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기의 예술
폴 오스터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굶기의 예술"을 고른 까닭은 "달의 궁전"에서 폴 오스터가 묘사한 배고픔에 대한 미학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라면 내면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애쓰는 작가인데, 그가 좋아하는 대가들 역시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다

역자의 지적대로 폴 오스터를 감동시킨 작가들은 대부분 오스터처럼 유태인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책 제목인 "굶기의 예술"은 노벨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기"에서 따 온 것이다

나는 오스터가 이 책을 읽고 "달의 궁전"에서 마르코가 보여 준 의도된 가난을 서술했으리라 확신한다

잠깐씩 보여 주는 함순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달의 궁전"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달의 궁전"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의도된 가난을 택한 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는 주인공의 독특한 심리 구조였는데, 함순은 그 심리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한다

의도된 가난이란 종교적 의미의 단식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행이 아니라, 그저 내적 충동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자기 학대일 뿐이다

극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감으로써, 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예술을 추구하길 원하나, 배고프면 글도 쓸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을 뿐이다

육체적 만족이 없으면 결국 정신적 성취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함순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죽든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일을 하든지 둘 중 하나의 아주 단순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죽으면 예술이고 뭐고 없기 때문에 주인공은 너무도 당연하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어쩌면 예술가의 이러한 치열한 고뇌나 내적 투쟁은 지나치게 미화되고 과장됐을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것이 예술이라는 범주에 속해 있을 뿐, 작가들에게는 먹고 살기 위한 직업으로서의 기능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작가에게 예술성의 추구를 위해 자신을 파괴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치 평범한 의사에게 슈바이처와 같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처럼)

위대함은 글쓰기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 자신의 생과 동일시 될 때 완성되는 건지도 모른다

 

오스터가 대담한 이집트 출신의 유태 시인 에드몽 자베스 역시 그런 사람이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2차 대전 중에도(즉 독일군이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도) 평화롭게 이집트에서 살던 자베스는, 유태교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집트에서 쫒겨나 프랑스로 망명한다

프랑스로 간 이유는 그가 지금껏 프랑스어로 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자베스는 자신에게 있어 글쓰기란 마치 자신이 유태인이라 낙인찍히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벗어 던지려 해도 벗어 버릴 수 없는 유태인이라는 표딱지처럼, 글쓰기 역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고백한다

유명한 "사자의 서"를 탈고한 후 그 때까지 잠잠하던 천식이 펜을 놓음과 동시에 찾아와 생명을 위협하는 경험을 한 뒤, 그는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뒤쪽에 나온 오스터의 인터뷰를 보면, 오스터 역시 글쓰기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해 주는 사람 중 하나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그가 문학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다)

나는 오스터가 내면의 세계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작가라 생각했는데 (글을 길에 쓰길 좋아한다는 의미) 초창기에는 시를 썼다고 해서, 좀 놀랬다

시라면 상징과 은유, 함축 등의 기법을 이용해 생각을 압축해서 하고 싶은 말을 훨씬 적게 해야 하는데, 오스터의 이미지와 참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으로서는 거의 평가받지 못했다

오스터가 성공한 시점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산을 물려 받으면서이다

책이 안 팔려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린 오스터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죽으면서 약간의 유산을 남겼고, 그 덕에 몇 년간 글쓰는 데만 전력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곧 "성공"이라는 잔인한 등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고백한다

 

"달의 궁전"에서도 그렇지만 오스터는 우연이라는 기법을 차용하길 좋아한다

그것은 오스터의 표현대로 사건의 정황을 짜맞추려는 유치한 인과관계 성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명확한 인과 관계를 갖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오스터의 소설처럼 가난한 예술가가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도 우연히 한 통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삶의 대부분의 사건들은 우연한 일 투성이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몇이나 되는지...

 

오스터는 소설가로 성공하기 전 평론가 일을 했는데, 여기 실린 글들은 그 당시 잡지 등에 기고한 것들이다

그가 분석한 작가들은 카프카를 제외하고는 다 모르는 인물들이라 완벽한 몰입은 어려웠다

그렇지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해 내려는 사람들이라 모두 흥미롭다

특히 첫 장에 소개된 노르웨이 작가 함순의 "굶기"라는 소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내가 "달의 궁전"을 읽고 작가의 의도에 대해, 혹은 등장인물의 묘사되지 않은 심리 구조에 대해 온갖 상상을 다했듯, 삶에 깊은 각인을 남긴 작가들에 대해 치열한 분석을 시도한다

(문학적인 분석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카프카의 말처럼 문학이 얼어 있는 강에 도끼를 던지는 정도의 충격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책을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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