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1
알베르 까뮈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이라고 하면 일단 겁부터 집어 먹고 긴장하기 마련이다

베스트셀러야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대목이 나오면, 형편없는 책이라고 깍아 내려도 별 문제 없지만, 고전이 재미없으면 그건 곧 나의 독서 수준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일이라, 지루하고 하품이 나와도 기를 쓰고 읽게 된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러시아 문호들의 걸작들을 접할 때는 더욱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까뮈의 "이방인"은 아주 평이하고 쉬운 문체로 쓰여졌고 분량도 200페이지가 채 못 된다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짧은 중편 소설이다

부조리의 대명사 까뮈가 이렇게 쉬운 소설을 쓰다니, 훌륭한 소설이란 어렵게 쓴다와 등식이 아님을 새삼스레 느꼈다

(오히려 까뮈를 해석하는 비평서들이 더 어렵다 박홍규의 말처럼 원래 평론가란 쉬운 걸 어렵게 설명해야 먹고 사는 직업인 모양이다)

 

이방인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해 익히 알고 있었다

햇빛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태양이 눈부셔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는 뫼르소의 심리 상태가 길게 늘어질 줄 알았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사변적인 독백 같은 건 없다

오히려 깔끔하고 담백한 느낌이다

박홍규는 햇빛 때문에 죽은 불쌍한 아랍인에 대해서는 일말의 논평도 없다고 까뮈의 식민 지배자 근성을 비판하지만, 여기서 아랍인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다

그는 다만 누군가를 죽였을 뿐이고, 배경이 알제리다 보니 거기 사는 아랍인이 희생자가 됐을 뿐이다

 

뫼르소라는 독특한 느낌의 주인공은 어머니가 양로원에서 죽은 뒤,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관리인과 담배를 피웠으며 밀크 커피도 얻어 마셨다

(나중에 검사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어머니 장례식에서 밀크 커피는 사양해야 마땅하다고 논평했는데, 마치 밀크 커피가 술과 비슷하게 취급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우스웠다)

더구나 그 다음 날 여자 친구인 마리와 정사를 나누고 영화를 보러 갔다

담당 검사는 그들이 본 영화 프로그램까지 조사했는데, 비극도 아니고 하필이면 코미디 영화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부모가 죽은 다음 날 코미디 영화를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비극적인 영화를 보면 용서가 된단 말인가?)

 

사실 뫼르소의 살인이 완전히 우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느닷없이 지나가는 아랍인을 쏜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상황 설명이 가능하다

뫼르소의 옆집에 레몽이라는 남자가 사는데, 아랍 여자의 생활비를 대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기 몰래 딴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에 격분한 레몽은 뫼르소에게 부탁해 거짓 편지를 써서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유혹한 후, 거기서 폭행을 가한다

뫼르소는 이 일로 경찰에까지 출두한다

레몽이 뫼르소와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아랍 여인의 오빠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레몽을 가격한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 레몽은 뫼르소에게 권총을 맡기는데, 그 무리 중 하나가 해변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다

강렬한 햇빛 때문에 괴로워 하던 뫼르소는 태양을 등지기 위해 아랍인에게 다가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랍인은 칼을 휘두르고 그는 권총을 발사한다

어찌 보면 정당 방위로 설명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뫼르소라는 남자가 자신의 일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설사 생명과 연관된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타인의 일인냥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아랍인이 칼을 휘둘러 권총을 발사했다는 주장 대신, 뫼르소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자기도 모르게 쏘고 말았다는 어이없는 속마음을 얘기한다

사실 이런 충동은 살면서 가끔 느낄 수 있다

나 역시 햇빛에 아주 민감한데, 살인 충동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강렬한 햇빛을 피하지 못할 때는 자제력을 잃곤 한다

이건 단순히 태양에 국한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설사 이런 이유에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애써야 하는데, 뫼르소는 자신에 대한 변호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삶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허무주의자인가?

파리 전근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변화를 싫어하긴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는 세상에 대해 무심하다

어머니가 죽은 후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얻어 마신 것도 다만 자신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슬프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이미 죽은 분을, 통곡한다고 살려 낼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는 사랑을 믿지도 않는 것 같다

마리가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만, 또 결혼하자고 했을 때 선선히 승낙한다

어쩌면 그는 삶에 대한 기대감이 지나치게 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멋진 수도 파리로 옮기라는 제안을 거부하는 뫼르소를, 사장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어디에 있든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사는 건 어디서나 똑같은 거라고 되뇌이는 뫼르소는 삶에 대한 기대치가 거의 없다고 여겨진다

즉 어떤 선택을 하든 더 나이질 것도 나빠질 것도 없고, (그러므로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고) 살기 위해 바둥거린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이 까뮈를 허무주의자로 오인하는 부분인 것 같다)

 

그래서 뫼르소는 상고를 거부하고 담담히 죽음을 맞는다

상고를 해서 이긴다 할지라도 영원히 사는 건 아니다

몇 십년 후에 죽으나 며칠 후에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또 그는 신부의 구원도 거절한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죽으면 내세가 있으므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신부의 논리를, 뫼르소는 비웃는다

