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 흔히 곁들여지는 그림들은 두고두고 신화의 이미지로 뇌리에 남는다. 어느 날 새하얀 대리석의 彫像들을 대하며 문득 그리스 로마 신화의 페르세우스를 떠올리듯이. 그런데 셰익스피어, 하면 그림보다는 영화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올리비아 핫세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이년 전쯤 더스틴 호프만이 샤일록으로 나왔던 <베니스의 상인> 등이 그렇다. 셰익스피어와 그림을 그리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이 대가의 작품들과 그림의 조합은 읽기 전 흥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셰익스피어를 그림으로 읽다!
우선, 이토록 많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그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많은 그림들을 찾아내고, 각각의 그림에 간단하나마 그림 사조별 특징까지 짚어가며 설명해주려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림 중에는 연극무대의 배경그림이나 배우를 그린 그림들도 상당수 있어, 원작이 희곡이라는 실감을 새삼 했다.
작품마다 일일이 원전을 찾아내 표기해 준 것도 좋았다. 거의 모든 작품에 원전이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과연 셰익스피어는 설정이나 줄거리보다 대사 하나하나가 압권이라는 느낌도 더 강해졌다.
이 책의 특장점 중 하나는 본문의 바깥 부분에 배치한 '감상 포인트'이다. 작품마다 적어 놓은 '감상 포인트'에서는 다른 데서 쉽게 접하지 못할 내용도 꽤 많이 알려주고 있다. 죽음까지 불사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뜨거운 사랑이 단 7일간이었다는 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다. 또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변성기 이전의 소년들이 여장을 하고 여자 역을 했다는 것도 어렴풋이 다시 떠올랐으며, 셰익스피어가 그런 연극사적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여주인공들이 남장을 하는 테크닉을 취했다는 대목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감상 포인트였다.
무척 잘 만들어진 책.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그림으로 읽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원래 플롯 자체가 복잡하고 이중, 삼중으로 겹쳐져 있기 십상인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줄거리만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작품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워 보였다. 4대 비극이나 유명한 희극들을 제외하고 <헨리 4세> <리처드 3세> 등은 내용 숙지가 쉽지 않아 그림을 감상할 충분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림 위주로 감상하자니, 알맹이가 빠진 듯해 뭔가 아쉽고!
결국 이 책을 잘 보려면 여기에 소개된 수많은 작품을 미리 좀 읽은 상태에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넘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체를 소설 읽듯이 읽어내려가기보다는 띄엄 띄엄 오래 곁에 두고 읽는 것이 좋겠다 싶다. 볼 때는 책에 소개된 줄거리를 다시 훑은 다음, 그림과 그림 설명, 감상 포인트를 꼼꼼히 짚어가며 읽고, 별도로 소개된 명대사들은 원문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소리내어 읽기 정도는 한번씩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말하자면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사전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찾아보고 싶을 때마다. 아쉬운 점 하나. 그림이 좀더 크고 선명했더라면 더 좋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