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짐작이 안 갔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마치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처음 봤을 때처럼 제목과 내용이 전혀 매치되지 않았다

설마 의학적인 얘기일 줄은 몰랐다

아들이 의사였기 때문에 의사들의 삶에 더 애착을 가진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던 분야였을까?

어쨌든 비교적 소상하게 의사들의 삶을 인터뷰한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겪어 보지 않은 직업의 애환에 대해 쓴 글은 왠지 모를 생뚱맞음이 있다

잘 조사되고 연구된 정확한 사실들의 나열은 그저 소설 속의 문장으로만 존재할 뿐, 마음을 흔드는 애잔함 따위가 없다

그렇다고 소설을 폄훼하는 건 절대 아니고...

 

소설 자체의 내용만으로는 큰 공감이 안 갔다

좋아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열심히 읽긴 했는데, 책마다 연분이 맞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는 모양이다

남들은 다 감동하고 좋다고 칭찬해도 나한테는 무심한 것들도 있고, 통속 소설이라 할지라도 가슴을 뒤흔드는 책도 있다

그래서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라고 말했던가...

 

재벌 2세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나 소설은 왠지 모르게 정이 안 가는데, 상대적인 박탈감이라기 보다는 내 주변에 워낙 없는 일이라 잘 공감을 못하는 것 같다

경험에 비추어 소설을 해석하는 내 독서 습관 때문에,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감동도 잘 안 온다

그래서 지지리도 궁상맞은 소시민들의 애환을 그린 소설들을 좋아한다

노희경 드라마나 박완서의 다른 소설들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힙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위악적인 삶, 아마 내가 가장 관심갖는 주제일 거다

(가난하다고 해서 착하지 않고, 오히려 기본적인 도덕성이 더 약할 수도 있다는, 그럼에도 크게 나쁜 짓 할 베짱도 없는 그런 소시민적 위악성...)

 

아버지 없이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조건이 나쁘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채이고, 고시 공부에도 실패했으나 재벌 2세를 만나 시집가는 영묘의 캐릭터가 현실적이 않아 쉽게 공감이 안 갔다

미국 가서 큰 부자가 되서 모교에 100만 달러를 척 허니 기증하고 금의환향한 형 영준 역시 허구적으로 느껴지고...

특히 부자집 남자에게 시집 가 애기도 안 낳고 큰 돈 받아 이혼한 후 자유로운 삶을 사는 현금의 캐릭터가 제일 맘에 안 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다들 일이 술술 풀리는 걸까?

인생이 그렇게 굴곡없고 만만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마 제일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캐릭터는 주인공 영빈이었다

의사였던 죽은 아들 때문일까, 작가는 그래도 의사인 주인공 영빈을 제일 성실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린다

"남들은 의사니까 다 잘 살 거라고 기대하지만, 정작 실속은 하나도 없는 허울 뿐인 직업"이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꽤 열심히 의사들을 인터뷰 했구나 싶었다

그래도 소설 속의 영빈은 모교의 내과 교수로 TV에 명의라고 소개까지 되는 성공한 인물로 나온다

이런 경력을 가진 사람도 자조감을 느낀다면, 이제 의사라는 직업의 기대치도 상당히 낮춰야만 할 것 같다

 

이 소설의 핵심 기둥은 영묘의 남편 송경호의 죽음과, 맨 마지막에 한 페이지 정도 등장하는 치킨 박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송경호는 Y그룹의 장남으로 영묘와 결혼 3년만에 두 아들을 둔다

이 집안은 대대로 결핵을 앓는 병력이 있어, 처음 송경호가 피를 토했을 때 무조건 결핵이라 단정짓고 그 보다 더한 병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송경호의 병은 폐암이었다

그것도 수술이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었다

영묘의 오빠인 영빈은 호흡기 내과에서 알아 주는 명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제를 떠맡지만 가족들은 항암 치료를 극구 거부하고 심지어 환자 본인에게도 절대 비밀로 한다

항암 치료를 하면 기가 빠져 손도 못 써 보고 죽는다고 생각한 송회장은 전국 각지의 대체 요법과 한약 등을 수집해 집에서 자가 치료를 시도한다

할머니는 집안 대대로 길흉화복을 점쳐온 최도사에게 백일 기도를 드리러 다닌다

 

환자들이 대체요법에 의존하고 싶은 심리를 모르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항암요법을 해도 나을지는 미지수라고 발뺌을 한다

반면 대체요법이나 민간 치료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낫는다고 확신을 준다

죽음이 임박해 온 사람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온갖 첨단 기구와 의학으로도 어쩌지 못한 병을, 단지 그들의 직관에 의존해서 고친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그들 역시 인간일 뿐인데, 사람을 살려내는 초능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혹 그들이 환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게 있다면, 살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주는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믿음만으로 이길 수 있는 병이 과연 얼마나 될까...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항암치료를 한다고 해도 겨우 1년 남짓한 수명 밖에 못 산다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런 대책없는 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 바로 대체요법이나 민간요법일 것이다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병원은 참 무력할 뿐이다

의학은 솔직하게 고칠 수 없다고 말해 버리기 때문에 환자들이 외면하고, 민간요법 등은 고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환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한다

소설에도 뜸으로 암환자를 고쳐 낸다는 의사가 나오는데, 송회장은 속는 척 하면서 수백억을 약속하지만, 고친 후에 돈을 지불하겠다고 약은 수를 써 결국 줄행랑 치고 만다

 

송경호는 집안 식구들의 함구 탓에 죽음에 대한 어떤 대비도 못하고, 치료법을 선택하지도 못한 채 이상한 도사의 주술 치료만 받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운명한다

어린 아들들이나 미망인을 위해 어떤 유언도 남기지 못해, 삼모자는 시댁 식구들의 처분만 바라게 된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망자에게도 죽음을 예비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이 어떤 치료를 원하고, 어떤 식으로 삶을 마무리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은 줘야 한다

의사 영빈은 환자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는데, 매제의 죽음을 보면서 더욱 자신의 믿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 믿음이 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치킨집으로 성공해서 별명도 치킨 박인 중년 남자가 폐암 선고를 받는다

이번에는 초기라 수술만 하면 나을 수 있기 때문에 영빈은 보호자인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자에게 정확히 병세를 얘기한다

그런데 치킨 박은 그 날로 행방불명이 된 후 병원 지하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어이없게도 자살을 한 것이다

암에 걸리면 집안 거덜내야 한다던데, 어렵게 일궈낸 치킨 가게를 남의 손에 넘길 수는 없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이 정도 이뤘으면 나는 여한이 없으니, 아내에게 아이들 행복하게 키워 달라고 부탁하는 유서를 남긴다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렇게 영빈이 살 수 있다고 강조했음에도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와 절망감 때문에, 가족을 위해 돈 축내지 않으려고 스스로 죽어 버리다니, 이걸 눈물나는 가족애라 해야할지, 무식이 주는 비극이라 해야할지...

 

그렇지만 결국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는 자신이 선택할 문제라고 본다

유산 분배 때문에 시끄러워질 걸 대비해, 혹은 환자가 희망을 잃을까 걱정된다는 이유로 끝까지 병을 숨기는 건 환자를 죽이는 것과 매한가지다

나에게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당연히 정확하게 알릴 것이고, 또 나 역시 가족들이 그렇게 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두면 가치 판단은 늘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그저 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 죽어가는 환자들의 돈과 남은 생명력까지 소진시키는, 신비주의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학이 환자에게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고, 또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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