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청목 스테디북스 31
에밀리 브론테 지음, 인병선 옮김 / 청목(청목사)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정말 정말 어렵게 읽은 책이다
어렸을 때 주니어 세계 문학 전집에서 절반 정도 읽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기를 쓰고 읽었다
솔직히 아주 재밌거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소설, 특히 애정 소설의 맛은 주인공의 세심한 심리 묘사라고 믿는 나에게, 이 소설은 너무나 불친절하다
작가가 주인공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전지적 시점도 아니고, 주인공들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는 1인칭 시점도 아닌, 제 3자에 의한 관찰자 시점이기 때문에 사건의 나열에 불과한 느낌이 든다
"위대한 게츠비" 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랑 이야기를 남이 해 주는 소설은 정말 재미없고, 머리를 아주 많이 굴려서 상상을 해야만 그들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좀 난해하다

이런 고전들은 어린이용으로 줄거리만 압축되서 출판된다
그런데 줄거리만 나열하고 쉬운 문장으로 번역이 됐다면 과연 이 소설의 참맛을 알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어린이가 미치광이 히드클리프의 사랑을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애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고 난해한 소설이다
문장을 쉽게 바꾸고 내용을 요약한다고 해서 이해할 만한 책이 절대 아니다
이러니 내가 중학생 때 던져 버렸지
19세기에 발표된 소설이라 요즘 읽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이 정도의 현대성을 가진 게 신기할 정도다

사실은 소설의 제목 때문에 꼭 읽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있었다
"폭풍의 언덕" 이라... 왠지 무슨 사연이 숨겨 있을 것 같은, 그것도 아주 격정적이고 치열한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단 한 편만을 쓴 채 20대에 죽었다는 슬픈 사연이나, 언니 샬롯 역시 "제인 에어" 를 쓰고 요절했다는 집안 내력 등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추긴 것 같다
여러가지 흥미로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읽기는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만약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줄거리만 가지고는 실패할 것 같다
미치광이 히드클리프의 심리 상태를 과연 어떤 배우가 제대로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히드클리프의 캐릭터는 참으로 독특하다
한 여자를 사랑한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그녀가 죽은 후 18년의 긴 세월 동안 그녀의 유령과 함께 살면서 고통받는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안 간다
히드클리프는 안쇼우씨가 장에서 주어 온 아이다
이상하게도 안쇼우씨는 지저분하고 거칠게 생긴 히드클리프를 총애해 그의 아들 힌드레이는 히드클리프를 미워한다
대신 딸 캐서린은 그를 사랑한다
그러나 지주의 딸과 주어온 아이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 캐서린은 결국 자기와 신분이 비슷한 린튼에게 시집가 버린다
구박만 받던 히드클리프는 집을 나간 후 3년 만에 되돌아 온다
그 사이 안쇼우씨는 죽고 아들 힌드레이가 결혼해서 헤어톤을 낳는다

히드클리프가 캐서린에게 미쳐 있는 걸 보면 그녀를 대단히 사랑했음은 분명한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희생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은 아닌 것 같다
힌드레이에게 구박받던 히드클리프는 3년 후 건장해진 채 돌아와 오히려 힌드레이를 압박하는 처지가 된다
소설에서는 아버지 안쇼우씨가 히드클리프만 총애해 힌드레이가 삐뚤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내가 보기에는 힌드레이 자체가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이 있다
그는 겨우 스물 일곱의 나이에 노름과 술에 빠져 비명횡사 하고 만다
히드클리프는 어린 아들 헤어톤을 제치고 폭풍의 언덕을 차지해 버린다
이 집안 사람들 때문에 사랑하는 캐서린을 뺏겼다고 생각하는 히드클리프는 복수심에 불타올라 캐서린의 시누이인 이사벨라를 유혹한다
이사벨라는 어째서 이런 폭력적이고 어두운 남자의 희생물이 됐을까?
더구나 이사벨라는 부유한 지주였던데 비해 히드클리프는 근본도 모르는 고아인데 말이다
사랑을 하면 어리석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사벨라 자체가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히드클리프의 복수심을 잘 알고 있던 캐서린은 시누이를 놓아 달라고 사정한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히드클리프는 이사벨라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한다
캐서린을 뺏어간 린튼에게 히드클리프는 그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뺏음으로써 복수한 셈이다
잔인하게도 히드클리프는 결혼하자마자 이사벨라를 구박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복수심 때문에 결혼한 것이기 때문에 아내를 더욱 고통에 빠뜨려야 오빠인 린튼에게 완벽한 복수를 하게 된다
결국 어리석은 이사벨라는 히드클리프의 잔인함에 질려 먼 곳으로 도망가 아이를 낳고 혼자 키우다가 일찍 죽는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왜 이사벨라는 이혼을 하지 않았을까?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세기라면 이혼이 금지되지도 않았을텐데,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혼자 아기를 낳고 13년씩이나 키우면서도 여전히 법적인 결혼 상태를 유지한다는 게 좀 이해가 안 간다
더구나 그녀가 상속받기로 한 재산은 자신이 죽고 나면 남편 히드클리프에게 전해지는데도 말이다
"오만과 편견" 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확실히 근대 영국 사회를 요즘의 눈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 시대적 차이나 관습들이 소설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것 같다