그는 비록 얼마 안 가 죽을테지만, 당신보다는 삶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부르짖는다

 

만약 내가 사형 언도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뫼르소처럼 행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삶에 대한 희망은 더욱 놓치기 어려운 법이다

혹은 세속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영생이라도 얻어 보자고 종교에 매달리기 쉽다

그러나 뫼르소는 독방 안에서 어떻게 긴 시간을 보낼 것인가를 고민할 따름이다

그는 세상을 통달한 사람은 아니지만 삶이라는 게 강렬한 애착 관계를 형성할 만한 건 못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랍인을 살해한 것과 어머니 죽음에 초연한 것을 연관짓는 검사의 논리는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아마도 검사는 피고가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악독한 성품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에도 섹스를 벌이는 놈 따위가 사람 하나 죽이는 게 뭐 어렵겠느냐, 이런 놈은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으므로 사회가 죽여줘야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사실 주위를 둘러 보면 이런 어이없는 인과 관계가 자주 형성된다

사람들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끼워 맞추길 좋아한다

그래야 재밌는 이야기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한 주부가 투신자살 하면, 얼마 전 그녀가 쌍거풀 수술이 잘못되서 비관했다는 이웃의 말이 나오는 순간 그녀는 외모 컴플렉스 때문에 희생된 불쌍한 여자로 전락한다

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외모 지상주의에 물들어 있는가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논평이 길게 이어진다

그래서 죽기 전 왜 죽는가를 밝히는 유서를 쓰는 모양이다

 

소설의 전개는 참으로 담백하고 가볍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감정의 과장이 없어 부담스럽지 않다

왜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는지, 애인 마리를 왜 사랑하지 않는지, 왜 아랍인을 쐈는지, 사형 선고 이후 왜 상고하지 않는지 등에 대한 장황한 설명없이 그저 담담하게 1인칭 시점으로 순간순간의 기분을 서술할 뿐이다

삶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혹은 원래 세상이란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곳이란 것을 깨달은 한 젊은이의 의식의 흐름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잘난 척 하지도 않으며 삶을 아주 포기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일상에 대한 기대가 적을 뿐이다

뫼르소가 옆집 친구의 어이없는 치정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타인이나 인생의 여러 사건들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의 낭비없이 단순하고 명료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조차 삶의 본질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알만 하지 않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대왕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뉴욕 3부작"에서 폴 오스터가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The Fly"라는 영화의 원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결론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책을 몇 장 읽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데, 도대체 진지한 맛이 없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처럼 어린애들 난파당한 얘기를 그저 가볍게 스케치 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애들 이야기라서 그런지 사건 전개나 문장들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게 읽어 나가다가 해설을 먼저 봤는데, 역시 내 이해력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역자의 해설이 없었다면 (그런데 이 역자는 "호밀밭의 파수꾼"도 번역했다 나는 이 사람이 번역한 책을 읽었는데 솔직히 번역 자체는 아주 매끄럽지만은 않다), 나는 이 위대한 우화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만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윌리엄 골딩이 영미 문학권의 가장 중요한 작가임은 분명하나, 그것은 지식인 계층에 한정되어 있을 만큼 일반인에게는 난해하다고 한다

문장이나 작품 구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가 비유로 사용하는 장치들의 상징성을 일반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여기 등장하는 소라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패각 민주 정치를 의미한다고 한다

어설프게 대의 민주주의를 표명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평론가들의 해설이 없으면 정확한 의미 파악은 힘들다

 

이 소설은 골딩의 첫 데뷔작인데 (원래 그는 고대 영시를 연구했다고 한다) 처녀작이 노벨상 수상작으로 결정될 만큼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학교 교사였던 골딩은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자연 상태로 돌아가면 자유를 만끽하며 착한 인간의 본성대로 살 것이라 믿었던 루소나, 어린 아이의 마음은 백지와 같다던 로크의 말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은 사실 폭력적이고 악하다는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잔혹성에 치를 떨 것이다

또한 원래 인간은 도덕적이고 착한 존재라는 당위성에도 의혹을 품는 게 당연하다

골딩은 인간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합리적인 존재라는 신화를 깨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산호섬"이라는 소설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산호섬"의 대강의 줄거리를 살펴 보면, 영국 소년들이 어떤 섬에 표류되는데 식인종들에게 민주주의를 심어 주고 기독교를 전파해 그들을 문명인으로 교화시킬 만큼 훌륭하게 대영제국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 대영제국 국민이라는 타이틀 만큼 편견 가득한 것도 드물 것이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토착인들을 개화시킨다는 환상에 찬 영국인들은, 자신들을 합리적인 근대인으로 보고 토착인들을 야만인으로 생각했다

영국인이었던 골딩은 이 어리석은 환상에 일침을 가한다

그는 "산호섬"에서 멋지게 민주주의를 구현했던 잭과 랠프라는 인물을 똑같이 자기 소설에도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야만인으로 변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인도에 처음 표류했을 때, 잭은 당당하게 "우리는 영국 시민들이야,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조될 무렵, 형편없는 야만인으로 변해 있는 그들을 보고 해군 장교는 한심하단 듯 되뇌인다

"너희가 영국 소년들이라면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줬어야 하는데..."

