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영원으로 - 중 - Mr. Know 세계문학 58 Mr. Know 세계문학 58
제임스 존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읽은 소설이 있던가?
워낙 남독과 속독을 하는 스타일이라 특히 소설의 경우 마치 1.5배속의 영화를 보듯 대충 줄거리만 이해하고 넘어가곤 하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면서 꼼꼼히 읽고 있다.
소설이 주는 맛, 작가가 그려내는 캐릭터와 풍경의 묘사, 나는 그 깊은 맛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대충 읽어 치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 소설은 확실히 고전과 다른 뭔가가 있다.
좀 더 내면을 파고들고 각 인물들이 느끼는 고통과 부조리,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반응 등등 인간에 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을 때는 도저히 베르테르나 로테에게 공감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대체 왜 그가 죽음에 이르렀는지, 또 이 소설은 왜 당대를 풍미했는지 이해불가했으나)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읽으면서는 완전히 주인공들에게 몰입하고 있다.
나는 프루가 되고 마지오가 되고 워든이 된다.
나는 그들의 고뇌와 부조리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괴로워 하고 갈등한다.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갈등과 상황에 대해 120% 이해하고 있다.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참 묘사력 뛰어나고 재밌는 훌륭한 소설가라고 생각했는데 제임스 존스에 비하면 그저 대중 작가에 불과한 것 같다.
열린책들에서 표지도 예쁘고 들고 다니기도 편하게 잘 만들었다.
번역도 비교적 매끄럽다.
속어가 너무나 진부하고 시시하게 번역됐으나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밑바닥 계층의 이야기일수록 자국어로 된 소설을 읽어야 하는데, 아쉬운 점이다. 

어쩌면 프루는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인물이 아닐까?
취사병으로 들어와 부사관들의 기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스타크의 현실적인 조언에 대해, 프루가 거절하면서 나눈 대화들이 정말로 가슴을 친다.
두 세 장에 달하는 대화를 죄다 옮겨 적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인간답게 살 권리, 부유하고 호화롭게 살겠다는 게 아니라 원하는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그 권리를 프루는 주장한다.
프루라는 인물은 대체 어디서 그 엄청난 자신감과 당당함을 얻었을까?
어찌 보면 대단한 꼴통 같기도 한데 안젤로 마지오 역시 체격이나 싸움 실력은 프루에 뒤지지만 깡 하나만은 만만치 않은 인물이고 그래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그리고 둘은 결국 세상의 부적응자가 되서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 세상과 이별한다.
권투로 부사관이 된 블룸은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평생 짐으로 생각하고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그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더 비열한 인간으로 만든다.
그는 진급하기 위해 권투를 하므로 링 위에 올라가면 두려워 한다.
타고난 체격 조건 때문에 챔피언이 되지만 그는 권투를 즐기지 않고 그에게 권투란 그저 진급의 수단일 뿐이다. 
반면 프루는 권투 경기가 주는 스릴과 긴장감을 즐긴다.
프루는 또 나팔을 사랑한다.
보병이라는 직업도 사랑한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즐기는 일을 위해 살고, 그것이 부당하게 거부됐을 때 과감하게 그것을 버림으로써 자존심을 지킨다.
대체 나는 왜 프루와 같은 깡, 자부심, 자존심이 없는 건가?
마지오와 프루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만큼 제일 좋은 예는 워든이 될 것 같다.
인사계 상사로 근무하면서 홈스 대위의 부대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남자.
체격도 크고 무엇 하나 두려울 게 없는 남자.
프루처럼 자존심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완전 꼴통도 아니면서 진정으로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는 현명한 자!
워든과 카렌의 사랑 얘기는 하권에 나와 아직 안 읽어 봤다.
영화에서는 워든과 카렌의 애정 전선에만 초점을 맞춰 워든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제대로 그려지지가 않아 아쉽다.
프루 역시 그저 자기 손에 실명된 전우 때문에 권투는 죽어도 다시 안 하겠다는 양심적인 인물 이상으로는 그려지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화면으로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하는 영화의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중권에서 마지오가 먼저 감옥에 가고 프루가 그 뒤를 따라가는 것으로 끝났다.
영화에서는 마지오만 영창 가는 걸로 나온다.
한 가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호모에 관한 부분이다.
호모는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마땅한 존재로 나오는데 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가능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동성애자들이 사회로부터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험한 시간을 견뎌 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호모를 벗겨먹는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성적 취향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라 굉장히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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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영원으로 - 상 - Mr. Know 세계문학 57 Mr. Know 세계문학 57
제임스 존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영화로 먼저 접한 책.
어렸을 때 주말의 명화로 본 후, 얼마 전 DVD로 다시 봤고, 감독이 뭘 말하고 싶었는지 잘 몰라서 책으로 읽기로 했다.
보통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데 이 책은 특별히 표지가 예뻐서 구입했다.
친구가 사당 반디 앤 루니스에서 사 줬던 기억이 난다.
열린책들의 <미스터 Know> 시리즈는 일단 가방에 넣기 편하고 표지가 화사해서 읽고 싶은 충동이 새록새록 생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이 시리즈로 읽었다. 
분량은 무려 세 권!
각 페이지가 500 쪽 이상이니 상당히 양이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묘사력은 정말 탁월해서, 역시 현대 소설은 고전과 다르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
미국 사람들이 읽는다면 가슴 절절하게 감동하면서 읽을 것 같다. 
그렇지만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특히 속어의 어설픈 번역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너무나 재밌게 또 감탄하면서 읽고 있다.
보통 소설은 줄거리나 사건의 전개를 따라 대강 빠른 속도로 읽곤 하는데 이 책은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고 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문장을 음미하게 된다.
폴 오스터의 문체와는 또다른,  무미건조하면서도 정곡을 콕콕 찌르는 기막힌 묘사력! 
역시 영화는 소설의 적수가 못 되는 것 같다.
영화에서의 분위기와 전혀 다르다.
그렇지만 영화를 봐서 책 속의 인물들을 상상할 때 훨씬 생생한 느낌이었다.
특히 소설의 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워든이 영화 속 배우와 이미지가 거의 일치한다.
인상착의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소설에서도 그렇고 영화에서도 나는 주인공 프리윗 보다 워든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소설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프리윗의 삶이 애잔하고 허망하게 느껴진다.
워든은 대체 왜 장교 진급을 거부하는지, 카렌과의 관계 발전은 어떻게 이뤄질지 궁금한 게 무척 많다.
아, 정말 탁월한 소설가이고 감탄할 만한 문장력을 가졌다.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는 바람에 연속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로 거론되는 워든과 카렌의 파도 속 키스 장면은, 소설에서는 어처구니 없게도 카렌이 추워 하는 바람에 엉망이 된 첫 데이트로 묘사된다.
웃음이 나왔다. 

