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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와 맥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케이크와 맥주》
: Cakes and Ale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지음 | 황소연 옮김 | [민음사]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가 말하는 위선과 진실한 삶’
《케이크와 맥주》는 서머싯 몸의 대표작 《인간의 굴레》와 짝을 이루는 ‘인간 탐구’ 시리즈로 보면 되겠다. 물론 모든 소설은 작가가 탐구한 인간의 삶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각자가 다른 색으로 보여줄 뿐이다. 결국 모든 작가의 작업은 ‘인간’이라는 주제로 수렴한다. 서머싯 몸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진실과 부조리함, 자유와 예속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토대를 이루는 기본 전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이렇게 시작하고 보니 다소 맥 빠지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내가 서머싯 몸의 글을 학창시절에 읽었다면 당시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케이크와 맥주》를 읽다보면, 작가의 생각이 슬며시 드러나는 부분마다 꽤나 공감을 하게 되었다. 삶에 대한 이런 통찰을 얻으려면 적어도 작가가 40-50대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작가 연보를 살펴보았다. 1874년에 출생한 서머싯 몸은 외교관 역할을 겸하며 첩보활동을 하던 시기인 1915년(41세)에 《인간의 굴레》를 출판했다. 첩보 활동으로 건강을 해치고 활동을 접은 직후인 1919년(45세)에 화가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삼은 《달과 6펜스》를 펴냈다. 오늘 다루게 될 《케이크와 맥주》는 보다 원숙기에 접어든 1930년(56세)에 출판했다. 아마도 40-50대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삶의 고민들이 작가가 소설에서 그려내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달과 6펜스》에서는 고갱이라는 화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고, 작품 전반에서 진지함으로 일관하는 듯했다. 반면 《케이크와 맥주》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날카롭고 풍자적인 시선과 위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도 작가가 긴장 속에서 치열하게 인간을 탐구하던 40대(그리고 첩보활동을 병행하던 시기)보다는 여유로움을 찾은 50대의 모습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학창 시절에 읽은 《인간의 굴레》는 사실상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그저 유명하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서머싯 몸의 소설에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했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는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작품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하나는 작가 혹은 예술가의 성공과 위선, 자유 및 예속과 관련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진실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전자에 대해 언급해본다. 작가가 태어난 영국은 오랜 세월동안 귀족이 세상을 지배했고,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진 세계였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노동자 출신의 자녀들은 세상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장애가 많았다. 세상은 이미 기득권인 귀족 중심으로 규칙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출신의 작가가 더 올라가도록 도와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는 이들이 ‘감히’ 세상의 중심에서 활약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의 화자 어셴든은 성직자 가문의 ‘도련님’이다. 부모가 전하는 교양과 관점에 영향을 받은 어린 화자는 노동자 출신 가정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한다. 하지만 남들이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싫어하고, 우연한 기회에 노동자 출신의 작가(에드워드 드리필드)와 부인(로지)을 만나 격의 없는 교제를 하게 되면서 또 다른, 말하자면 관습에서 보다 자유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 소설은 오랫동안 계급의식이 지배하던 영국에서 지식인으로 성공과 출세를 거머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세히 보여준다. 문단 내에서 작가와 비평가와의 유착 관계, 기득권 계층 내의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지는 스타 작가의 허상을 드러낸다. 서민 출신의 작가 드리필드는 사회의 도덕을 조롱하듯 규범을 벗어난 일탈행동을 보인다. 아울러 노년에 그의 성공과정을 통해 계급사회의 두터운 규범과 체면으로 위선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군상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풍자 정신과 위트가 드러나는 순간은 이렇다.
“예로부터 노인들은 그들의 젊은이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세뇌했고, 젊은이들은 그것이 허튼소리임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늙은이가 되어 그 기만적 행태에 편승해 이익을 봐 왔다. 또한 정치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치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 별다른 지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결과만 봐도 파단이 가능하다.)” (143)
책을 다 읽고 남는 인상은 다소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이랄까. 특히 작가가 표현하는 사랑관에 주목하게 된다. 누구나 살면서 현재 사랑하는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계급이 인간 공동체에 등장하면서부터 따라온 체면과 위선이 강요하는 일종의 불문율일 테다. 작가 드리필드와 결혼한 로지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선택하는 모든 행동은 체면치레에 급급한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부도덕한 여성이었다. 사회가 강요하는 위선적인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고민하지 않고 현재의 감정에만 진실하고자 했다. 결국 로지는 자신의 삶에 진지했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은 여성이었다. 물론 그녀는 개의치 않았지만 도덕적인 이유로 그녀를 비난한 모든 이들은 결국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훗날 사람들이 세상의 규범을 벗어난 로지를 비난할 때, 로지와 좋은 추억을 간직했던 어센든은 그녀를 옹호하며,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그녀는 아주 단순한 여자였어요. 건강하고 천진한 본능을 가진 여자 말입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걸 좋아했죠. 사랑을 사랑했어요. (...) 그럼 그냥 사랑의 행위라고 해 두죠. 천성이 정이 많은 여자였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두 번 생각하는 법이 없었죠. 그건 악덕도 아니고 음탕한 것도 아닙니다. 천성일 뿐이죠. 태양이 햇빛을 발산하고 꽃들이 향기를 내뿜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어 준 거예요. 그녀 자신에게 기쁜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됨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진실하고 예의바르고 순박한 여자였어요.” (274-275)
아마도 50대 후반에 이른 서머싯 몸이 생각하던 ‘사랑의 원형’을 어센든의 말 속에 이렇게 담아두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면에서 로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학창시절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주제다. 로지를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비난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 사랑의 모습을 조금은 다르게 고민해보게 된다. 인생에서 단 한 명의 파트너와만 사랑해야한다고 요구하는 자는 누구인가. 인류 역사에서 계급이란 것이 생겨나기 전 인류의 초기 공동체를 떠올려본다. 이런 집단에서 이루어졌던 ‘사랑’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상대에게 끌리는 감정이 들면 다가가 서로를 탐색하다가 자연스럽게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덧씌운 문명의 관습과 규범을 벗어나 서로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을 추구한 작가가 또 한 명의 영국 작가 D. L. 로렌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크와 맥주》의 로지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낸 유일한 자유인이었다.