이 말이야 말로 영국 시민의 합리성에 찬사를 보내는 "산호섬"의 저자에게 보내는 일갈일 것이다

 

이 소설의 두 축은 폭력적 권위주의와 합리적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잭과 랠프이다

소라를 발견한 뒤 그것을 불어 섬에 표류된 아이들을 불러 모은 랠프는 대장으로 선출된다

말하자면 합법적인 우두머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성가대의 대장이었던 잭은 투표로 뽑힌 랠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표류되기 전부터 성가대원들을 지휘했었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섬에 표류된 이후에는 그들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성가대원이 다수가 아닌 상황에서 선거로 뽑힌 랠프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며 랠프의 지도력을 흔든다

표류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봉화를 피워 구조를 받는 일이다

랠프는 봉화 피우는 일에 아이들의 역량을 집중하려고 한다

반면 잭은 자기가 잘 하는 멧돼지 사냥을 우선 순위에 둔다

사실 잭의 행동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랠프의 말대로 아무리 멧돼지 고기를 배터지게 먹는다고 해도, 구조되지 않으면 평생 섬에 갇혀 살아야 할 것이다

잭 역시 봉화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랠프의 지휘를 받아야 하고 또 자기가 잘 하는 것은 멧돼지 사냥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에 매짆고 싶었을 것이다

랠프는 봉화를, 잭은 사냥을 외치며 결국 둘은 분열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가 새끼 돼지다

새끼 돼지는 천식을 앓고 있는 뚱뚱이로, 외모 때문에 이름 대신 "새끼 돼지"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이성과 좋은 머리를 지녔다

더군다나 그의 안경은 봉화를 피울 수 있는 발화점을 제공한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문명 세계가 아닌 자연 상태에서, 체력이 약한 새끼 돼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한다

결국 그는 잭의 패거리에게 둘러싸여 로저라는 잔인한 아이가 굴린 바위에 맞아 끔찍한 죽음을 당한다

만약 그가 문명 사회에서 살았다면 머리가 좋기 때문에 출세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치명적인 약점인 천식이나 심한 근시 등도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연 상태의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발언권을 얻고 싶으면 소라를 집어 들고, 소라를 들고 있는 한 그 말을 제지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누구보다 신봉했던 새끼 돼지는, 자신의 안경을 강탈해 간 잭의 무리에게 소라를 들고 찾아갔다가 소라처럼 처참하게 으깨진다

이거야 말로 민주주의의 참담한 파괴가 아닌가

 

"넌 소라에 미쳤구나 누구에게나 발언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발상인 줄 알아? 이제 힘있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는 게 옳다는 사실을 너도 깨닫지 않았니? 이 따위 소라는 필요없다고!!"

잭은 민주주의의 비능률적임을 지적하고, 소수에 의한 다스림을 주장한다

사실 그가 능력있는 사람이란 합리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려운 상황이 되면 호전적인 사람이 주도권을 잡듯, 거칠고 폭력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할 인물이며, 무리를 지배해야 한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잭의 폭력성을 지도력이라 착각하고 구조되기 위한 봉화는 버려둔 채, 그가 제공하는 멧돼지에 열광한다

잭과 그의 패거리들은 온 몸에 진흙을 바르므로써 부끄러움을 잊고 폭력성과 잔인함을 떳떳하게 드러낸다

광기에 휩싸인 춤을 추는 동안, 그들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가엾은 동료 사이먼을 짐승으로 착각해 죽이고 만다

그가 동료임을 곧 알아차렸으나, 한 번 광기에 빠진 이들은 계속 피를 원하고 결국 멧돼지 사냥하듯 끔찍하게 때려 죽이고 만다

 

이 사이먼이야 말로 작가의 주제 정신이 응집된 인물이다

섬세한 감성을 지녔으나 새끼 돼지처럼 합리적인 사이먼은, 아이들을 공격할 짐승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착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혼자 숲으로 들어간다

(잭은 짐승의 실체를 믿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역시나 짐승의 실체는 낙하하다 바위에 걸려 죽은 조종사의 시체였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려 주려 잭의 무리에게 달려 갔다가 어이없이 짐승으로 오인되어 죽은 것이다

사이먼은 잭이 사냥한 멧돼지의 시체에 달라붙은 파리떼를 본다

파리떼의 대왕은 사이먼에게 속삭인다

"너희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나 때문이다, 나는 너희의 일부다"

"나"라는 것은 인간의 파괴적이고 잔인한 본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일반적인 표류기라면, 특출난 능력을 지닌 착하고 합리적인 지도자가 선출되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고난을 헤쳐 나가기 마련인데, "파리대왕"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우리의 숨겨진 본성을 그려낸다

랠프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도자로 나오지만, 그는 힘이 없고 또 천성적인 도덕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폭력 세력을 제압할 능력도 없고, 무리에게 고기를 제공할 수도 없으며, 그의 핵심 브레인이던 새끼 돼지를 같이 놀리는 평범한 소년일 뿐이다