히드클리프의 목표는 단 하나다
캐서린과의 결혼을 방해한 안쇼우가와, 캐서린이 시집간 린튼가를 파멸시키는 것
평생을 그 목표 하나로 살았을 정도로 캐서린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강했다면 차라리 그녀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칠 것이지, 왜 속수무책으로 당하더니만 별 명분도 없는 복수에 온 인생을 바치는지 모르겠다
캐서린과 히드클리프가 서로 닮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둘은 거의 똑같은 영혼을 가졌다
캐서린 역시 버릇없고 격정적이며 이기적인 여자로 나온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죽어도 잊지 못하는 순정파가 아니라, 서로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떨어지지 못하는 것 뿐이다
더구나 캐서린은 거칠고 가난한 히드클리프 대신 교양있고 부유한 린튼을 택했다
히드클리프로서는 캐서린에게 역시 원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캐서린을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친정과 시댁 가문을 멸망시킴으로써 고통을 준다
결국 병약한 캐서린은 자기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딸 캐서린을 낳다가 죽고 만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빨리 죽는지 모르겠다
작가 브론테네 집안 사람들도 다 일찍 죽은 걸로 봐서 당시 수명이 길지 않았음은 알겠는데, 하여간 다들 일찍 죽는다
그래서 결혼을 빨리 하는 걸까?
캐서린의 딸 캐서린은 히드클리프의 아들 린튼과 겨우 16세에 결혼한다
히드클리프는 잔인하게도 캐서린이 죽은 후에도 복수를 멈추지 않는다
린튼가의 유일한 혈육인 캐서린을 자기 며느리로 맞은 후 린튼가의 나머지 재산까지 가로채고 며느리를 구박하는 것이다
그는 병약한 자신의 아들 린튼을 위협해 캐서린의 딸을 유혹하라고 시킨다
그리고 강제로 결혼시킨다
캐서린의 남편 린튼은 이미 병들어 죽기 직전이었므로 이 결혼을 말리지 못한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린튼가와 안쇼오가의 모든 재산을 다 갖게 되지만 자신은 거칠은 폭풍의 언덕을 떠나지 않는다
복수가 완성돼서 허망했을까?
그는 아들 린튼마저 죽고 난 후 실성한 사람처럼 폭풍의 언덕을 헤매이다 병들어 죽고 만다
그의 며느리는 헤어톤과 결혼한다

히드클리프라는 캐릭터는 너무 독특해 쉽게 공감이 가질 않는다
언뜻 생각하면 죽은 캐서린의 딸에게 애정을 가질 것도 같은데 히드클리프는 그녀에게도 폭력을 휘두른다
또 아무리 복수심 때문에 결혼했다고 해도 자기 아들 린튼마저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납득이 안 간다
캐서린을 가장 많이 닮은 힌드레이의 아들 헤어톤을 그나마 총해하지만, 그 역시 하인으로 부릴 뿐 기본적인 교육조차 시키지 않고 화가 나면 그에게도 폭력을 휘두른다
여기 나온 캐릭터들은 요즘 눈으로 보자면 다 성격파탄자들 같다
복수의 화신 히드클리프는 물론이고, 캐서린 역시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을 청순한 여인이 아니라 지극히 이기적인 여자로 나오고, 그녀의 오빠 힌드레이도 아주 폭력적이다
이 두 집안의 불행은 안쇼우씨가 히드클리프를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그는 과연 태생적으로 나쁜 인간일까?