나이가 좀 들어서 읽은 탓인지 성과 여자, 섹스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책에 나온 말인데 식욕과도 같은 본능 때문에 죄를 받아야 한다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도 든다.
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서인지 내가 여자여서인지 혹은 기독교 영향 탓인지 섹스는 왠지 불결하고 더럽고 어둡다는 생각을 했었다.
키스까지는 아름다운데 손을 잡고 모텔로 들어가 옷을 홀라당 벗고 신음하는 것은 아무리 미화를 해도 그저 포르노, 배설 등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성욕이야 말로 인간에게 너무나 기본적이고 중요한 욕구이기 때문에 과부의 재가를 금한 유교 논리라든가 섹스를 금한 천주교의 사제나 수녀 제도 등은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군인과 여자, 혹은 군인과 섹스, 너무나도 밀접하고 잘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다.
아마도 창녀촌은 인류 역사에서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음식점처럼 말이다.
아무리 섹스를 좋아하는 여자도, 처음부터 무조건 들이대지는 않는다는 워든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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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9-03-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조만간 읽으려고 생각중이에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훌륭한 리뷰 감사~

노이에자이트 2009-03-15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하도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네요.데보라 카와 버트 랭카스터의 키스 장면이 정말 멋있는 영화였죠.마지막에 파도에 꽃 뿌리는 장면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로 먼저 접한 책이다.
3시간이 넘는 다소 지루한 영화이기도 했는데 분위기가 매우 독특해서 비교적 열심히 봤던 것 같다.
특히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워낙 멋지게 나와 인상깊게 본 영화다.
소설 속의 토마스는 남자 배우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 같은데 테레사와 줄리엣 비노쉬는 좀 다른 느낌이다.
영화 속의 테레사는 보다 주체적이고 토마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테레사는 줄리엣 비노쉬가 풍기는 이미지 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종속적인 느낌을 준다.
어쩌면 줄리엣 비노쉬라는 여배우가 주는 이름값 때문에 영화 속에서 더 큰 비중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꽤 있었는데 책을 보니 그제서야 주인공들의 행동이 이해된다.
앞뒤 설명 없이 행동들만 보여 주다 보니, 사건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튀는 느낌을 줬던 것이다.
이래서 문학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보다.

