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달의 궁전을 다 읽었다

한 소설을 며칠에 나누어 읽기는 처음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을 하룻밤에 다 읽으려고 들면 내용을 음미하지 못한 채 줄거리에 치우치게 될까 봐 하루에 읽을 분량을 정해 놓고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대단히 꼼꼼하고 진지하게 통독한 셈이다

 

오늘 등장한 인물은 에핑의 아들 솔로몬 바버다

마르코는 에핑의 유언장을 전해 주고, 그와 뉴욕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솔로몬이라는 남자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특이한 외모를 가졌는데, 160kg의 비만에다가 대머리라는 점이다

책의 주인공이 이 정도의 고도 비만으로 묘사된 예는 일찌기 없었는데, 참 놀랍다

160kg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덩치다

폴 오스터는 이렇게 거대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세상에 적응해 가는지를 자세히 서술한다

(그의 아버지인 에핑과 아들인 마르코가 모두 삐쩍 마른 인물인 걸 보면, 솔로몬은 아마도 돌연변이인 모양이다)

 

솔로몬이 21세기에 살았다면 많은 재산으로 위 절제술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비만은 말 그대로 병이기 때문에 식습관 조절이나 운동 따위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

(그는 결국 등뼈가 부러져 입원한 후 음식을 튜브로 공급하게 되자 지나치게 살이 많이 빠져 면역력 약화로 죽고 만다)

솔로몬은 자신의 육체를 천형으로 받아들이고 대신 책에서 만족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일부러 공원 등을 산책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는 법을 연습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침착하는 법도 배운다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라는 사실을 깨달은 솔로몬은 생의 의지를 공부에 쏟아 부어 고등학교 졸업 때는 대표로 연설도 하게 된다

 

대학에 진학한 그는 의미있는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여 졸업 후 여러 유명 대학의 러브콜을 받는다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 첫 직장을 잡은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성욕을 버린 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연애란 꿈도 못 꿔 본 솔로몬은 대학 교수가 된 후 자신감을 얻어 프로포즈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막 대학에 입학한 1학년 생이라는 것이다

몇 번의 구애를 거절당하다 우연히 그녀의 기숙사에서 정사를 벌이게 되는데, 불행히도 기숙사 잡역부에게 현장을 발각당한다

그는 대학에서 쫒겨나고 여학생, 에밀리 역시 학교를 중퇴한 뒤 멀리 떠난다

솔로몬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애를 쓰지만, 에밀리는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다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 사라진다

그 후 솔로몬은 그녀에게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 하고, 대학에서 쫒겨 난 후 자신감을 잃어 다시는 연애 따위는 꿈꾸지 않는다

 

그 가엾은 여학생이 바로 마르코의 어머니다

에밀리는 불행히도 단 한 번의 정사로 아이를 가졌고, 미혼모로써 불행한 삶을 살다가 마르코가 7살 되던 해 버스에 치여 죽고 만다

솔로몬 역시 그 경력이 오점이 되어, 또 그 거대한 외모 때문에 다시는 유명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름없는 시골 대학을 전전한다

그는 오히려 시골을 만족스러워 한다

시골 대학생들은 경험의 폭이 적어 솔로몬의 엄청난 장서들만 봐도 충분히 경의를 표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익숙해질만 하면 대학을 바꾸는 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철저히 끊었다

 

처음에 에핑의 아들 솔로몬이 마르코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지나친 우연의 남발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사실 그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키티에 대한 것도 별다른 서술 없이 그저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는 식이라 좀 못마땅했다)

폴 오스터는 마르코의 입을 통해 "세상이 갑자기 우연에 뒤덮힌 것 같군요"라고 말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

그렇지만 솔로몬의 생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완전히 책에 빠져 들었다

에핑과 솔로몬과 마르코는 다같이 내면의 세계에 침착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그들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불행이 닥쳤을 때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데, 그들은 그 불행을 고행으로 생각하고 정신적 가치를 높이는 방편으로 여긴다

마르코는 가난 때문에, 에핑은 사막에서의 조난과 불구 때문에, 그리고 솔로몬은 비만 때문에 (여기서 비만이란 단순히 살이 쪘다는 얘기가 아니라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고도 비만이다) 운명으로부터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운명을 받아 들이고, 책에서 해답을 찾는다

 

책은 이 삼대를 엮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마르코는 삼촌이 남긴 유일한 유산인 책을 처분하기 위해 미친듯이 그것을을 읽은 뒤 헌책방에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고, 에핑은 눈이 멀고 하반신 마비가 된 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비서가 읽어주는 책에 몰두했고, 솔로몬은 너무나 비대했기 때문에 움직이기도 어렵고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서관에 책을 읽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모두 불행한 상황을 독서로써 극복했다