그렇지만 읽는 독자로서는 히드클리프에게 왠지 모를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일단은 그가 주인공이라 나도 모르게 히드클리프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점도 있지만, 복수심에 불타 자신의 인생을 황량하게 만들어 버린 그가 가엾다는 생각도 든다
린튼가를 파멸시키기 위해 캐서린의 딸을 며느리로 맞던 날 히드클리프는 이야기의 화자인 하녀 딘에게 처음으로 고백을 한다
캐서린이 죽던 날 그는 묘지로 찾아가 관을 파헤치고 그녀의 혼을 불러냈다
유령이라도 함께 있어 주길 바란 것이다
그 후 캐서린의 영혼은 18년씩이나 자신을 따라 다닌다고 한다
눈을 감아도 떠나질 않는다
그는 늘 캐서린이 자신을 노려 보고 있어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해 마지 않던 여인의 혼령이 자신을 떠나지 않고 괴롭힌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어쩌면 캐서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 대한 히드클리프의 집착이 캐서린의 유령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식 속에서 도저히 캐서린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히드클리프의 삶은 죽을 때까지 캐서린에게 묶여 있어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그는 소원대로 캐서린의 옆에 묻힌다
죽어서라도 그녀와 통하길 바랬기 때문에 그녀와 자신의 관 뚜껑을 열어 달라고 유언한다

보통 죽음도 갈라 놓지 못하는 사랑이라든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사랑 등은 지고지순하고 애절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히드클리프의 사랑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왜 그녀의 주위를 파괴시키지 못해 안달이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과 그녀의 딸마저도 파멸시키고 저주할 정도로 복수심에 불타는 것일까?
또 그녀에 대한 추억과 사랑이 히드클리프에게 애틋함을 불러 일으키는 게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준다
죽은 영혼이라도 만나고 싶어 관 뚜껑을 열지만 정작 그녀의 유령이 나타난 후 평생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괴로워 한다
결국 더 이상 복수할 대상이 없어져서인지, 히드클리프는 자신의 몸을 학대해 병들어 죽고 만다
지극히 파괴적이고 끔찍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캐서린 옆에 묻히고서야 편한해졌을까?
히드클리프의 유령이 폭풍의 언덕을 떠돈다는 소문으로 미뤄 보면, 캐서린 옆에 잠들고서도 편안한 안식을 취하지 못한 것 같다
지독하게도 끔찍한 사랑의 열정에 휩싸여 죽어서도 편안하지 못한 그의 삶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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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서영심 옮김 / 민중출판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실은 "데미안" 을 오랫동안 못 읽었다
처음 읽어 보려고 시도했을 때 생각보다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손을 놓은 뒤 읽고 싶은 욕구가 안 생겼다
어려운 책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쉽게 접근을 못했다
더구나 헤르만 헤세의 다른 책 "수레바퀴 밑에서" 가 워낙 재미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이 소설 읽으면서 나도 비슷한 내용으로 소설을 썼다 물론 쓰다 말았지만) "데미안" 에 대한 편견이 컸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항상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데미안" 을 집어들 때는 나름대로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막스 데미안은 자의식이 강한 매력적인 남자로 그려진다
자아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라고 할까?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바로 그 사람인지도 모른다
현명하다거나 똑똑하다는 식의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다
착하고 나쁘고를 떠나서 주변 환경에 영향받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책을 계속 읽다 보니 한쪽으로 경도된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꿈꿔 온 바로 그 사람이다
데미안처럼 완전히 나 자신의 머리로만 사고하고 나 자신의 의지로만 행동할 수 있을까?
타인의 감정에 영향받지 않고 주변 환경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그런 주체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의 내면은 얼마나 단단할까?