테레사는 어머니로부터 상처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름다웠던 어머니는 테레사를 임신하는 바람에 무능한 남자에게 시집가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바람둥이 두 번째 남자를 만나 끔찍한 인생을 산다.
그녀는 자기에게 전혀 반항하지 못하는 딸을 마음대로 조종함으로써 남편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또 자신의 미모가 시들어 가고, 딸이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에 대해서도 질투하고, 육체를 조롱함으로써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인생을 사는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가학적 취향을 가진 여자다.
일종의 정신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 힘이 없는 테레사는 오직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길 소원했고 소도시에 나타난 젊은 바람둥이 의사 토마스에게 인생을 건 모험을 시도한다.
영화 속에서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기 때문에 왜 느닷없이 테레사가 가방을 들고 프라하에 나타났는지 좀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토마스 역시 이혼남으로 나온다.
그에게 섹스는 일종의 놀이로써, 테레사를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여자들과 하룻밤을 지내는 걸 아무 갈등없이 해낼 수 있는 다소 특이한 남자다.
첫번째 결혼이 준 상처는 더 이상 결혼 생활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했고 테레사와의 결혼은 사회적 의미의 결혼이라기 보다는 오갈 데 없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사는, 일종의 가족과 같은 그런 관계였다.
그러므로 그는 테레사에게 정절을 지키지 않고 그것 때문에 테레사가 괴로워 하는 것을 무시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참 독특한데, 나는 테레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가진 게 없다.
경제적인 것, 감정적인 것을 모두 토마스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가 떠나가 버릴까 봐 두려워 한다.
그런 비참함이 싫어 스스로 토마스 곁을 떠나기도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일종의 운명과 같은 관계라 토마스는 다시 위험천만한 프라하로 테레사를 따라 돌아온다.
그러나 역시 재결합 후에도 토마스의 가벼운 사랑놀음은 그치지 않고 테레사는 사랑과 섹스가 별개일 수 없는 자신의 답답한 현실 때문에 괴로워 한다.
그녀는 토마스와의 관계에서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비참해 한다.

사비나는 꽤 매력적인 여자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줄리엣 비노쉬에 가려 큰 비중이 없었는데 책에서는 사비나의 관점이 자주 등장한다.
또 공산주의 치하의 답답한 사정도 상세하게 드러난다.
러시아가 지배하는 공산주의 사회가 개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세 사람의 입장에서 자주 묘사된다.
문득 <닥터 지바고>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과 유리 지바고 혹은 라라와의 관계처럼 말이다.
취리히에서 사귄 애인 프란츠는 잘 생기고 잘 나가는 매력남으로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좀 형편없이 나왔다.
또 사비나가 그를 떠난 이후 비참해 하는 장면에서 끝났는데 소설을 보니 아내와 이혼 후 여자 제자와 새로운 인생을 사는 걸로 나온다.
이 사람도 한 사람의 주인공으로 꽤 비중있게 그려진다.

