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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6월
평점 :
처음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뉴욕 3부작"에서 폴 오스터가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The Fly"라는 영화의 원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결론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책을 몇 장 읽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데, 도대체 진지한 맛이 없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처럼 어린애들 난파당한 얘기를 그저 가볍게 스케치 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애들 이야기라서 그런지 사건 전개나 문장들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게 읽어 나가다가 해설을 먼저 봤는데, 역시 내 이해력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역자의 해설이 없었다면 (그런데 이 역자는 "호밀밭의 파수꾼"도 번역했다 나는 이 사람이 번역한 책을 읽었는데 솔직히 번역 자체는 아주 매끄럽지만은 않다), 나는 이 위대한 우화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만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윌리엄 골딩이 영미 문학권의 가장 중요한 작가임은 분명하나, 그것은 지식인 계층에 한정되어 있을 만큼 일반인에게는 난해하다고 한다
문장이나 작품 구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비유로 사용하는 장치들의 상징성을 일반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여기 등장하는 소라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패각 민주 정치를 의미한다고 한다
어설프게 대의 민주주의를 표명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평론가들의 해설이 없으면 정확한 의미 파악은 힘들다
이 소설은 골딩의 첫 데뷔작인데 (원래 그는 고대 영시를 연구했다고 한다) 처녀작이 노벨상 수상작으로 결정될 만큼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학교 교사였던 골딩은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자연 상태로 돌아가면 자유를 만끽하며 착한 인간의 본성대로 살 것이라 믿었던 루소나, 어린 아이의 마음은 백지와 같다던 로크의 말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은 사실 폭력적이고 악하다는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잔혹성에 치를 떨 것이다
또한 원래 인간은 도덕적이고 착한 존재라는 당위성에도 의혹을 품는 게 당연하다
골딩은 인간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합리적인 존재라는 신화를 깨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산호섬"이라는 소설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산호섬"의 대강의 줄거리를 살펴 보면, 영국 소년들이 어떤 섬에 표류되는데 식인종들에게 민주주의를 심어 주고 기독교를 전파해 그들을 문명인으로 교화시킬 만큼 훌륭하게 대영제국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 대영제국 국민이라는 타이틀 만큼 편견 가득한 것도 드물 것이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토착인들을 개화시킨다는 환상에 찬 영국인들은, 자신들을 합리적인 근대인으로 보고 토착인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했다
영국인이었던 골딩은 이 어리석은 환상에 일침을 가한다
그는 "산호섬"에서 멋지게 민주주의를 구현했던 잭과 랠프라는 인물을 똑같이 자기 소설에도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야만인으로 변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인도에 처음 표류했을 때, 잭은 당당하게 "우리는 영국 시민들이야,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조될 무렵, 형편없는 야만인으로 변해 있는 그들을 보고 해군 장교는 한심하단 듯 되뇌인다
"너희가 영국 소년들이라면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줬어야 하는데..."
이 말이야 말로 영국 시민의 합리성에 찬사를 보내는 "산호섬"의 저자에게 보내는 일갈일 것이다
이 소설의 두 축은 폭력적 권위주의와 합리적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잭과 랠프이다
소라를 발견한 뒤 그것을 불어 섬에 표류된 아이들을 불러 모은 랠프는 대장으로 선출된다
말하자면 합법적인 우두머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성가대의 대장이었던 잭은 투표로 뽑힌 랠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표류되기 전부터 성가대원들을 지휘했었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섬에 표류된 이후에는 그들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성가대원이 다수가 아닌 상황에서 선거로 뽑힌 랠프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며 랠프의 지도력을 흔든다
표류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봉화를 피워 구조를 받는 일이다
랠프는 봉화 피우는 일에 아이들의 역량을 집중하려고 한다
반면 잭은 자기가 잘 하는 멧돼지 사냥을 우선 순위에 둔다
사실 잭의 행동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랠프의 말대로 아무리 멧돼지 고기를 배터지게 먹는다고 해도, 구조되지 않으면 평생 섬에 갇혀 살아야 할 것이다
잭 역시 봉화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랠프의 지휘를 받아야 하고 또 자기가 잘 하는 것은 멧돼지 사냥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에 매짆고 싶었을 것이다
랠프는 봉화를, 잭은 사냥을 외치며 결국 둘은 분열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가 새끼 돼지다
새끼 돼지는 천식을 앓고 있는 뚱뚱이로, 외모 때문에 이름 대신 "새끼 돼지"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이성과 좋은 머리를 지녔다
더군다나 그의 안경은 봉화를 피울 수 있는 발화점을 제공한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문명 세계가 아닌 자연 상태에서, 체력이 약한 새끼 돼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한다
결국 그는 잭의 패거리에게 둘러싸여 로저라는 잔인한 아이가 굴린 바위에 맞아 끔찍한 죽음을 당한다
만약 그가 문명 사회에서 살았다면 머리가 좋기 때문에 출세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치명적인 약점인 천식이나 심한 근시 등도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연 상태의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발언권을 얻고 싶으면 소라를 집어 들고, 소라를 들고 있는 한 그 말을 제지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누구보다 신봉했던 새끼 돼지는, 자신의 안경을 강탈해 간 잭의 무리에게 소라를 들고 찾아갔다가 소라처럼 처참하게 으깨진다
이거야 말로 민주주의의 참담한 파괴가 아닌가
"넌 소라에 미쳤구나 누구에게나 발언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발상인 줄 알아? 이제 힘있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는 게 옳다는 사실을 너도 깨닫지 않았니? 이 따위 소라는 필요없다고!!"