싱클레어는 사춘기에 방황을 한다
어린 시절은 가족으로 대표되는 밝은 세계에서만 살았지만, 자의식이 생기면서 그는 어두운 세계를 기웃거리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런데도 부모나 교사는 그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방황을 무의미한 일탈로 보고 하루라도 빨리 밝은 세계로 복귀하라고 다그친다
왜 어른들은 아이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이미 그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런 방황들이 무의미 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그 아이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꼭 부모 자식 사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친구간에도 그렇고 부부 사이도 그렇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데미안이 말하는 아프락사스에 대해 생각해 봤다
신이면서도 악마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
신이라고 하면 밝은 세계를 대표하고 정의감과 선의 상징적인 존재다
그런데 신이 악마적 속성을 동시에 갖는다는 게 가능할까?
그렇지만 신이 선한 존재라면 세상의 악은 설명할 길이 없다
신이 세상을 지배한다면서 왜 악한 무리는 살려 둔단 말인가?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신이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프락사스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신이 절대적인 선한 존재는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 것 같다

카인의 표적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카인이 원래는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 사람들이 (즉 아벨의 족속들) 카인을 질투한 나머지 나쁜 사람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인의 표적을 받은 사람은 사람들의 질투를 받지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뛰어난 존재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나 자기가 바로 카인의 표적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카인의 표적은 자아 주체성이 확실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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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4-11-19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미안 읽으셨네요. ^^; 님의 해석대로라면 제가 꿈꾸는 것이 카인의 표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ㅋㅋ

marine 2004-11-19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카인의 표적...^^
 
변신.시골 의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0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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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어렵지는 않았다
"이방인" 도 마찬가지지만 문장이나 내용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평이한 서술이다
그 안에 숨겨진 상징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혹시 카프카는 박홍규의 말처럼 그냥 아무 생각없이 편하게 쓴 건 아닐까?
우리가 지나치게 상징을 부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재 자체는 독특하다
언젠가 이 책의 앞부분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주인공이 벌레로 변하는 걸 보고 꿈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어떻게 사람이 벌레로 변할 수 있겠는가?
혹은 남들은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는데 내가 벌레로 변했다고 주인공 혼자 착각한다고 생각했다
설마 진짜 벌레가 된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카프카는 참 독특한 설정을 한 셈이다

만약 정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벌레로 변하는 것 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상황을 찾자면 갑자기 장애인이 된다거나 감옥에 갇히는 등 식구들에게 짐이 되는 처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문열의 "영웅일기" 에서 빨갱이 남편을 둔 죄로 친정에서도 쫒겨나는 여자의 캐릭터가 있다
그녀는 유일한 피난처로 친정을 찾는데 아버지와 동생이 모두 그녀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가족이 등을 돌릴 정도라면 세상에 자기 편은 하나도 없단 얘기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 경제 활동을 못하고 여동생은 너무 어렸다
그레고르는 자기가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여동생을 음악 학교에 보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그레고르의 직장은 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업체다
그는 출장을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기차를 타야 하는 고달픈 일을 한다
그럼에도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에 그레고르는 몸이 부서져라 일한다
전형적인 한국의 가장들 모습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그는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몸을 가눌 수 없고 걸을 수도 없어 배로 기어다닌다
가족들은 기겁을 하고 그를 방에 가둔다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하려고 하지만 말도 안 통한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처지인가!!
중요한 건 식구들의 태도다
그레고르의 노동력에 기대 살던 식구들은 그를 괴물로 생각하고 가두려고만 한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아닌 벌레라 생각하고 사과를 던져 치명타를 입히기도 한다
가족들은 그를 부끄러워 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결국 하숙생들에게 그레고르의 모습을 들킨 후 그들이 집을 나가 버리자, 가족의 분노는 폭발하고 만다
심지어 그에게 인간적으로 대해 주던 여동생 그레테마저 저 벌레는 오빠가 아니라고 소리친다
만약 진짜 오빠라면 우리가 이렇게 고통받는데 아직도 뻔뻔하게 살아서 이 집을 돌아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사실 그 날 하숙생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바로 그레테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하숙생들은 그레테의 바이얼린 연주를 청했으면서도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지루해 하고 그녀를 무시한다
여동생이 상처받을 것을 걱정한 그레고르는 그녀에게 실망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 모습을 들키고 만 것이다
물론 그레고르의 이 마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결국 그레고르는 그 날 숨을 거둔다
자살했는지 굶어 죽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죽고 나자 가족들은 죽은 벌레 대하듯 그의 시체를 치운다
그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다

이 단편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던 그레고르의 비극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했다
여동생을 음악 학교에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일 정도로 가족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가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고 끔찍한 벌레로 변하자 가족은 그를 외면한다
대체 그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일했단 말인가?
가족이란 가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거라 믿었는데, 그것은 그저 당위일 뿐일까?
만약 장애인이 됐다면 그레고르를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은 기본적인 양심과 가치관을 가진 정상적인 집단이었다
그렇지만 벌레로 변한 아들을 여전히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일단 그 혐오감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벌레로 변할 만큼의 충격적이고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이것을 사랑으로 감쌀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벌레로 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레고르는 가족에게 버림받음으로써 가장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혹시 그는 자기 가족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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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4-11-19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매번 읽어야지 읽어야지하면서 또 방치해둔 작가...