이 소설 최고의 백미는 느닷없는 죽음에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도 그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었는데 소설에서도 두 사람은 시골로 내려가 모처럼의 갈등없는 시간을 보내다 어처구니 없게도 브레이크 고장으로 동시에 사망하고 만다.
책을 쓰는 시점도 독특하고 심리 묘사도 훌륭하고 새로운 느낌의 소설이었다.
위대한 문학과 통속 소설의 차이는, 바로 이런 심리 묘사, 혹은 배경 설명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사건 위주로 진행되는 소설이 아니다 보니 중간중간 맥을 놓칠 때가 많다.
영화도 비교적 소설의 느낌을 잘 표현했지만 역시 책을 읽지 않는다면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 재독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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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Mr. Know 세계문학 5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나 읽으려고 벼르던 책인가!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첫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항상 실패했던 책이다.
자연에 대한 감상을 늘어 놓고 서간체였기 때문에 애틋한 사랑 얘기가 얼른 나오지 않아 집중하기 힘들었다.
알고 보니 원래 이 소설이 자연을 예찬하는 이른바 질풍 노도의 시기 문학이라고 한다.
이성주의, 합리주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 낭만주의의 정수라고 할까?
하여튼 구구절절한 사랑 얘기가 얼른 안 나와 도무지 재미를 느끼지 못해 맨날 읽다가 내팽개친,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읽고 싶은 의무감 같은 책이었다.
서점에서 미스터 노 시리즈로 이 책을 만났을 때, 바로 이거다 싶어서 얼른 집어 들었다.
표지가 어쩜 그렇게 예쁠까!
고전은 그 시대의 언어로 재해석 되야 한다는 말도 맞지만, 책 커버에 나온 것처럼 디자인이나 판형 등도 매 시대마다 새롭게 출간되야 함을 느끼게 한 책이다.
종이질도 무척 가볍고 한 손에 쥐고 읽기 쉬울 만큼 책 사이즈도 아주 맘에 들었다.
다만 역시 240페이지에 불과한 책이 7800원이라는 가격은 비싼 감이 들었고 (민음사에서 나온 같은 책은 할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5천원) 번역도 썩 매끄럽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을 읽어 보고 싶다.
혹은 이 책 자체가 과장되고 수사적인 문체로 되어 있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내가 생각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3 시간 동안 읽었는데 가벼운 로맨스는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닥터 지바고처럼 사랑 얘기는 뒷전이고 러시아 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갈등을 표출한 것도 아니었다.
괴테가 겨우 스물 다섯에 이 소설을 썼다는 게 충분히 믿어진다.
스물 다섯이면, 나보다도 어린 나이니 충분히 이런 감정에 빠질 것이라고 이해된다.
괴테도 나중에 이런 감상적인 소설을 쓴 걸 부끄럽게 여겼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도 나이가 들면 아마 이런 감정은 젊은 시절의 치기어린 것으로 치부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많이 공감하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자살이 유행처럼 번질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하니, 아마도 대중의 공감을 살만한 어떤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을 것 같다.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그런 분위기가 있었을 것 같다.
정말 나폴레옹은 이 책을 전장에서도 읽었을까?
대체 어떤 점에 그토록 빠져 들었던 것일까?
혹시 한국어로 번역되서 내가 그 맛을 못 느끼는 건 아닐까?

사실 나는 크게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베르테르의 선택은 너무나 극단적이다.
첫 장에서 베르테르는 사랑하는 연인이 죽은 후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빌하임이라는 마을로 요양을 온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로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무리 사랑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지만 이렇게 쉽게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게 말이 되나?
이 시기를 잘 넘겼으면 아마 베르테르는 또다른 연인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베르테르의 문제는 로테가 살고 있는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는 데 있다.
로테에게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돌아온 후 베르테르는 그 곳을 떠나 어떤 백작의 관리로 일한다.
그 곳에서 일이 잘 안 풀리자 다시 로테의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결혼 생활을 하는 로테에 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만약 백작의 관리로 승승장구 했다면?
아마 그는 로테에 대한 마음을 차츰 잊어갔을 것이다.
일이 안 풀리고, 어떤 대안으로써 다시 로테의 마을로 돌아간 게 문제였다.
스물 다섯 젊은이의 치기라고 할까?
소설에서 로테와의 관계가 마음으로는 어느 정도 통했으나 실제적인 연애는 거의 없었음을 보여 준다.
겨우 베르테르의 강압적인 키스 한 번 뿐!
로테가 베르테르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열렬히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베르테르 혼자 짝사랑 한 것에 불과하다.
로테는 알베르트와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둘 사이에서 홀로 괴로워 하는 베르테르는 삼각관계라고 착각한 후 결국 스스로 빠지기로 결심한다.
그 선택이 자살이라니,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나!