랠프의 캐릭터만 봐도 이 소설의 치밀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우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소설은 절대 어렵거나 복잡하게 말하지 않는다

야만 상태에서 인간의 합리성과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소년들 수준에서 쉽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상징성을 제대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리 훌륭한 주제를 담은 우화라 할지라도 그 묘사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권선징악식의 진부한 양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역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동의하는 바다

 

이문열의 단편 중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원시 시대의 평등한 부족 사회에서 권력 구조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그린 소설이다

그 때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의 관찰력에 감탄했는데, 이 소설과 비교해 보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독자에게 가르치려 하므로써 해석의 여지가 적다는 느낌이 든다

역자는 본질적인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배제시키고 일부러 현실과 가장 먼 설정을 따르는 골딩의 치열한 작가 정신을 높이 샀는데,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탁월함이 바로 그런 데서 나와지 않나 싶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날마다 부딪치는 주변의 현실에만 골몰하는 우리나라 작가들에 대한 역자의 아쉬움을 이해하는 바다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잔인함과 폭력성의 실체에 대한 위대한 작품을 읽고 싶다면, 꼭 한 번 일독하라 권하고 싶다

더불어 역자의 작품평도 나 같은 평범한 독자의 이해력을 높히는데 훌륭한 기여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밀밭의 파수꾼"은 "위대한 게츠비"처럼 고전의 위치를 확립했으면서도, 트렌드 소설처럼 인식된다

그래서 가끔 편집을 예쁘게 해서 출판되기도 한다

고전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현대적 감각을 지닌 재밌는 소설일 거라 기대했는데, 상당히 의외의 책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단 읽기는 쉽다

300페이지짜리 책인데, 세 시간 만에 다 읽었다

1인칭 독백 시점으로, 심리 묘사도 별로 없고 사흘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저 담담히 서술할 뿐이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퇴학 결정이 내려진 후 집에 통보가 오는 수요일 전까지, 집에 들어 가지 않고 며칠간 밖에서 지내는 얘기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었을 때 기분이 난다

특정 사건이 없이도 하룻동안 있었던 일들을 담담히 서술해 가는 그런 종류의 소설이다

이 작품이 인정받는 이유가 혹시 그런 묘사력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주인공 홀든은 벌써 네 번째 고등학교에서 성적 불량으로 자퇴하는, 그렇고 그런 놈이다

이 책이 발표된 게 1951년인데, 50년대 미국 고등학교는 성적이 나쁘면 자퇴를 시킨 모양이다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닌데 (그의 형제들은 비교적 똑똑하다고 묘사된다), 공부에 큰 의욕을 안 보여 늘 낙제를 한다

그렇다고 깡패들과 어울리는 불량 학생도 아니다

불량 학생이 되기에는 몸집이 너무 왜소하다

 

확실히 우리 고등학생들과는 다른 점이 많이 나오는데, 일단 담배 권하는 사회라는 게 놀랍다

술은 스물 한 살이 되기 전까지 절대 안 되는데, 대신 겨우 열 여섯 먹은 주인공에게 담배는 허용된다

허용 정도가 아니라, 기차에서 만난 친구 어머니에게 담배를 권할 정도다

"위대한 게츠비"에서도 데이지가 손님들에게 담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단 우리 상식으로 보면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안 피우는 법이고, 더구나 여자들이 길거리에서 혹은 남자 앞에서 담배 피우는 걸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데, 우리 정서와 상당히 다른 모양이다

마약 보다는 낫다고 생각되서 그런가?

 

변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특히 동성연애자가 변태로 등장하는데, 아마도 195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그럴 것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성적 취향으로 인정받는 추세지만 (요즘은 동성애를 공적인 자리에서 비난하지 못한다), 당시만 해도 변태적인 성향으로 받아 들이는 분위기였나 보다

참 깨는 이야기인데, 홀든이 퇴학 후 엔톨리니 선생님을 찾아 간다

그 선생님 댁에서 좋은 이야기를 듣고 잠자리에 드는데, 놀랍게도 선생님이 홀든의 머리를 은근히 쓰다듬는다

홀든은 그가 변태성욕자임을 깨닫고 밖으로 뛰쳐 나간다

혹시 남선생과 여제자 사이면 몰라도, 남선생과 남제자 사이에 이런 에피소드를 집어 넣다니, 더구나 엔톨리니 선생님은 홀든의 방황을 잡아 주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설정이다^^

 

엔톨리니 선생님의 충고가 기억에 남는다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자기 삶에 열정을 갖지 못하는 홀든에게 그는 이런 충고를 한다

너는 바닥이 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환경에 처하기도 하는데, 너는 니가 처한 환경이 줄 수 없는 것만 찾고 있다, 너는 실제로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니 환경이 절대 주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미리 체념해 버린다...

