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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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짧지 않은 날을 살아오며(이 말은 자못 서글픈 어조이다) 온갖 것들과 어울리고 함께 뒹굴고 속에 품게 되었으나 나름대로 굽이굽이 많은 이야기가 깃든 모진 세월의 와중에도 결국 친해지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걷기일 것이다. 나는 걸을 여유가 없이 살아왔다.  걷기에 여유가 무슨 필요 있나, 돈 드는 일도 아닌데,라고 흉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여유가 없었다. 걸을 여유. 누가 나더러 걷자고 하면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래 왔다. 걷자고 들면, 마음이 바쁘고, 몸이 초조하고, 숨이 가빠지기부터 시작하니 여유 없는 인생에 걷기는 힘든 결정일 수, 있다. 

얼마 전 불쑥 찾아온 친구가 8시에 집을 나서 걷다가 바로 강화도까지 냅다 걸었다고 이야기할 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너, 미쳤구나." 친구는 발톱이 빠졌지만 좋았다며 웃었다. 하필, 그짓을 해야 했던 이유가 뭐냐니까. 그저 털어내고 품고 그러기 위해서였단다. 친구는 내처 산티아고를 꿈꾸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잠깐 산티아고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한다 하는 여행가들이 다 걸어보고 왔다는 곳. 내겐, 아무래도 무리다. 

하지만 슬며시,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움텄다. 사십몇 해를 도통 걸어본 적 없는 내 다리에 다른 기운을 불어넣고, 서명숙 대장처럼 진하게 살도 빼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슬며시 들었다. 튼튼해지고 살이 빠진다고? 마치 세월이 살로만 쌓이는 듯, 쉴 새 없이 불어난 몸이 이제는 온갖 병을 몰고 올 정도가 되어 가끔 서글픔을 되씹는 내게도, 혹시 가망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끝나지 않는 꿈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먼 산티아고보다도, 제주가 그걸 내게 보여줄 수 있다면, 모처럼 운동화 한 번 신어 볼까나? 

아마, 2001년이었을 거다. 친정엄마와 둘이서만 여행을 떠난 것은. 웃음보다는 싸움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엄마는 어느새 늙었고, 나도 눈에 띄게 늙어가고 있던 무렵. 모녀는 제주로 떠났다. 그때 처음으로, 자연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외돌개에서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나는 좀 울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죽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죽어 이런 땅, 이런 물 속으로 간다면, 어쩌면 죽음이라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 자연이 아름다웠다. 제주도에서는. 그렇지만 내게 제주는 활기보다는 약간의 울먹임으로 남아 있다. 제주 올레는 내게 활기를 줄까? 다시 가 볼까?  

책을 천천히 그야말로 놀멍 쉬멍 읽었다. '간세다리'가 되어 읽어야지 이 책이 맛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워 읽다가, 쭈그리고 앉아 읽다가, 엎드려 읽다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읽다가, 지하철에서도 읽었다. 이맛살 찌푸려가며 앞뒤 맞춰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순서대로 꼭 읽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편안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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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1-02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고 추천 꾹 누릅니다. '그날' 서명숙 대장 바로 옆에 앉혀 드릴게요 ^^

파란흙 2008-11-03 07:59   좋아요 0 | URL
하하, 알라딘에서 주목받아보기가 얼마만인지. 이웃집과의 교류가 없어 제겐 거의 대도시 아파트 주민 그 자체거든요. 알라딘에서의 삶이.^^ 바로 옆은 더 잘 안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