ㅡㅡ;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패자가 되는 카프카. 나중엔 꼭 읽어야지.

marine 2004-11-19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서 멋진 리뷰 부탁드려요^^
 
오만과 편견 밀레니엄 북스 31
제인 오스틴 지음, 성기조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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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결론은 다소 실망스럽다
솔직히 재밌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18세기 영국 사회의 결혼 풍속도를 엿보는 재미는 있다
그 당시 시대상을 알려면 소설책을 읽으라는 말은 이 책에 딱 들어맞는다
왜 이 책이 고전이 됐을까?
겨우 21세 때 초고를 쓴 후 36세 때 출간하기까지 여러 번 수정 작업을 거쳤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통속 소설과 고전과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있는 것 같다
젊은 여자 작가의 가벼운 애정 스케치라고 해야 하나?
물론 지나치게 통속적인 줄거리 따위는 없다
그런 담백한 점이 마음에 들기는 하다
그렇지만 고전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 나에게, 이런 가벼운 필체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위대한 개츠비" 나 "이방인"  혹은 "파리 대왕" 처럼 현대 소설들은 장중한 문체로 승부를 내지 않나 보다
소설의 내용 뿐 아니라 문체도 중요하다고 보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이런 가벼운 문체에는 감동하기 힘들 수 밖에...

엘리자베드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다
언니 제인은 착한 여자 컴플렉스에 걸렸거나 아니면 너무 순진해서 사람을 무조건 좋은 쪽으로만 보는, 어찌 보면 좀 답답한 여자다
막내 리디아는 열 다섯에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간 어처구니 없는 여자애다
로미오와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 줄리엣이 겨우 열 세살이었다고 하지만, 18세기 영국에서 15세면 결혼해도 괜찮은 나이였나 보다
오래 못 살아서 조혼이 유행했을까?
그러고 보면 이들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나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학교가 생긴 게, 혹은 학교에 당연히 다닌다는 개념이 생긴 게 얼마 안 됐나 보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200년 전인데도 소설에는 학교라는 교육 기관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긴 우리나라로 치면 영,정조 시대니까 지금과 다른 게 당연하긴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도 참 옛날 이야기다
서양 소설은 근대 소설이라고 해도 왠지 현대 소설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다
서구식으로 현대화가 진행되서 그런가?
영정조 시대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오만과 편견" 이 이 정도의 현대성을 갖는 것도 신기한 일이긴 하다
당시 써진 우리 고전 소설은 아예 공감 자체가 안 되니까 말이다

결혼은 정말 사회적 결합인가 보다
하긴 두 사람만의 사랑이 전부라면 굳이 결혼이라는 복잡한 예식을 치룰 필요도 없다
연애와 결혼이 별개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다는 말은 명백히 무책임한 얘기다
본성에 어긋나지만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 있는 파트너들을 포기하고 한 사람과 평생 살겠다고 만인 앞에서 서약하는 게 아닌가?
연애 결혼이란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생긴 새로운 결혼 제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 소설을 보면 재산과 신분, 영향력 있는 친척 등 결혼의 외적 조건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심지어 가장 분별력 있게 그려진 주인공 엘리자베드 역시 위캄이 청지기의 아들이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와의 결혼을 쉽게 고려하지 않을 정도다
위캄이 리디아를 데리고 도망간 것은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지참금을 얼마 정도 가져 오면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그 액수가 적은 것에 감격한다
너무 어이가 없어 당황스럽기까지 한 내용이었다
딸을 데리고 도망간 것도 황당한데, 감히 지참금을 요구하다니!
그런데 가족이란 사람들은 그 지참금이 적다고 횡재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설정이다
여자는 지참금을 들고 오고, 남자는 평생 그녀를 먹여 살리는 일종의 계약이었나 보다