또 교육이란 자기 머리에 어떤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지 일일이 시험해 보는 시간을 줄여 주고, 자기 역량을 정확히 측정해 주는 과정이다, 자기 역량을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지식의 습득이라는 표면적인 기능에 대한, 제대로 된 반론인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은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기능에 불과하다

교육이 흔히 생각하듯 지식의 습득에 불과하다면, 학원 다니면서 검정고시 치는 게 훨씬 이익일 것이다

단순히 학력을 쌓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이고 나에게 맞는 것은 무엇인지 찾는 과정이며 교육이 그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선생의 정의가 가슴에 와닿는다

이렇게 따지면 성적 지상주의에 물든 교사들이나, 대학 안 갈 건데 학교 다닐 필요 있냐는 학생들이 학교의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네 번이나 학교를 전전하는 홀든에게 너는 지금 바닥이 없는 추락을 계속 하고 있다고 지적한 선생의 말도 무척 인상적이다

바닥이 없는 추락처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고 자포자기한 사람에게 여전히 지금보다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충고는 무척이나 겁나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늦었다고 자기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를 때라는 얘기는, 지금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경고인지도 모르겠다

 

홀든이 이 선생님으로 인해 구원받나 했는데, 변태 성욕자로 판명되면서 그의 방황은 계속된다

그는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광활한 서부로 가서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

사실 그는 변호사의 아들로 무척 유복한 편이다

또 그의 형제들이 똑똑한 걸로 봐서 그도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처한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걸 보면, 아직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는 서부로 간다 해도 여전히 방황할 게 뻔하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놀랍게도 열 살 짜리 여동생 피비다

홀든은 특별히 이 동생을 사랑하는데, 부모가 무서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오빠를 위해 크리스마스 용돈을 모두 건네 준다

서부로 떠나기 전, 피비에게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데 뜻밖에도 오빠를 따라 가겠다고 옷을 챙겨들고 나타난다

인생에 대한 겉멋이 잔뜩 든 열 여섯 짜리 홀든의 눈에도 열 살 먹은 여동생의 가출은 어이없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한사코 떠나겠다는 어린 동생을 달래 회전 목마를 타러 간다

피비가 회전 목마 위에서 손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그는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어쩌면 행복이란, 혹은 삶의 의미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자잘한 일상인지도 모른다

홀든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지도 않고, 파란 외투를 입고 해맑게 웃으며 회전 목마 위에 앉아 있는 여동생을 행복하게 바라 본다

 

결국 홀든은 이 날 맞은 비로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도덕 교과서처럼 홀든이 갑자기 철이 들어 다시 학교로 가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다

다만 서부로 떠나겠다는 식의 현실도피적인 유치한 생각은 접고, 좀 더 성숙한 태도를 보이긴 한다

정신과 의사가 열심히 공부하겠냐고 자꾸 다그치자,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긴 하지만 나중에 무엇을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조소하기도 한다

사실 어른들의 이런 다짐들은 별 의미없는 소리이기 일쑤다

당위가 현실이 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계발서나 공부 잘 하는 법, 돈 잘 버는 법 등도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속어들을 써 가며 평이하게 쓴 책이지만 미국 교과서로 인용되는 고전이라고 한다

빠르게 전개되는 표현력은 높이 살 만 하다

혹 묘사력을 기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유심히 볼 만한 책이다

열 여섯 소년이 겪는 방황을 과장하지 않고 산뜻하고 담백한 문체로 가볍게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시절에 제대로 된 방황을 했는지 궁금하다

성인이 되기까지 나름대로의 고통과 방황이 있었을텐데, 나는 그 시기를 어떻게 넘겼는지 새삼 돌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중록 -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4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사 중 가장 흥미진진한 사건을 꼽자면 인현왕후 폐위 사건과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일일 것이다

드라마로도 수없이 만들어졌는데, 사건 자체의 극적 전개는 물론이거니와 이 두 사건을 자세히 기록한 한글 기록이 있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한중록은 사도 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기록으로써, 신원이 확실하고 당시 정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더욱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조선사를 돌이켜 보면 비단 그녀 뿐 아니라 한맺힌 비빈들이 많을 터인데, 기록으로 남긴 것이 겨우 한 질 뿐이니 (계축일기와 인현왕후전은 궁녀가 쓴 것이라 제외하고), 유달리 문학성이 뛰어난 분이라 생각된다

비록 자기 가문의 신원 회복을 위해 썼다고 하지만, 조선 왕조 5백년 역사 중에 이런 기록을 남긴 분은 그 분 혼자이니, 그 가치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한중록의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이덕일의 역사 에세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 책을 보면 단지 한중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료로써의 가치조차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투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없었고 혜경궁은 남편을 버리고 친정을 택한 비정한 여인으로 나온다

사도세자는 영특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왕재였는데, 노론의 탄압을 받아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아내인 혜경궁은 노론인 친정 편에 서서 남편 죽이는데 앞장 섰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 홍봉한은 외손인 정조 대신, 사도세자의 서자를 옹립하려고까지 했으나 어미 된 심정에 차마 그러지는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선뜻 동의하기 힘든 구석이 많아 직접 "한중록"을 읽고 싶었다

다행히 국문으로 쉽게 번역된 책이 나와 흥미롭게 읽었다

 