소설 속의 베르테르는 성격이 참 마음에 든다.
불쾌한 기분, 우울한 기분도 다 병이라고 보는 베르테르는, 질병을 치유하듯 그런 기분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의 불쾌한 기분 때문에 남에게 그런 기분을 전이시키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한다.
보통 기분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질병의 일종으로 보고 역시 치료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본다는 그의 관점이 마음에 든다.
기분은 전염되기 쉽기 때문에 스스로의 기분을 좋게 유지해야 남에게 피해를 안 준다는 그의 논리가 마음에 든다.
이렇게 긍정적이고 올바른 생각은 갖는 사람이 대체 자살이라니, 이 무슨 극단적인 선택이란 말인가?
로테가 있는 마을을 떠나 다른 일을 찾았다면 아마 베르테르는 곧 자신의 긍정적인 성격을 회복하고 훌륭한 젊은이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로테라고 하면 샤를로테의 애칭 같은데, 여기서 주인공의 이름은 로헤텐이었다.
원래 괴테가 반한 실제의 여인 이름은 샤를로테였다고 한다.
일부러 바꾼 모양이다.
70대의 나이로 10대 소녀에게 프로포즈를 한 괴테의 애정 편력에 비춰 볼 때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한 주인공의 심리 상태가 더더욱 못미덥다.
더구나 단순히 짝사랑만 가지고 말이다.
독일어 소설은 좀 지루한 느낌이 든다.
사실 인문사회 서적도 그렇다.
독일 특유의 어떤 분위기가 있는데 영국, 미국적인 것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언어의 강렬함도 그렇고.
하여튼 벼르던 소설을 읽어 버려서 마음이 홀가분 하고 기회가 된다면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으로 다시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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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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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설국을 읽었다

항상 읽어야겠다는 부담감만 가진 책이었는데, 오늘 다 읽었다

15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다

연작식으로 드문드문 발표한 글들을 모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 글의 흐름이 이어지지가 않고 끊기는 느낌이었나 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엄청난 타이틀 때문에 상당히 쫄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재미는 없다

이런 소설은,즉 문장력이 빛나는 소설은 원서로 직접 읽어야 맛이 날텐데 번역서로 읽다 보니 아무래도 진수를 느끼기가 힘들다

저자는 성심성의껏 번역한 듯 하지만, 왠지 겉도는 것 같은 문장들이 많다

소리를 내고 밑줄을 그으면서 여러 차례 읽어야 하는 그런 문장 말이다

 

[금각사]가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치중한 반면 [설국]은 풍경 묘사에 주력한다

[금각사]가 1인칭 시점이라 당연히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또 [설국]은 3인칭 시점이라 아무래도 심리 변화에 덜 주력할 수 밖에 없겠으나, 어쨌든 두 소설은 기법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렇지만 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미시마 유키오를 아꼈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미시마는 그가 딱 총애할만한 제자였을 것이다

난 [설국] 보다 [금각사]가 더 마음에 든다

왜냐면 금각사는, 설국보다 훨씬 읽기가 쉽다

풍경 묘사로 한 권의 책을 써 내려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설국이 높게 평가되는 것 같다

탁월한 문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보면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구나, 정도로 떠벌이는 것으로 끝나는데, (즉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아니라 그냥 배경 묘사 정도로) 이 소설에서는 눈덮힌 겨울 풍경이 주인공에게 끼치는 심리 변화의 추이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가와바타는 천편일률적인 풍경 묘사에 질려, 본인이 직접 여행 행장을 꾸리고 눈덮힌 니카타 현의 온천장에 머물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매우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셈이다

일본도 눈이 참 많이 오나 보다

문득 이문열이 쓴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주인공은 젊은 시절 절대미를 찾아 눈덮힌 강원도로 무전 여행을 떠난다

눈에 발이 푹푹 빠져 걷기도 힘들 정도의 눈보라 속에서 주인공은 절대미를 발견하고 감격에 겨워한다

이문열 특유의 화려한 미문체가 길게 이어진다

어쩌면 이문열은 금각사나 설국을 통해 절대미의 세계를 그리겠다는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도 일본 소설, 이런 탐미주의 계열을 좋아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와 감성이 맞아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문열이 탐미주의 작가란 얘기는 아니고, 모티브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시마무라는 직접 보지도 않은 서양 무용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고급 실업자다

도쿄 서민가에서 태어나 가부키와 같은 전통 문화에 취해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서양 무용에 관한 책을 탐독하더니 여기저기 평론을 발표하게 됐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빈둥빈둥 지내며 너무 무기력해지지 않기 위해 산을 타고 온천장에서 며칠 묵어 가곤 한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도쿄에서 산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1935년이니, 일본 사람들 역시 서양인이 직접 하는 발레 공연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마무라는 독학으로 선진 예술을 접하고, 실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감상에 취해 마치 천국의 시를 쓰듯 몽환적인 얘기들을 잡지에 발표하고 그것이 먹혀 들어간다

하긴 1930년대에는 글자만 알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였으니까, 시마무라 같은 고급 지식인들이 충분히 놀면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온천장에서 만난 고마코는 게이샤다

게이샤나 기생이라고 하면 왠지 예술도 좀 아는 나름대로 풍류를 즐기는 신분 같은데, 따지고 보면 결국 창녀 아닌가?