로렌스를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할만한 대상은 영국 사회가 고질적으로 지녔던 계급성이다. 로렌스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집 《귀향》에 실린 글에서도 이 문제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의 글에는 작가로 상승하고 싶은 욕구가 넘쳐나면서도 동시에 광부의 아들, 곧 노동자 가정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터운 장막과도 같은 계급 구조를 극복할 수 없었던 좌절감이 깊게 배어있다. 능력을 갖추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영국 사회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판에 참여하기에 적절하다고 인정한 이들만이 게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사회였다. 그들은 언제나 이 게임이 ‘공정하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작가 서머싯 몸은 이 지점에 주목하여 노동자 출신의 작가가 성공하는 이야기를 한 줄기로 끌고 가며 세상을 풍자했다. 내가 서머싯 몸에게 좋은 점수를 주는 부분이 있다면 이런 지점을 놓치지 않는 그의 작가 정신이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공에는 어느 정도의 운과 그만한 대가(노력과 희생)가 으레 요구된다. 물론 ‘성공’의 정도와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여기까지는 많은 이들이 수긍할 것이다. 소설 속의 노 작가 드리필드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그저 애쓰면서 남들보다 오래 살기만 하면 되는 거야”(147)라면서 겸손한 듯 다소 냉소적으로 표현하지만, 그 역시 귀족 계층 후원자의 집중적인 ‘관리’를 받아 비로소 문단 시스템에 안착했다. 문명을 갖춘 어느 인간 사회든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머싯 몸 역시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사람을 탐구하면서 이렇게 부조리한 세계의 이면을 이야기로 솜씨 좋게 드러냈다. 서머싯 몸은 드리필드의 평전을 쓰고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하는 로이 앨로이처럼 성공에 목마른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위선적인 삶을 보여준 반면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가치 역시 인정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어셴든의 입을 통해 “작가의 삶이란 가시밭길이다”(294)라고 언급하면서도 “작가는 유일한 자유인이다”(295)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50대 후반에 이른 서머싯 몸이 작가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하나의 위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내게 묻는다. 당신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소설의 제목 중에서 ‘케이크’는 귀족 계급이 사교 모임에서 차를 곁들이며 먹는 음식 혹은 값비싼 향신료가 들어간 기름진 저녁 식사 후 먹는 후식으로 여겨진다. 귀족들의 삶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계급성을 대표하는 음식인 셈이다. 반면 맥주(원문에서는 에일 Ale)는 계급성을 벗은 음료로서, 서민들의 삶과 함께 했던 음료였다. 노년의 드리필드가 술집에 들러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며 한 잔씩 마셨던 음료였으니까. 몸의 대표작 《달과 6펜스》가 정신과 물질적 세계, 혹은 자유와 예속의 세계와 같이 대조되는 세계의 삶을 보여주듯, ‘케이크와 맥주’ 역시 위선과 진실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일 케이크를 먹기 위해 오늘 체면치례 없이 진실한 사람들과의 맥주 한잔을 마다할 것인가. 아니면 내일에 대한 불안과 고민 없이 오늘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는가. 내게는 이런 문제로도 다가왔다. 계급사회 이전의 인간 공동체에서 과연 ‘내일’이란 개념은 존재했었을까. ‘내일’을 대비하고자 염려하느라 오늘을 놓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일’이란 문명의 필요로 만들어진 정교한 발명품이거나 문명이 만들어낸 고질병은 아닐까.
[1] "위선만큼 성취하기 어렵고 진이 빠지는 악덕도 없다. 위선은 한시도 늦추지 않는 경계심과 영혼을 초월하는 극기가 필요하다." (27)
[2] "돌이켜 보면 당시 사람들은 가식이 가득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이들은 체면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100)
[3] "평균 나이를 넘긴 노작가가 노년에 보편적으로 칭송받는 진짜 이유는 지식인들이 서른 살이 넘으면 글을 전혀 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 읽은 책들은 화려한 빛을 발하게 마련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가치는 해마다 높아진다." (144)
[4]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면 안 돼?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지.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뭐가 그리 심각해? 할 수 있을 때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 (224)
[5] "진지한 감정이란 본디 부조리를 내포하는 게 분명하다. (...) 다만 영원불멸한 지성이 보기에는 하찮은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처지에 온갖 고통에 시달리며 아등바등하는 인간이 그저 농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276)
[6] "청혼하는 남자가 없어서는 아니고 지금 이대로 행복하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늙은이하고 결혼하기는 싫고, 이 나이에 젊은 남자랑 결혼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니까. 한세상 신나게 살았으니 여기서 그만 마무리해도 괜찮아." (295) - 노년의 로지가 재회한 어셴든에게 한 말
[7]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296) "그이는 언제나 완벽한 신사였거든."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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