 이익을 위해 기존 제도를 교묘히 비틀어 합법적으로 보이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공공의 이익에 반하고, 심지어 개인의 자유마저 심각하게 침해하거나 훼손할 여지가 있다. 이런 이유로 표면적으로 충직한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데 결정적으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존재들이다.


 

기득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이로 인한 위기감은, 권력을 지닌 소수가 공권력을 동원하고 때로는 폭력에 호소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한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극단주의자들(이를 테면 극우 단체)에게도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정치적 패배나 기득권 상실의 두려움은 이들의 행보에 보다 근원적인 동인으로 작동한다.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반하는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을 동원하고, 사법 기관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집단을 두둔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대한민국만의 유별난 사례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몇 달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상황만 보아도, ‘완전무결해 보이는헌법에 본질적인 맹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여러 민주적 제도들은 양날의 검과 같다. 동일한 헌법 조항도 당파적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사용될 때,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집단을 무너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위해 왜곡된 법률 해석을 필요로 했던 인디라 간디의 권력 남용과 정치적 몰락은 우리에게 기시감이 들게 하는 사례다. 권력을 쥔 이들이라면 어떤 제도를 시행할 때마다 손에 든 검처럼 신중을 기해야할 일이다.


 

민주주의 제도는 가능한 한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한다.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태도다. 하지만 인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해 소수의 의견도 소중하다는 것을 어렵게 배웠다. 다수라고 항상 합리적이거나 옳은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보존하려는 장치가 도리어 다수에게 족쇄를 채우는 경우다. 미국 내 인종 차별적인 투표법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투표권법이 대법원 5명에 의해 폐지되어 버린 사례를 떠올려 본다. 이는 권력을 지닌 소수가 민주주의의 정체, 혹은 퇴행을 불러온 사태다. 적은 표를 얻고도 승리하는 선거를 가능하게 하여 트럼프 2기의 출범을 견인한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어떤가. 미국 민주주의에서 다수에게 재갈을 물리고 민주주의의 구현을 가로막는 소수 권력의 문제도 있다. 헌법 수정을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게 만든 미국 상원 제도가 그렇다. 간접 선거 방식인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 선거인 보통 선거 방식으로 전환하려는 사회의 운동과 입법 과정이 상원에서 거듭 무산된 상황은 미국이 마주한 고질적 문제로 그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기로에 서있는 미국 민주주의의 현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다.


 

극단적 소수에서 저자들은 권력을 차지한 소수가 공동체 다수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 국가가 어떤 부작용을 겪을 수 있을지 보여준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다시금 배우는 중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그 자체의 취약성과 제도의 불완전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일은 매주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재검토하고 새로 구축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제도의 잠재된 한계를 깨닫는 일에서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과 인내심이 절실하다. 주류 정치인 중에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을 가려내는 일도 필요하다. 이 책을 읽고 사회의 제도들을 직접 운용하는 각 분야의 대표들의 자질을 검증하고 이를 요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우리는 미래의 대표들에게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가짐이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아끼고 살피는 마음이 없는 이들이 어떻게 다수를 대표할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는 정치인들의 손에 든 민주적 제도라는 검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도 지켜봐야 한다. 침묵하지 않고 말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움직이기 위해 우리의 몸을 가볍게하면 더 좋겠다. 응원봉을 들고 시위 현장을 찾은 수많은 대한민국 시민들처럼 말이다. 노르웨이 인들이 오랜 시간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축해온 사례는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일은 이러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 아닐까. 물을 주어 보살피고 어떤 열매와 만나게 될지 상상해보는 일과 함께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의 독자부터 발걸음 가볍게 씨 뿌리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책속으로]

[1] "오늘날 미국 사회가 직면한 급박한 위협은 소수의 지배다."(21) - P21

[2] "민주주의는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다."(29)

"패배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평화적으로 넘겨주는 규범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근간이다."(29)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36) - P36

[3] "정치인들이 패배를 지지 기반에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느낄 때, 그들은 권력 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39) - P39

[4]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76)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76) - P76

[5] "시민들이 헌법적 강경 태도를 보고 이를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77)

"21세기의 독재 정권 대부분이 헌법적 강경 태도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89) - P89

[6] "독재 세력은 주류 정치인들이 그들을 묵인하고 보호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182) - P182

[7]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와 관계를 끊는 것은 민주주의 행동의 세 번째 원칙이다."(183) - P183

[8] "선출된 정부가 일시적으로 차지한 다수 지위를 활용해서 야당을 무력화하고, 혹은 게임의 법칙을 바꿔서 경쟁을 가로막음으로써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206) - P206

[9] "반민주적인 정당은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를 이용해서 독재를 인정하고 ‘강화’하기까지 한다. (...) 반다수결적인 제도는 소수 정당을 경쟁 압박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전제적인 극단주의를 강화한다."(276) - P276

[10] "미국은 2023년 이전에 전직 대통령을 기소한 적이 없었지만, 일본과 한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등 많은 기존 민주주의 국가들은 그렇게 했고, 그럼에도 그들의 정치 시스템은 후퇴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중범죄를 저지를 때, 민주주의는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331) - P331

[11] "투표를 더 쉽게 만들고, 게리맨더링을 없애고,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하고, 상원 필리버스터를 없애고, 상원을 보다 비례적으로 만들고,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좀 더 쉽게 만드는 개혁.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미국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따라잡게 될 것이다."(341, 저자들이 주문하는 미국의 개혁안 요약) - P341

[12] "더 중요한 것은 헌법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가 거대한 국가적 정치 토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다."(342)

"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논의와 아이디어는 결코 공허한 노력이 아니다."(344) - P344

[13] "사회 운동은 개혁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양산하고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인의 선거적 계산을 바꾼다. (...) 대규모 사회 운동이 정치적 셈법을 바꿔놓으면서 그들은 포괄적인 개혁을 받아들였다."(353) - P353

[14] "오늘날 미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개혁 의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혁 ‘운동’일 것이다. 이를 통해 각계각층의 시민을 국가 차원의 지속적인 사회 운동으로 집결시킴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하고 공적 논의의 틀을 바꿔나가야 한다."(358) - P358

[15] "미국의 민주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리 민주적이지 못했던 과거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365) - P365

[16] "민주주의 수호는 이타적인 영웅의 과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위해 일어선다는 뜻이다."(369)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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