또 책을 읽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책에 몰두하기도 했다

 

마르코의 불행은 키티와의 관계가 끝장난데서 비롯된다

그는 여러 행운들에 의해 아사 직전에 구출되어 에핑과 솔로몬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으나, 키티가 그의 곁을 떠나므로써 모든 것을 잃고 만다

키티는 처음부터 맹목적으로 마르코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일이 닥쳐도 절대 그의 곁을 떠날 것 같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나는 마르코의 행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불행은 늘 어처구니 없는 데서 시작한다

피임에 실패한 키티는 임신을 하게 되고 마르코는 강렬하게 아이를 원하지만, 무용수인 키티는 24세에 엄마가 되어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완강하게 버틴다

마르코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가 일찍 죽고 외삼촌 손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가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욕구일 것이다

(나 자신 보다도 더 큰 집단에 속하고 싶었다는 그 문장에서 나는 마르코의 뼈저린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전도 유망한 줄리어드 무용과 학생에게 임신이란 버티기 힘든 무거운 짐에 불과했을 것이다

특히 소설의 앞부분에 키티가 얼마나 무용을 잘 하고, 또 사랑하는지 잘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결별에 대한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키티 역시 부모가 모두 죽은 후 미국으로 이민 와 유색인종으로써, 또 고아로써 혼자 세상을 헤쳐나간 여자다

책에서는 그녀의 내면 세계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지만, 여러 상황으로 유추해 볼 때 그녀가 무용에 자신의 생을 걸었음은 분명하다

결코 평탄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더구나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라 어린 시절 다른 큰 집 가족들에게 많은 구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늘 건전하고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려는 마르코를 헌신적으로 돌보는데, 이러한 긍정적인 성격을 유지하게끔 만든 원동력은 무용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무용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그녀 역시 불행한 환경에 함몰되어 인생을 막 살거나 정상적으로 산다 할지라도 우울하고 어두운 성격을 갖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 키티에게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란 더 이상 무용을 할 수 없다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키티는 완강하게 출산을 거부하고 마르코와 격렬하게 다툰 후 결국 유산한 다음 이별한다

(이런 갈등 구조는 남녀 사이에 흔한 일이다 "고백"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연극배우인 정선경과 유부남인 유인촌이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하지만, 원치 않는 임신으로 둘 사이가 파탄났다 남성에게 임신이 격정적인 흥분을 가져온다면, 여자에게 임신이란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 되는 모양이다)

 

물론 키티 곁을 떠난 사람은 마르코다

남에 대해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보살핌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던 마르코는 그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키티 곁을 떠난다

키티는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또 마르코 역시 그녀를 너무나 그리워 하지만 내면적 고통이 이별을 견디는 쪽으로 가도록 한다

(키티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나도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별의 고통을 견뎌 내야 한다는 역설적인 이유로 말이다)

나중에 솔로몬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그가 죽은 후 마르코는 키티에게 전화해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매달린다

그러나 너무나 뜻밖으로 키티는 그의 혼란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만나는 것을 거부한다

"내가 이 상황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냉담해지는 것이었다"는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마르코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지만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키티의 그 대답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녀는 마르코를 아무 조건 없이 열렬하게 사랑했으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유산) 그가 떠나갔다

가족도 없는 그녀에게 이별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알 만 하다

그녀가 버티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에, 혹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철저하게 냉담해지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정의 증폭을 이기지 못해 미쳐 버렸을테니까

 

이런 키티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마르코는 엉뚱하게 딴 남자가 생겼냐고 묻는다

대답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이제 다시는 옛날로 돌아 갈 수 없다고, 키티는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키티가 떠난 후 마르코는 삶의 의지를 잃고서 방황한다

에핑의 동굴을 찾으러 떠났지만 (말하자면 그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이미 그곳은 수몰 지역으로 변했고, 설상가상으로 솔로몬이 남긴 유산 만 달러가 든 자동차도 도난당한다

그는 수중에 든 여행자 수표를 아껴 가며, 그 옛날 가난으로 굶어 죽기 직전에 센트럴 파크를 떠돌았던 것처럼, 이제는 태평양을 향해 국토 횡단을 시도한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자동차를 도난당해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마루에 다다른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본다

그 옛날 가난으로 몸부림 치던 때 아파트 밖으로 보이던 레스토랑 "달의 궁전" 간판 대신, 진짜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본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삶의 새로운 시작점임을 깨닫는다

그의 수중에는 4백 달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에핑이 사막에서 버려졌을 때처럼 그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각오를 세운다

아마도 그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활기차게 삶을 시작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운이 좋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