이덕일의 책을 보면 한중록이 한스럽다 "恨"자가 아닌, 한가할 "閑"자를 쓴다면서 절대 남편을 위한 사모곡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실제 한중록의 원본이 전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여러 이본에는 두 가지 한자가 다 쓰인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어떤 한자를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을 이덕일이 왜 굳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다

 

한중록은 총 6권으로 혜경궁 말년 10여년에 걸쳐 쓰여졌는데, 각 권마다 기술한 내용이 다르다

아마도 글을 쓰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가 승하한 후 쓴 책을 보면 확실히 가문의 회복을 위해 손자 순조에게 탄원하는 형식이긴 하다

그렇지만 모든 책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즉 반드시 그 목적만으로 쓴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편으로 그녀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했는지 이해도 간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당연히 즉위하여 왕비가 되리라 믿었을텐데 (더구나 세손까지 낳았으니 무슨 근심이 있었으랴!), 어처구니 없이 남편이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후 오직 아들에게 의존하며 살얼음 걷듯 살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정승을 역임하던 친정가문은 멸문지화에 가까운 화를 입고, 왕이 된 아들이 원한을 풀어주리라 믿었는데 느닷없이 아들이 급서한 후 어린 손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정작 정사는 대왕대비의 손에 있고 자신은 궁에서 아무 위치도 아니었다

아들 죽고 나니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였을 것이다

철천지 원수로 보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신원 회복은 커녕, 오히려 동생 홍낙임이 죽임을 당했으니 70 넘은 그녀가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겠는가!

어린 순조의 자비를 바라며 친정의 억울함을 밝히려 피로써 한중록을 써 가던 그녀의 안타까운 노후가 눈에 밟히는 듯 하여 마음이 아팠다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희생됐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에게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아무리 편파적이다 할지라도 한중록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조 역시 다소 독특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보통 아들을 귀히 여기는 법인데, 큰 아들을 잃고 늘그막에 본 하나 뿐인 아드님을 그토록 박대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여러 옹주들 중에서도 유독 화평과 화완만 총애하고, 화협과 화순 옹주 등은 세자처럼 극도로 미워했다니 애정의 편파가 심했던 모양이다

특히 화순 옹주는 남편이 죽고 나자 곡기를 끊고 따라 죽었는데, 아무리 아비 먼저 죽은 자식이 밉더라도 당시의 충효 사상을 따르자면 열녀비 하나는 세워 줄 만 하다

그런데도 밥 먹으라는 하교를 거부했다고 끝까지 모른 척 했다니, 영조가 얼마나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 가엾은 옹주의 열녀비는 나중에 조카 정조가 세워 준다

 

영조의 극단적인 자식 편애에 괴로워 하던 사도 세자는 점점 어긋가는 쪽으로 나가 나중에는 의대병이라는 희한한 병이 생기고, 화를 못 이겨 주변 내인들을 여럿 죽였다고 한다

의대병이란 옷을 한 번에 못 입는 병인데, 이 옷을 입혀 주려다 세자의 후궁 빙애도 칼맞아 죽고 말았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준 여자다)

혜경궁 역시 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눈을 찧어 자칫 눈알이 빠질 뻔 했다고 하니, 사도 세자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급기야 생모인 선희궁이 아들의 상태를 직접 영조에게 고할 정도였으니, 사도 세자의 병증이 심각했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영조는 아들이 모반하지 않을까 겁냈던 것 같다

무기류를 처소에 쌓아 놓고 관서 지방으로 여행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 되어 참변을 당했으니 말이다

권력 앞에서는 부자지간도 소용없다고 하지만, 혼란스런 시대도 아니고 예와 문치의 나라 조선에서 하나 뿐인 아들을 뒤주 속에 넣고 굶겨 죽인 영조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폐서인 시킬 수도 있고 (양녕대군처럼) 사약을 내려 한 번에 죽게 할 수도 있는데, 굳이 뒤주를 내와 그 안에 들어가게 한 뒤 8일 동안 고통 속에서 죽게 해야 했을까?

더구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삼복 더위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안에서 대소변은 또 어떻게 해결했을까? 한 나라의 세자가 이토록 비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애통하다)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가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 본 정조가 얼마나 가슴 졸이며 동궁 시절을 보냈을지 짐작이 간다

또 정조가 사도 세자의 죽은 형인 효장 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후, 왕실 내의 어떤 지위도 얻지 못하고 오직 아들에게 신세를 의탁하며 시아버지 눈치를 살피고 살얼음 걷듯 세월을 보낸 혜경궁에게도 동정이 간다

 

사도 세자가 죽은 후 영조가 유일하게 총애하던 화완 옹주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혜경궁의 처지가 참 가엾다

사도 세자가 무사히 왕위에 올랐으면 중전이 되어 옹주와는 비교도 안 될 높은 처지가 됐을건만 (인원왕후는 왕실의 법도를 엄히 세워 옹주는 세자빈과 감히 어깨를 나란히 앉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남편이 시아버지 손에 죽고 나니 왕실에서 그녀를 보호해 줄 방패막이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영조가 그녀를 귀여워 했다고는 하나, 정치적인 이유로 하나 뿐인 아들 정조를 뺏어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으니, 아무리 아들이 왕위에 올라도 그녀는 대비 칭호를 받을 수 없고 그저 한낱 "빈"에 불과했다

