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주의한 사랑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배수아라는 작가 이름 때문에 그녀의 소설을 한 번쯤 읽어 보고 싶었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아 집어 들었다

"부주의한 사랑"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지 않는가?

왠지 모르게 유부남과 얽힌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예감이 맞긴 한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절대 이런 부주의한 사랑은 안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작가가 독자에게 원하는 건 이런 결론이 아니었을 것 같지만...

 

배수아는 90년대 감각적 이미지의 글쓰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불린다

그 명성에 걸맞게 평론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읽는다기 보다는 보는 느낌이 드는 소설을 쓴다

책 말미의 평론에서는 그녀의 소설을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 비유했다

사실 이런 글쓰기는 잘 읽혀지지 않는다

소설이란 감각적인 부분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 기본틀은 서사 구조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으로서는, 영화의 시놉시스 같은 그녀의 소설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200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소설인데도 문장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꽤 오래 읽었다

특히 주인공 연연의 나쁜 피가 섞인 태생적 한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이고, 툭툭 끊어지는 전개 때문에 읽기 힘들었다

 

중국 이름 같은 연연은 역시 중국 이름 같은 어머니 모령의 불행한 사생아로 태어난다

이 소설의 배경이 6.25 직후 50년대이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은 아주 가난한고 불행하다

무지막지한 남편에게 시집 간 모령은 평생을 남편과 전처 아이들과 본인이 낳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도록 일한다

그나마 남편이 죽은지 몇년 후에 낳게 된 연연 때문에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연연은 모령의 이복 동생인 미령에게 보내진다

모령은 40이 넘은 출산 때문에 그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이 묘연해진다

 

미령은 60년대에 미대를 나온 인텔리 여성이었으나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와의 결혼으로 불행해졌다고 믿는 여자다

미령의 남편은 젊고 잘 생긴 물리 선생인데 역시 그의 친구들이 학위를 받고 대학에 남게 되지만 신입생 때 미령을 만나 학업을 포기하고 학교 선생이 된 남자다

미령과 그녀의 남편은 계속되는 출산 때문에 가난해진다

그럼에도 미령의 남편은 자기 생활에 비관하지 않고 가정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애쓴다

반면 미령은 자신보다 여섯 살이 어린 남편이 남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을 질투하고, 여러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뒤치닥꺼리를 해야 하는 가난한 삶을 증오한다

미령은 늘 현실에서 반쯤 발을 뗀 채 살아간다

결국 그녀는 우울증과 강박증에 시달리다 불행하게 죽고 만다

 

이 집에는 이미 모령의 다른 딸이 식모 비슷하게 키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 역시 연연인데 무척 아름답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 백치미가 있는 여자로 그려진다

아내의 조카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잘 생기고 젊은 주인 남자와 내연의 관계라고 의심한다

아내가 죽은 날, 어이없게도 연연 역시 뒷산에서 정원용 도끼가 가슴에 꽂힌 채 시체로 발견된다

미령의 남편이 내연의 관계였다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용의자로 잡혀가고, 이 소설의 주인공 어린 연연은 양부모에게 입양된다

 

여기까지가 연연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다

소설의 화자는 연연 자신인데, 그녀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태어난 배경에 대해 독자에게 들려준다

말하자면 그녀는 나쁜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연연은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것도 사귀던 남자의 사촌과 동거를 한다

사귀던 남자애의 이름은 "운"인데 그의 사촌 "택"은 "운"이 사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연연도 "사촌"이라고 호칭한다

연연이 사랑하는 남자의 공식 명칭은, 그래서 사촌이 된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고 그런 통속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런데 내가 전율을 느낀 까닭은 부주의한 사랑을 택한 연연의 삶이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탓이다

사촌과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연연은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양부모로부터 매달 생활비도 받아 경제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가 처음에 사귄 "운"은 재경부의 공무원으로 둘이 결혼하면 괜찮은 중산층이 될 운명이었다

나쁜 피가 섞인 태생적 한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운"의 사촌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한다

쌍둥이 아기가 있는 사촌은 아내가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연연과 동거에 들어간다

사업을 하는 사촌은 연연에게 더욱 부유한 삶을 제공한다

연연은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직장에 더 불성실해지고 가족으로부터도 계속 멀어진다

입양됐기 때문에 가족으로 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연은 "부주의한 사랑"을 택한 것에 대해 전혀 변명하지 않는다

결국 나쁜 피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미 두 아이가 있던 사촌은 아내가 세 번째 아이를 낳자 8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겠다는 뻔뻔한 말을 남긴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연은 사촌을 사랑했던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촌이 자신을 망쳤다는 가족들의 비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홀로 남은 집에서 사촌을 기다리지만, 기다림에 지친다거나 그를 원망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사촌을 사랑했던 날들은 그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촌을 사랑한 댓가는 너무나 끔찍하다

다만 그녀가 자신이 이렇게 된 것과 사촌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뿐...

 

직장을 잃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사촌 역시 떠나버린 뒤 연연은 생계를 위해 중국집의 웨이트리스로 취직을 한다

양아버지의 지원이 끊겼기 때문에 겨울 내내 난방도 못하고 며칠을 굶기까지 한다

서서히 보이지 않게 몰락한 그녀의 삶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통속 소설의 주인공들은 유부남과의 "부주의한 사랑"이 끝난 후에도 이런 식으로 비참해지지 않는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강진희는 유부남과 사귄 것이 문제되어 대학 교수 자리에서 밀려 나지만, 조금도 비참해지지 않고 평론가로써 예전과 다름 없는 수준의 삶을 영위한다

사회적인 지탄은 받을지언정, 그것 때문에 여주인공의 삶이 피폐해진다거나 가난해지는 건 어떤 소설에서도 본 일이 없다

그런데 배수아는 부주의한 댓가가 어떤 것인지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 준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한 때 사귀었던 "운"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된 후 며칠을 방황하다가 연연의 집에 나타난다

사촌과의 동거 때문에 잘 나가던 고위 공무원 남자 친구를 잃었던 연연은 주변의 안타까움과는 달리 (그 남자를 잡았어야 한다는 식의...) "운"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는다

연연이 현명했던 것일까?

사람이든 상황이든 늘 변하기 마련이라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 나가던 고위 공무원 "운"은 파면된 후 결국 연연과의 하룻밤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 강에 몸을 던지고 만다

자신에게 주어진 어처구니 없는 사회적 몰락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가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은 부주의한 사랑의 댓가를 너무나 분명하고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만약 연연이 조금 더 자제력이 있고, 현실적이었다면, 그래서 무책임한 유부남 따위는 사랑하지 않았다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경린의 소설 "내 생에 꼭 한 번 뿐인 특별한 날"을 읽을 때만 해도 여주인공 미흔은, 부주의한 사랑 후에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이혼은 했지만, 또 사랑하던 남자가 가 버렸지만 그녀는 자기 삶을 꿋꿋이 잘 살아 나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배수아 소설 속의 연연은 냉정하게 말하면 유부남으로부터 농락당한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소설에서 흔히 묘사된 것과는 다르게, 유부남이었던 사촌은 한 때의 사랑보다 가족을 택한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통속 소설에서처럼 가족을 버리는 대신, 현실에서처럼 주인공을 버린다

그리고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몰락해 간다

 

웃기는 결론일 수도 있지만, 책을 덮으면서 인생은 신중하게 건너야 하는 외나무 다리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은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부주의한 사랑"의 댓가가 얼마나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일인지에 대한 예화들은 주위에 널려 있다

우리는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겨울에 난방을 할 수 없고, 제 때에 식사를 하지 못하면, 금새 비참해지고 초라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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