지참금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온다
평범한 가문의 딸인 엘리자베드는 지참금을 많이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남자들이 자기와 결혼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돈과 사랑에 대한 함수 관계는 비단 요즘의 문제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다섯 딸의 어머니 베네트 여사는 속물 중의 속물로 나온다
그녀는 제일 예쁜 큰 딸 제인을 부자인 빙리와 결혼시키려고 애쓰고 막내 리디아가 위캄과 도망갔을 때도 지참금을 적게 요구한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기뻐한다
부유한 다아시가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싫어하지만 둘째 엘리자베드에게 청혼한 사실을 알고 얼마나 큰 횡재를 했냐고 금방 자세를 바꾼다
다아시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어머니를 엘리자베드는 한심하게 쳐다 본다
혹시 사윗감을 계속 싫어하면 어쩌나 고민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 베네트씨는 좀 낫다
엘리자베드가 콜린즈에게 청혼받았을 때 비록 그가 부자지만 인격이 형편없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사실 그 집안의 땅은 베네트가 죽고 나면 콜린즈에게 상속될 예정이었으므로 베네트 여사는 엘리자베드에게 청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베필이라고 승낙을 거부한다
부자인 다아시가 청혼했을 때도 평소 그녀가 그의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던 걸 기억하고서, 넌 네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충고한다
이 정도 분별력을 가진 부모라면 자식이 존경할 만 하다
그렇다고 베네트 여사가 자식 앞날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다소 속물적이긴 한데, 베네트 여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결혼이란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일생을 편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사윗감을 볼 때 재산을 최우선시 할 뿐이다
저자 역시 베네트 여사를 나쁘게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철이 좀 없다는 식으로만 얘기한다
당시 가치관이 결혼은 돈과 지위와 신분을 보고 한다는 관념이 강했던 것 같다