화대를 받고 몸을 파는 창녀 말이다

시마무라는 외국 책을 번역하고 자비 출판까지 하는, 더구나 무용에 대한 글까지 발표하는 고급 지식인이다 (유명하진 않지만)

더구나 그는 아내까지 있고 도쿄에 산다

우리로 치자면 서울 사는 평론가가 잠시 강원도 산골에 머물면서 창녀를 불러다가 섹스는 않하고 말상대를 하는, 그런 장면일 것이다

 

눈 때문인지,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순백의 미를 가진 여자라 생각하고 함부로 다루질 않는다

시마무라는 일종의 탐미주의자 같다

어쩌면 고마코에게 우정 비슷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제 겨우 열 아홉살의 어린애나 다름없는데, 그녀를 상대로 성욕을 풀기는 좀 그랬을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섹스를 위해 부른 게이샤는 겨우 열 일곱이었고 오히려 어린 애가 더 편하다는 말도 했지만)

더구나 처음 고마코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일본 전통 무용을 배우고 샤이센을 연주하면서 연회에 불려 나가는 일종의 무용수 내지는 음악가 신분이었기 때문에 (즉 창녀로서의 생활이 익숙치 않은) 무용 평론가였던 시마무라는 아내와 함께 올 때 말동무 삼을 생각마저 한다

 

고마코가 시마무라에게 빠져드는 건 당연하다

일단 그녀는 나이가 어리고 자신을 성적으로 대하지 않고 점잖게 말동무로만 여기는 도쿄 남자에게 어느 정도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시마무라 역시 먼 곳으로 여행와서 눈처럼 상쾌하고 깨끗한 어린 여자를 만나 특히 시골에서 보기 드문 실력의 샤이센 연주를 듣고 고마코에게 빠져든다

그런데 둘이 사랑에 빠지면 이건 영락없는 통속 소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아마 가와바타는 둘 간의 사랑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시마무라는 그저 고마코에게 애틋한 연민의 감정 정도만 느낀다

둘이 한 방에 있는 게 여러 차례 나왔지만 끝까지 섹스를 하진 않는다

오히려 고마코는 손님들에게 불려 나간 날 꼭 혼자 묵고 있는 시마무라에게 다녀간다

여관에서는 고마코를 시마무라의 단골 손님 정도로 알았을 것이다

 

만약 내 남편이 여행지에서 창녀와 혹은 그 마을 여자와 친구 비슷한 관계를 맺게 된다면 난 어떤 기분일까?

반대로 내가 여행지에서 야릇한 감정을 주고받는 남자가 생긴다면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걸 바람피운다고 해야 할까?

둘은 분명히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고 섹스를 한 것도 아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다만 1년에 한 두 번 여관에 묵고 갈 뿐이다

이 정도 관계라면 눈감아 줘도 되지 않을까?

[바람난 가족]에서도 황정민과 문소리는 서로 다른 파트너를 가지고 있고 그 사실에 그다지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소리는, 다행이네 당신이 말할 상대가 있어서, 라고 가볍게 반응한다

그나마 영화에서는 섹스 파트너였지만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은 성관계도 갖지 않는다

뭐 이 정도라면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섹스를 안 했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순결하다고 할 수 있을까?

루이스는 이런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섹스는 안 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라면 결혼했더라도 이성 친구가 괜찮다는 얘길까?

 

이 소설에서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헛수고" 라는 단어였다

도쿄 생활을 할 때 고마코는 화려한 가구를 쓰고 열심히 일기를 쓰면서 나름대로 교양있는 문화인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결국 산골 온천장에 게이샤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도 어떤 남자의 요양비를 벌어 주기 위해서 말이다

나름대로 소설도 읽고 부지런히 샤이센 연습도 하지만 결국 다 그녀에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느낀 시마무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뭔가 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가치없는 일이 되버린 느낌 말이다

시마무라 역시 무위도식하는 삶을 보낸다

고마코와도 언젠가는 헤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이제 가라고 그를 애써 보내려고 한다

여행지에서 잠시 인연을 맺고 마음을 줘 봤자 그 때뿐이고 마음을 준 사람만 상처입기 마련이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은 창녀가 아닌가?

