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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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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 작가로 불리는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에쿠니 가오리는《등 뒤의 기억》《기억 깨물기》《우는 어른》《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등으로 내게는 꽤나 익숙한 작가이다. 지금까지 느꼈던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굉장히 섬세하고 잔잔하며 담담했으며 때로는 난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자꾸 끌리는 매려적인 작품들이었기에 신작 소식은 반가운 일이었다. 신작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에쿠니 가오리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소설 속에 또 하나의 소설이 담겨진 액자소설로 독서를 좋아하는 주인공 미노루가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이 담겨져있다.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굉장히 모호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의 현실은 늘 분명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삶의 연속인데 이 소설은 그 느낌을 잘 담아놓은 듯 했다. 여느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기승전결은 소설 속의 소설안에서 찾아볼 수 있기에 자칫 담담한 이야기에 지루할 수 있을 법한 내용을 잘 보완하고 있다.

 

"너 말이야, 좀 더 어른이 될 수 없냐. 부탁이다."

미노루에게 그 말은, 나기사를 떠오르게 한다. 부탁할게, 좀 더 어른답게 굴어. 나기사는 수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본문 118p)

 

중년이 넘은 미노루는 책 읽기를 좋아하며 부모님이 남긴 유산으로 먹고산다. 그의 유산은 친구이자 세무사인 오타케가 관리해주고 있어 미노루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좋아하고,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좋아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여는 어린애같은 생활을 한다. 전 여자친구인 나기사 사이에 딸 하토가 있지만 미노루는 결혼은 사양이다. 미노루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책임이 필요없다. 그런 미노루 옆에 미노루에게 질려 보통의 삶을 살고자 다른 남자와 결혼한 나기사가 집에 오면 티브이만 보는 남편과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고 있으며 중년 여성의 커플인 치카와 사야카가 있다. 이들은 책 속에만 빠져 살면서 현실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미노루를 탓하지만 현실적으로 살려하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삶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처럼 보인다. 모호해보이지만 이들의 삶은 지극히 우리의 삶과 닮아있었다.

 

두 시간 정도 책을 익은 후에 여름 문안 편지를 열한 통 썼다. 오타케는 언제나 미노루에게 "너는 존재하는 게 일이지"하고 말하지만, 미노루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사람, 사람, 사람. 관계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본문 31p)

책을 읽고 있을 때면 미노루는 거기에 있으면서 없는 사람 같았다(더구나 그는 늘 책을 읽었다). 미노루와 사귀는 동안, 나기사는 언제나 한기를 느끼는 것처럼 외로웠다. (본문 38p)

 

참 재미있는 구성이다. 처음 소설 속 소설이 먼저 등장하면서 이들이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중간에 오타처럼 글이 끊겨서 당황했었다. 이것이 미노루가 읽는 책 내용임을 알게 되면서 나 역시도 원 소설과 소설 속 소설, 여러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어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미노루가 책을 탐닉하고, 미래를 꿈꾸며 현재 열심히 일하는 치카와 사야카 등은 우리의 모습일 게다. 현재를 외면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저자가 잘 짚어낸 책이다.

 

 

(이미지출처: '저물 듯 저물지 않는' 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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