빙리와 제인이 맺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빙리가 일방적으로 마을을 떠난 후 둘의 관계가 끊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랬다
점잖게 묘사된 빙리가 실은 난봉꾼으로 제인을 데리고 논 건가?
아니면 숙녀에 대한 단순한 호의를 제인이 오해한 건가?
빙리의 여동생은 제인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정작 그녀 대신 부자인 다아시의 여동생과 오빠가 맺어지길 노골적으로 제인에게 말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쩌면 친구로서 제인은 좋지만, 올케로서는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제인이 아름답고 착하지만 돈이 없으니까 오빠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엘리자베드는 그녀의 위선을 간파하고 교제를 끊으라고 하지만,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제인은 빙리와 헤어지더라도 그의 동생과는 계속 좋은 관계를 맺길 원한다
또 나중에 둘이 결혼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제인은 막연히 시누이와의 관계가 좋아지리라 믿어 버린다
도대체 이 소설에는 복잡할 게 없다
원래 당시 사교계가 왠만한 것은 이해하는 분위기였는지, 아니면 오스틴 자체가 복잡한 갈등 구조를 싫어하고 주변 상황에 크게 상심하지 않는 캐릭터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건 마음에 든다
일반적으로 갈등 구조 유발을 위해 등장 인물간의 지나친 신경전이 벌어지곤 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참 담백하다
엘리자베드는 자신에게 좋은 과거만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다아시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원래 잊고 싶어 하는 거라고 답한다
마음에 드는 문답이다
엘리자베드는 다아시의 이모인 드 버그 부인에게 당당히 맞선다
사촌간의 결혼도 흔했는지 (하긴 찰스 다윈도 사촌 동생과 결혼했다) 그녀는 자기 딸과 다아시를 맺어 주려고 한다
자매끼리 서로 자기 자식을 맺어 주자고 약속하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진다
우리도 사촌끼리 결혼할 수 있다면 가족의 범위가 훨씬 더 확대될텐데...
드 버그 부인은 감히 너 같은 게 다아시의 베필이 될 수 없다고 모욕을 주지만, 엘리자베드는 전혀 기죽지 않고 다아시가 선택할 문제라고 대꾸한다
결혼 문제가 나오기 전,드 버그 부인의 화려한 저택에 초대받았을 때도 엘리자베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부잣집 풍경을 즐긴다
가정 교사가 없어서 안됐다는 부인의 말에 배울 건 다 배웠다고 아무 모욕감 없이 말하는 그 여유라니!!
대단한 후원인을 얻었다고 드 버그 부인을 하늘 같이 받으는 콜린즈와 왜 이렇게 비교되는지, 그녀가 콜린즈를 택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만약 우리나라 소설이나 드라마였으면 드 버그 부인이 결혼을 방해할 것이고 다아시는 이모를 설득하기 위해 괴로워 할 것이다
대체 성인인 다아시가 왜 이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데도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극적 갈등 구조를 위해 사실은 별 영향력도 없는 가족의 허락을 얻기 위해 애를 쓴다
다아시는 결혼한다는 편지 한 장을 드 버그 부인에게 보내므로써 간단히 해결한다
이게 정상 아닌가?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다들 마마보이 같다
성인이면서도 자기가 선택한 결혼을 책임지지 못하는 어린애들 같다
물론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억지로 설정한 거겠지만 말이다
(일본 드라마는 아예 가족은 등장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청춘물에 출연하는 배우 수도 적고 횟수도 아주 짧다고 한다 산뜻하게 남녀 간의 사랑에만 집중한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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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 마로니에북스 35
미시마 유키오 지음 / 청림출판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예상 외로 재밌는 책이었다
제목이 좀 고리타분 하고 미학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지루할 거라 생각했는데, 왠걸 문장력이 장난 아니다
아주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하긴 1956년에 발표한 책이니 현대적인 게 당연하지
제목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이 소설이 아주 옛날식 문장일 거라 생각했다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로부터 문장력이 훌륭하다는 칭찬과 함께 문단에 추천됐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이문열의 소설을 보는 기분이다
문득 이 소설가가 꽤 잘 생겼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본 가서 금각사를 봤는데 아주 멀리 떨어져서 봤다
연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형태만 봤다
1950년에 절에 사는 어린 스님이 커플끼리 절에 놀러 오는 거 보고 질투심을 느껴 금각사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 후로 아예 접근을 통제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 멋진 절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생각만큼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금각사" 라는 소설 때문인지 왠지 모를 신비감을 주는 절이었다
아빠가 "금각사" 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책을 읽지 않은 나도 덩달아 감동하면서 절을 봤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나"는 스님인 아버지에게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깅가쿠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말더듬이라는 불구를 안고 살았기 때문에 친구도 없었고 자신의 불완전한 육체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대신,  깅가쿠지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환상을 품고 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깅가쿠지의 주지에게 도제로 맡겨진다
어머니는 그가 노사의 눈에 들어 깅가쿠지의 주지가 되길 바란다
"나"는 어머니를 혐오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기 집에 얹혀 살던 친척과 관계 갖는 걸 본 까닭이다
그 장면은 아버지도 목격했는데 아버지는 어린 "나"의 눈을 가린 채 그 일을 묵과한다
폐결핵 환자였던 아버지로서는 젊은 아내의 육욕을 만족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대학에서 만난 가시와기다
그는 안짱 다리라는 불구를 안고 살지만 (아마도 선천성 고과절 탈구증일 것 같다 어린 시절 수술해 줬어야 하는데 부모의 방치로 평생 불구가 됐다는 말로 미루어 봐서) 자신의 불구를 동정의 대상으로 삼아 여자를 끌어 들일 만큼 노회하면서 또 독설가이기도 하다
문득 가난하면 선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던 니체가 생각난다
가시와기는 같은 불구라는 점 때문에 동지 의식을 느끼고 접근한 "나"에게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 준다
자기 불행을 직시하는 것, 혹은 남의 결점에 대해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것, 대단한 베짱과 뻔뻔함이 아닐 수 없다
왠지 그의 삶이 비틀렸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오히려 비틀린 사람은 말더듬이라는 결점을 숨기려 했던 "나" 로 드러난다
가시와기는 불구라는 점을 이용해 연애를 걸 만큼 어찌 보면 삶에 대해 도전적인 자세를 잃지 않지만, "나"는 결국 마음으로부터 극복하지 못하고 금각사에 불을 지르고 마니까