더구나 친정집은 남편 일에 연루되어 아들 정조로부터도 배척받게 되니, 고립무원이었을 그녀 처지가 안타깝다

정조가 오래 살았으면 말년에 행복했으련만, 하필 50도 못 되어 어머니 앞에 죽으니 얼마나 애통했을까?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혜경궁 보다 10세나 어린데, 이 집안이 사도 세자 죽음에 한 몫을 하고 나중에는 홍씨 가문을 공격한다

정조가 등극한 후는 모두 유배되고 사사됐으나,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한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다시 혜경궁의 집안은 공격을 받는다

이미 70이 넘은 혜경궁은 어떻게든 동생의 죽음을 막아 보려 곡기를 끊고 자살하겠다고 시위하자, 오히려 정순왕후는 부추기는 놈을 찾아 내라고 성화니 그녀는 한중록에 그 서운함을 토로한다

"너무 이리 마십시오"

한중록을 보면 온통 좋은 말 투성인데, 시어머니 정순왕후에게 이리 말한 것을 기록한 걸 보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 악에 받쳐 내뱉은 말처럼 느껴진다

 

혜경궁 홍씨의 일생을 살펴 보면 참으로 파란만장 하고, 한맺힌 삶이다

10세 때 세자빈으로 뽑혀 궁으로 들어간 후, 윗전들이 다 귀애하고 아들딸 무사히 순산하고, 본인도 80세까지 살았으니 (조선 시대 80세면 정말 건강했을 것이다) 큰 이변만 없었으면 대단히 복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특한 성격의 남편을 만나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었으니 그녀의 한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간다

다행히 자신의 일생을 자세히 기록한 저서를 남겨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후손에게 전하니, 헛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어로 번역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권선징악 식의 서술이 너무 많아 아주 재밌지는 않다

어떤 인물을 논할 때 무조건 착하고 바른 사람, 혹은 악하고 못된 사람이라는 식으로만 묘사하고 충효를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도덕 교과서를 읽는 기분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궐의 자잘한 에피소드들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또 당시 정세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해 왕실 여인의 눈으로 본 조선 당쟁사를 읽는 새로운 기쁨도 준다

책 편집은 썩 훌륭한 편이다

주석도 많이 달고 당시 제도나 관습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깡통 2006-03-2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헌책방에 갔다 사놨던 사도세자의 고백을 며칠전에 읽었는데..
그랬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중록을 꼭 읽어보고 싶어지더라구요.
님의 말처럼 선뜻 동의하기 쉽지도 않았었고요..
암튼.. 한중록은 주문은 했는데... 반전을 기대해보려고요!!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함께 비디오로 "위대한 게츠비"를 본 기억이 난다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고, 자기 집 수영장 에어 매트 위에 엎드려 쉬고 있을 때 한 남자의 총을 맞고 그대로 죽어 버린 가엾은 개츠비 역의 로버트 레드포드만 생생히 기억난다

그 장면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그 후 나는 레드포드의 팬이 되어 그가 나오는 영화는 모조리 섭렵하곤 했다

오래 전부터 숙제처럼 미뤄 두던 "위대한 게츠비"를 이제서야 비로소 읽게 됐다

늘 그렇지만 영화는 소설과 참 다르다

 

한 여자에게 일생을 걸어 성공한 뒤 다시 그녀에게 나타났으나, 그녀가 낸 교통사고에 휘말려 희생자의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내용이라 알고 있었는데 소설은 독특하게도 제 3의 인물에 의해 서술된다

개츠비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의 사촌인 닉이 화자이다

단순한 서술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주인공이고 게츠비와 데이지 이야기는 그저 한 사건에 불과한 느낌까지 준다

어쩌면 피츠제럴드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단순한 사랑 얘기가 아니라, 서부의 시골 청년이 동부의 뉴욕으로 건너와 성공했으나, 치정 사건에 휘말려 허망하게 죽고 만 부질없는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1920년대 미국의 서부는 시골이고 동부는 출세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야망이 숨쉬는 곳이었나 보다

화자인 닉 역시 증권맨으로 성공하고자 뉴욕에 건너 오지만, 게츠비 사건을 계기로 동부를 떠난다

그는 아마도 출세와 성공의 덧없음을 봤을 것이다

 

데이지란 이름은 흔한 것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는데, 게츠비가 사랑한 여인은 그 이름에 잘 어울린다

어떤 평론에서 본 것처럼 그녀는 물질주의에 경도되어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부박한 영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저 비난만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그저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복잡한 것을 꺼리는 태도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부잣집 딸인데다, 사교계에서도 촉망받는 여성이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개츠비는 부유하고 아름다우며 세상 근심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이 아가씨에게 넋이 나간다

아마도 데이지는 게츠비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고 목표였을 것이다

게츠비는 데이지를 통해 자기가 얻고 싶은 구체적인 미래를 실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데이지를 사랑한 것은 절대 아니다

