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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노인 그럼프 ㅣ 그럼프 시리즈
투오마스 퀴뢰 지음, 이지영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오베라는 남자>, 그리고 최근에 읽은 <페르디낭 할아버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까지 할아버지 이야기가 인기다. 괴팍하고 고집불통이지만 어쩐지 귀여운(?) 면이 있는 할아버지의 성향이 소설에서는 개성만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에 적합한 탓이리라. 이번에도 할아버지 이야기인가? 라며 잠시 식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 소설은 여타 할아버지들과 차별화
되어 있었다. 고집불통에 괴팍함이 있는 할아버지라기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우리에게 삶을 이야기하는 귀여운 투덜거림이 있는 지혜로운
할아버지 이미지가 더 강하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핀란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 투오마스 퀴뢰에게 스무 편의 ‘조금 웃기는 대본’을
의뢰했고, 그것이 그럼프 노인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까칠한 괴짜 노인 그럼프에 대한 이야기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이후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어 인구 560만 명인 핀란드에서 35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으며 오디오북은 골든디스크를 2회나 수상했을
뿐만아니라 연극으로 각색되어 핀란드 전역에서 공연되었고, 2014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져 그해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이것은 핀란드
영화사상 흥행기록 3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라고 하니 이 소설이 보여줄 재미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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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쯤 되면 긴 세월도, 느리게만 돌아가는 것 같은 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고 만다. 때가 되면 빈손으로 떠나게 되고 이
세상에 별달리 남겨둘 것도 없게 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떠나고 싶은데, 내 뜻을 알아줄 이가 있을까? (본문 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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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간 개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슬퍼한다. 세상에 남겨진 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떠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일들을 수시로 겪지만 일부러 그들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훌륭하고 깜짝 놀랄 만한 유언장을
쓰기로 했다. (본문 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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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그럼프 노인은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아내가 있는 요양병원을 매일 찾아가며 병원에서 통제하는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아내에게
먹여주고,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건넨다. 잠시 TV 시청실에 앉아 신문을 보던 그럼프는 한때 이 지역의 중요한 납세자였던 리스토 립포넨이
들어와 흔들의자에 앉는 것을 보며 삶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생각하며 두뇌에 병이 오거나 다른 위험에 처하기 전에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아들이 돌보는 것도 원하지 않고, 기저귀는 용납할 수 없기에 노인은 아직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을 때 자신의 뜻을 분명히
알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다가올 죽음을 대비하기 시작한다. 관을 짜고, 나무 묘비를 만들고 유언장을 준비해야 한다. 그럼프
노인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양질의 종이에, 고인이 되신 아버지가 당신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으신 팁펜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잉크가 말라서 아들과 함께 잉크를 사러 마을로 나간다. 그럼프는 아들에게 자신이 쓴 추도문을 읽어주기도 하고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아들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추도문을 들은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글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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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흐마이넨 부인의 도움으로 양복준비도 마친 그럼프는 관에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지, 좀 특이하게 만들 수 있을지 생각했고 나무 의자를
작업대 옆에 놓고 계단 삼아 올라가 관을 카약이라고 생각하고 중간쯤에 앉았다가 수제품 관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을 생각해보다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마당에 나가보려다 마치 카약이 전복된 것처럼 콘크리트 바닥에 몸이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그렇게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그럼프 노인에게 아들과 며느리는 서로를 위해 요양원에 가기를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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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 발달돼서 오래 사는 늙은이들이 많다 보니 이제 도우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요양원이란 돌봄과 보살핌을 받는 곳이 아니라 그저
생명을 유지시키는 곳일 뿐이다.
자식들은 근심과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해 늙어가는 부모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려고 한다. 아이들하가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어디에 머리를
부딪히기라도 할까 두려워서 헬멧을 씌운다. 부딪혀봐야 부딪히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인데도 말이다. (본문 2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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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프는 '성격이 나쁜 사람', '투덜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노인은 현재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곤 하는데, 그 투덜거림은 괴팍한 노인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한 세대를 살아오면서 깨달은 통찰이자 지혜로 보여졌다. 그럼프 노인의 모습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여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대비한다. 노인은 자신만의 고집으로 자신만의 삶을 구축해 살아온 것이다. 이것이 그럼프 노인의 모습이 괴짜스럽기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일 게다. 그동안 보여졌던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는 작품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고, 나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내 자식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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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누구나 다 선택을 해야 한다. 나도 예전에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맛있는 밥을 먹고 싶었고 공사판을 찾아 집을 떠나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식구들이 밥을 먹으려면 내가 일을 해야 했고, 공사판에서 먹고 자는 것에는 곧 익숙해졌다. 집과 식구들을 항상 기억하려 애썼다.
(본문 1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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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기쁘고 슬픈 것에 만족하지 않고 반드시 왜 기쁜 것인지 왜 슬픈 것인지 이유를 알아야 하는가? 별것도 아닌, 남들도 다 하는
고만고만한 걱정거리를 가지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떠든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커피에 크림을 타서 마시면 그만이다.
슬픈 일이 있으면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면 그만이다.
세상은 그래도 돌아간다. (본문 6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