적극적이지도 않는 시마무라에게 고마코는 매달리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그가 온천장으로 내려오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달려간다

 

요코의 존재는 뭘까?

고마코가 요양비를 댔던 유키오를 몹시 사랑했던 모양이다

여관의 하녀 일을 하는 걸로 봐서 신분도 매우 낮고 가난한 것 같다

그녀는 유키오가 고마코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또 고마코가 게이샤 생활을 해서 요양비를 대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유키오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채 그 옆에서 정성스레 간호만 할 뿐이다

그가 죽고 나자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매일 괴로워 하다가 결국 고치창고에 불이 났을 때 2층에서 뛰어내려 죽고 만다

어차피 잘 됐다 싶은 심정으로 탈출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뛰어내린 것 같다

고마코 보다 더 불쌍한 여자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고마코는 요코보다 나이도 많고 게이샤 생활을 하면서 돈도 꽤 모은 것 같은데 요코는 하녀일을 할 정도로 더 가난하다

또 고마코가 유키오의 임종을 지키지 않을 정도로 그에 대한 마음을 털어 버린 반면, 요코는 미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들을 만큼 유키오의 죽음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순진한 여자애다

그러니까 요코가 제일 순진하고 고마코는 그녀보다는 낫지만 역시 시마무라에게 마음을 줘 버리고, 시마무라는 이 셋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냉정한 편이다

아마 나이가 많고 남자이며 돈이 더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장 강자가 바로 시마무라고 제일 약자가 요코인 셈이다

역시 요코는 가장 약자답게 자살로 생을 마친다

 

시마무라는 아름다운 요코에게도 마음을 뺏긴다

유키오에게 마음을 줘 버린 요코는 그를 사랑하나는 고마코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잘 해 주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정작 시마무라는 이 두 여자를 가지고 마음 속의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고마코는 더 어리고 아름다운 요코에게 시마무라가 마음을 뺏길까 봐 초조해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한다

그녀에게 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정작 도쿄의 집에 있는 시마무라의 아내는 시골에서 벌어지는 이 일을 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여간 배우자가 밖으로 돌면 꼭 의심해 봐야 한다

 

온천장의 고치창고에 불이 나고 요코가 2층에서 떨어지는 걸로 소설이 끝나버려 좀 허무하다

어차피 결론이 없는 소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일본어로 직접 읽으면 훨씬 감명깊지 않았을까 싶다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면서, 혹은 여러 번역본을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이런 문장 위주의 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걸 보면, 영어 번역을 엄청 잘한 것 같다

해설을 보니까 일본어 운율에 맞춰 아주 잘 써진 글이라고 하고, 또 가와바타의 노벨상 수상은 전문 번역가가 워낙 성실하게 영어 번역을 잘 한 탓이라고 한 걸 보면, 역시 성공하려면 작품의 질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알리냐도 아주 중요한 문제 같다

이문열이 상당히 미문체라 호흡이 길고 다소 관념적이고 수식적인 글들이 많지만, 영어 번역을 잘 하면 꽤 인기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황석영 작품들이 불어로 많이 번역된다고 하니까 한 번 읽어 봐야겠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과연 우리 문학을 그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내가 외국소설을 읽는 것도 절반 정도 밖에, 그냥 분위기 파악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가와바타는 제자 미시마처럼 자살로 생을 마친다

헤밍웨이가 권총 자살한 건 문학적인 죽음 어쩌고 하면서 일본인이 죽으면 꼭 군국주의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 너무 도식적이라 싫다

가스를 틀어 놓고 74세의 나이로 자살했다고 하는데, 어떤 생각으로 죽었는지 궁금하다

탐미주의자였던 것 만큼 관념적이고 아름다운 죽음의 절대미, 뭐 이런 것에 끌려 죽지 않았을까?

미시마의 경우 일본 자위대의 재결성을 주장하면서 할복 자살했다고 하는데, 금각사가 너무 아름다워 영원히 남기를 바라며 오히려 거기에 불을 지른 주인공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 작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비단 일본 군국주의 작가여서가 아니라, 그는 다른 나라에 태어났더라도 자살로 생을 마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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