데이지가 그의 곁을 떠난 후 5년 동안 돈을 모아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후 사랑을 고백했듯, 게츠비는 기본적으로 신실하고 순수한 청년이다

게츠비에게 있어 데이지란, 평생 이루고 싶은 소망과 목표의 결정체였고 하나의 이상형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돈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다

만약 그가 데이지를 동경했던 것이 단지 돈 뿐이었다면, 부자가 된 후에 다시 데이지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돈만 많으면 다른 여자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

 

이 소설을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그 역시 부유한 판사의 딸이었던 젤다를 얻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젤다는 가난한 청년 피츠제럴드에게 별 관심이 없고, 그는 젤다를 얻기 위해 열심히 글을 써서 마침내 사회적 명사가 된 후 그녀와 결혼한다

이 두 부부는 사교계의 유명한 커플이었다고 한다

연예인과 비슷할 정도로 그들의 동정은 뉴스의 대상이 됐다

비록 결말은 불행하지만 말이다

 

데이지는 그저 게츠비를 사랑할 뿐이다

게츠비가 그녀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는 다르게, 가벼운 연애 감정을 대한 것 뿐이다

사실 우리 주변의 사랑이란 데이지가 한 때 게츠비에게 끌렸던 것처럼, 호감을 느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수준이다

게츠비처럼 자기 삶 전체를 바치는 그런 사랑이 오히려 드물고 특이하다

문제는 게츠비의 이 열정과 지고지순함을 데이지가 알아 줘야 하는데, 이 데이지란 여자는 목숨을 건 사랑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아주 단순한 여자라는 사실이다

게츠비가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났을 때, 바람 피우는 남편에게 진절머리가 난 그녀는 또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그와 어울리고 자신이 낸 사고를 게츠비가 덮어 썼을 때도 그에게 일절 말 한 마디 없다

오히려 그녀는 복잡한 사건을 피하기 위해 남편과 여행을 떠나 버린다

게츠비가 희생자의 남편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했을 때 조차 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도대체 게츠비는 겨우 이런 평범하고 소심하며 도덕성이 결여된 한심한 여자를 우상으로 섬겼단 말인가!!

그의 열정과 순수함이 가엾다

결국 그녀가 저지른 죄값을 대신 치른 게츠비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아무 의미도 보람도 없는 개죽음에 불과했다...

 

데이지의 남편이란 작자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그녀의 남편 톰은 데이지 차에 치어 죽은 머틀의 정부였다

뻔뻔하게도 톰은 머틀이 죽은 후, 남자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던 그녀의 남편 윌슨에게 게츠비를 들먹거린다

데이지가 개츠비의 차를 타고 있었는데, 물론 톰은 운전자를 게츠비로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남편에게라도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윌슨에게 차의 주인이 게츠비라고 알려 주고, 사실은 그가 머틀의 정부였다고 거짓말까지 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틀과 자신의 관계가 탄로날까 봐 조마조마 하던 톰은, 이 기회에 게츠비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쏙 빠져 나온 것이다

정부와의 관계에 진실한 사랑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은 머틀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한 때 사랑을 나누던 여인이 차에 치여 죽었는데, 자기가 빠져 나올 궁리만 하다니, 그 아내에 그 남편이라 할 만 하다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 닉은, 진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조던에게 이별을 고하고 뉴욕을 떠난다

조던 베이커는 골프 선수에다 사교계를 주름잡는 멋진 뉴욕 여성인데, 데이지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는 뉴욕에 머물면서 조던을 사모하기도 했으나, 진실함이 결여된 화려한 겉모습은 부질없는 짓이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닉은 조던의 모습에서 데이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데이지나 조던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편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그저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개츠비의 사랑과 헌신이 너무나 위대해, 평범한 우리들은 부끄럽고 초라해진다

데이지가 그 사랑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만이라도 깨달았다면, 가엾은 개츠비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텐데...

 

게츠비의 장례식은 부와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신문의 부고란에 개제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대저택에서 놀고 마시던 사교계 인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진실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오직 데이지에 걸맞는 남자가 되기 위해 애쓴 그의 삶은 이렇게 덧없다

그의 아버지가 닉에게 보여 준 젊은 시절 게츠비의 낙서는 내 가슴을 무척 아프게 한다

가진 것은 없으나 꿈과 야망을 간직한 이 신실한 청년은 새벽 5시에 기상해 잠들 때까지 빡빡한 시간표 속에서 자신을 단련한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앞을 향해 달리던 게츠비는, 데이지라는 잘못된 목표를 세우는 바람에 허망하게 죽고 만다

인생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인가...

 

게츠비나 데이지의 심리 묘사가 뛰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화자가 닉이다 보니 그저 관찰자의 입장에서 짤막하게 서술될 뿐이다

오히려 닉이 느끼는 삶에 대한 통찰이 주를 이룬다

게츠비를 만나고 그의 죽음을 통해 인생을 다르게 본 닉의 성장기 같기도 하다

독특한 서술 구조가 이 소설의 매력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로버트 레드포드의 멋진 연기로 게츠비를 만나 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