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 마로니에북스 35
미시마 유키오 지음 / 청림출판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예상 외로 재밌는 책이었다
제목이 좀 고리타분 하고 미학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지루할 거라 생각했는데, 왠걸 문장력이 장난 아니다
아주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하긴 1956년에 발표한 책이니 현대적인 게 당연하지
제목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이 소설이 아주 옛날식 문장일 거라 생각했다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로부터 문장력이 훌륭하다는 칭찬과 함께 문단에 추천됐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이문열의 소설을 보는 기분이다
문득 이 소설가가 꽤 잘 생겼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본 가서 금각사를 봤는데 아주 멀리 떨어져서 봤다
연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형태만 봤다
1950년에 절에 사는 어린 스님이 커플끼리 절에 놀러 오는 거 보고 질투심을 느껴 금각사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 후로 아예 접근을 통제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 멋진 절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생각만큼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금각사" 라는 소설 때문인지 왠지 모를 신비감을 주는 절이었다
아빠가 "금각사" 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책을 읽지 않은 나도 덩달아 감동하면서 절을 봤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나"는 스님인 아버지에게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깅가쿠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말더듬이라는 불구를 안고 살았기 때문에 친구도 없었고 자신의 불완전한 육체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대신,  깅가쿠지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환상을 품고 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깅가쿠지의 주지에게 도제로 맡겨진다
어머니는 그가 노사의 눈에 들어 깅가쿠지의 주지가 되길 바란다
"나"는 어머니를 혐오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기 집에 얹혀 살던 친척과 관계 갖는 걸 본 까닭이다
그 장면은 아버지도 목격했는데 아버지는 어린 "나"의 눈을 가린 채 그 일을 묵과한다
폐결핵 환자였던 아버지로서는 젊은 아내의 육욕을 만족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대학에서 만난 가시와기다
그는 안짱 다리라는 불구를 안고 살지만 (아마도 선천성 고과절 탈구증일 것 같다 어린 시절 수술해 줬어야 하는데 부모의 방치로 평생 불구가 됐다는 말로 미루어 봐서) 자신의 불구를 동정의 대상으로 삼아 여자를 끌어 들일 만큼 노회하면서 또 독설가이기도 하다
문득 가난하면 선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던 니체가 생각난다
가시와기는 같은 불구라는 점 때문에 동지 의식을 느끼고 접근한 "나"에게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 준다
자기 불행을 직시하는 것, 혹은 남의 결점에 대해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것, 대단한 베짱과 뻔뻔함이 아닐 수 없다
왠지 그의 삶이 비틀렸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오히려 비틀린 사람은 말더듬이라는 결점을 숨기려 했던 "나" 로 드러난다
가시와기는 불구라는 점을 이용해 연애를 걸 만큼 어찌 보면 삶에 대해 도전적인 자세를 잃지 않지만, "나"는 결국 마음으로부터 극복하지 못하고 금각사에 불을 지르고 마니까

가시와기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던진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한다
깅가쿠지에 불을 지를 "나"의 마음을 읽은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충고를 던진다
아마도 "내"가 인식 대신 행위에 의존할 거라는 느낌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가시와기는 "나"와 도제 생활을 함께 하던 쯔루가와가 보낸 편지들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쯔루가와는 가시와기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쯔루가와를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상처가 없는 영혼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는 놀라운 고민을 불구자인 쯔루가와에게 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쯔루가와는 말더듬이인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만, 가시와기의 독설을 싫어해 그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가시와기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인생의 통찰력 면에서 가시와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가시와기의 인간성 자체는 경멸하지만 연애 상담 면에서만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행위 대신 인식을 바꾸라는 가시와기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 "행위" 를 실행하고 만다
자살을 한 것이다

가시와기는 독특한 캐릭터다
그는 불구인 신체를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결점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다
자기 결점을 똑바로 바라보고 남에게도 아무 감정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뻔뻔해진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상대의 결점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미 나 자신의 결점을 세상에 까발릴 수 있는 베짱이라면 거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는 놀랍게도 그 불구인 다리를 이용해 여자를 꼬신다
아마 생긴 건 잘났을 것이고 말도 잘했을 것이다
말솜씨와 얼굴을 이용해 접근한 후 여자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그는 여자와 즐긴 후 미련없이 차 버림으로써 자신이 여자에게 매달릴 수도 있는 비참한 상황을 모면한다
오래 사귀게 되면 여자가 질릴 것이고 더 이상 동정심을 써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일탈을 시도하기 위해 돈을 빌릴 때도 선선히 꾸어 주지만, 차용 증서까지 쓰게 한다
"나"를 친구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마도 누구에게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가타와시는 인생을 냉정한 눈으로 보는 만큼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감정 따위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솔직히 "나"에게 계속 이자와 원금을 요구하는 걸 보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너 역시 잘난 척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인간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노사에게 돈을 받아낸 후 "나"에게 인식과 행위의 차이를 충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그의 그릇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는 인생에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 같다

절의 주지 스님인 노사에 관한 묘사도 인상 깊었다
일본의 중들은 결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관계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
노사는 독신이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해야 한다
어머니는 "내"가 노사의 후계자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정작 "나"는 노사를 경멸한다
사실 노사의 모습은 일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일 수 있다
종교적인 지위를 이용해 절이나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시주받은 돈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는 모습!!
종교인이라는 말 자체가 직업을 의미한다면 어쩔 수 없는 현상 아닌가
노사는 결혼을 하지 않은 대신 술집 여성들을 끼고 논다
"나"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위선적인 노사를 마음으로부터 경멸하지만 그의 총애를 받아야 후계자가 될 수 있다
이 갈등을 괴로워 하다가 결국 "나"는 노사가 데리고 논 술집 여자의 사진을 노사에게 보내질 않나, 대학 수업을 빠지질 않나 어떻게 해서든 일탈을 저지르려고 애쓴다
완전히 눈 밖에 나버려야 일말의 기대마저도 포기할 것 같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만약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주지가 되라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어머니를 증오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기대로부터 훨씬 자유로웠다

"나"는 한 때 노사를 죽일 생각도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내 손으로 해치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절대미의 존재가 아니므로 불태울 가치조차 없다
반면 금각사라는 건축물은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미의 상징이므로 불태울 가치가 있다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금각사를 불태우면서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가 죽으려고 했으나 불행히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계획을 바꿔 산으로 도망치고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면서 살아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충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진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반면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난 후 충동감이 해소되면 그 때부터는 현실을 직시하고 살 궁리를 찾게 된다
주인공 역시 절대미의 상징인 금각사를 불태울 때까지만 해도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막상 그 절이 사라져 가자 현실을 깨닫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주인공은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자위대의 결성을 외치며 할복 자살한 저자의 특이한 이력과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절대미의 세계에 집착하는 저자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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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12-0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토에 갔을때 금각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너무 금칠을 해놔서 ...영.

미시마 유키오의 전력에 대한 편견땜에 그의 책은 한권도 본적이 없습니다.님의 리뷰에 깐깐한 별점 평가를 유추해볼때 다섯은 상당히 좋은 책이 아닐까 하는데 .. 관심이 아주 많이 가는군요.잘봤습니다.

marine 2004-12-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아주 인상깊게 본 소설입니다 전 일단 작가는 문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미려한 문장이 돋보인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각사로 대표되는 절대미, 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의 추구, 이런 것들이 잘 어우러져 있답니다 재밌는 소설입니다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