잭은 민주주의의 비능률적임을 지적하고, 소수에 의한 다스림을 주장한다
사실 그가 능력있는 사람이란 합리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려운 상황이 되면 호전적인 사람이 주도권을 잡듯, 거칠고 폭력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할 인물이며, 무리를 지배해야 한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잭의 폭력성을 지도력이라 착각하고 구조되기 위한 봉화는 버려둔 채, 그가 제공하는 멧돼지에 열광한다
잭과 그의 패거리들은 온 몸에 진흙을 바르므로써 부끄러움을 잊고 폭력성과 잔인함을 떳떳하게 드러낸다
광기에 휩싸인 춤을 추는 동안, 그들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가엾은 동료 사이먼을 짐승으로 착각해 죽이고 만다
그가 동료임을 곧 알아차렸으나, 한 번 광기에 빠진 이들은 계속 피를 원하고 결국 멧돼지 사냥하듯 끔찍하게 때려 죽이고 만다
이 사이먼이야 말로 작가의 주제 정신이 응집된 인물이다
섬세한 감성을 지녔으나 새끼 돼지처럼 합리적인 사이먼은, 아이들을 공격할 짐승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착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혼자 숲으로 들어간다
(잭은 짐승의 실체를 믿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역시나 짐승의 실체는 낙하하다 바위에 걸려 죽은 조종사의 시체였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려 주려 잭의 무리에게 달려 갔다가 어이없이 짐승으로 오인되어 죽은 것이다
사이먼은 잭이 사냥한 멧돼지의 시체에 달라붙은 파리떼를 본다
파리떼의 대왕은 사이먼에게 속삭인다
"너희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나 때문이다, 나는 너희의 일부다"
"나"라는 것은 인간의 파괴적이고 잔인한 본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일반적인 표류기라면, 특출난 능력을 지닌 착하고 합리적인 지도자가 선출되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고난을 헤쳐 나가기 마련인데, "파리대왕"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우리의 숨겨진 본성을 그려낸다
랠프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도자로 나오지만, 그는 힘이 없고 또 천성적인 도덕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폭력 세력을 제압할 능력도 없고, 무리에게 고기를 제공할 수도 없으며, 그의 핵심 브레인이던 새끼 돼지를 같이 놀리는 평범한 소년일 뿐이다
랠프의 캐릭터만 봐도 이 소설의 치밀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우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소설은 절대 어렵거나 복잡하게 말하지 않는다
야만 상태에서 인간의 합리성과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소년들 수준에서 쉽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상징성을 제대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리 훌륭한 주제를 담은 우화라 할지라도 그 묘사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권선징악식의 진부한 양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역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동의하는 바다
이문열의 단편 중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원시 시대의 평등한 부족 사회에서 권력 구조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그린 소설이다
그 때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의 관찰력에 감탄했는데, 이 소설과 비교해 보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독자에게 가르치려 하므로써 해석의 여지가 적다는 느낌이 든다
역자는 본질적인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배제시키고 일부러 현실과 가장 먼 설정을 따르는 골딩의 치열한 작가 정신을 높이 샀는데,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탁월함이 바로 그런 데서 나와지 않나 싶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날마다 부딪치는 주변의 현실에만 골몰하는 우리나라 작가들에 대한 역자의 아쉬움을 이해하는 바다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잔인함과 폭력성의 실체에 대한 위대한 작품을 읽고 싶다면, 꼭 한 번 일독하라 권하고 싶다
더불어 역자의 작품평도 나 같은 평범한 독자의 이해력을 높히는데 훌륭한 기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