가시와기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던진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한다
깅가쿠지에 불을 지를 "나"의 마음을 읽은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충고를 던진다
아마도 "내"가 인식 대신 행위에 의존할 거라는 느낌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가시와기는 "나"와 도제 생활을 함께 하던 쯔루가와가 보낸 편지들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쯔루가와는 가시와기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쯔루가와를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상처가 없는 영혼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는 놀라운 고민을 불구자인 쯔루가와에게 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쯔루가와는 말더듬이인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만, 가시와기의 독설을 싫어해 그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가시와기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인생의 통찰력 면에서 가시와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가시와기의 인간성 자체는 경멸하지만 연애 상담 면에서만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행위 대신 인식을 바꾸라는 가시와기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 "행위" 를 실행하고 만다
자살을 한 것이다

가시와기는 독특한 캐릭터다
그는 불구인 신체를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결점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다
자기 결점을 똑바로 바라보고 남에게도 아무 감정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뻔뻔해진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상대의 결점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미 나 자신의 결점을 세상에 까발릴 수 있는 베짱이라면 거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는 놀랍게도 그 불구인 다리를 이용해 여자를 꼬신다
아마 생긴 건 잘났을 것이고 말도 잘했을 것이다
말솜씨와 얼굴을 이용해 접근한 후 여자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그는 여자와 즐긴 후 미련없이 차 버림으로써 자신이 여자에게 매달릴 수도 있는 비참한 상황을 모면한다
오래 사귀게 되면 여자가 질릴 것이고 더 이상 동정심을 써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일탈을 시도하기 위해 돈을 빌릴 때도 선선히 꾸어 주지만, 차용 증서까지 쓰게 한다
"나"를 친구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마도 누구에게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가타와시는 인생을 냉정한 눈으로 보는 만큼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감정 따위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솔직히 "나"에게 계속 이자와 원금을 요구하는 걸 보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너 역시 잘난 척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인간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노사에게 돈을 받아낸 후 "나"에게 인식과 행위의 차이를 충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그의 그릇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는 인생에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 같다

절의 주지 스님인 노사에 관한 묘사도 인상 깊었다
일본의 중들은 결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관계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
노사는 독신이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해야 한다
어머니는 "내"가 노사의 후계자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정작 "나"는 노사를 경멸한다
사실 노사의 모습은 일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일 수 있다
종교적인 지위를 이용해 절이나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시주받은 돈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는 모습!!
종교인이라는 말 자체가 직업을 의미한다면 어쩔 수 없는 현상 아닌가
노사는 결혼을 하지 않은 대신 술집 여성들을 끼고 논다
"나"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위선적인 노사를 마음으로부터 경멸하지만 그의 총애를 받아야 후계자가 될 수 있다
이 갈등을 괴로워 하다가 결국 "나"는 노사가 데리고 논 술집 여자의 사진을 노사에게 보내질 않나, 대학 수업을 빠지질 않나 어떻게 해서든 일탈을 저지르려고 애쓴다
완전히 눈 밖에 나버려야 일말의 기대마저도 포기할 것 같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만약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주지가 되라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어머니를 증오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기대로부터 훨씬 자유로웠다

"나"는 한 때 노사를 죽일 생각도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내 손으로 해치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절대미의 존재가 아니므로 불태울 가치조차 없다
반면 금각사라는 건축물은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미의 상징이므로 불태울 가치가 있다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금각사를 불태우면서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가 죽으려고 했으나 불행히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계획을 바꿔 산으로 도망치고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면서 살아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충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진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반면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난 후 충동감이 해소되면 그 때부터는 현실을 직시하고 살 궁리를 찾게 된다
주인공 역시 절대미의 상징인 금각사를 불태울 때까지만 해도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막상 그 절이 사라져 가자 현실을 깨닫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주인공은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자위대의 결성을 외치며 할복 자살한 저자의 특이한 이력과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절대미의 세계에 집착하는 저자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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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12-0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토에 갔을때 금각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너무 금칠을 해놔서 ...영.

미시마 유키오의 전력에 대한 편견땜에 그의 책은 한권도 본적이 없습니다.님의 리뷰에 깐깐한 별점 평가를 유추해볼때 다섯은 상당히 좋은 책이 아닐까 하는데 .. 관심이 아주 많이 가는군요.잘봤습니다.

marine 2004-12-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아주 인상깊게 본 소설입니다 전 일단 작가는 문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미려한 문장이 돋보인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각사로 대표되는 절대미, 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의 추구, 이런 것들이 잘 어우러져 있답니다 재밌는 소설입니다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