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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밀레니엄 북스 31
제인 오스틴 지음, 성기조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9월
평점 :
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결론은 다소 실망스럽다
솔직히 재밌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18세기 영국 사회의 결혼 풍속도를 엿보는 재미는 있다
그 당시 시대상을 알려면 소설책을 읽으라는 말은 이 책에 딱 들어맞는다
왜 이 책이 고전이 됐을까?
겨우 21세 때 초고를 쓴 후 36세 때 출간하기까지 여러 번 수정 작업을 거쳤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통속 소설과 고전과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있는 것 같다
젊은 여자 작가의 가벼운 애정 스케치라고 해야 하나?
물론 지나치게 통속적인 줄거리 따위는 없다
그런 담백한 점이 마음에 들기는 하다
그렇지만 고전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 나에게, 이런 가벼운 필체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위대한 개츠비" 나 "이방인" 혹은 "파리 대왕" 처럼 현대 소설들은 장중한 문체로 승부를 내지 않나 보다
소설의 내용 뿐 아니라 문체도 중요하다고 보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이런 가벼운 문체에는 감동하기 힘들 수 밖에...
엘리자베드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다
언니 제인은 착한 여자 컴플렉스에 걸렸거나 아니면 너무 순진해서 사람을 무조건 좋은 쪽으로만 보는, 어찌 보면 좀 답답한 여자다
막내 리디아는 열 다섯에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간 어처구니 없는 여자애다
로미오와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 줄리엣이 겨우 열 세살이었다고 하지만, 18세기 영국에서 15세면 결혼해도 괜찮은 나이였나 보다
오래 못 살아서 조혼이 유행했을까?
그러고 보면 이들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나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학교가 생긴 게, 혹은 학교에 당연히 다닌다는 개념이 생긴 게 얼마 안 됐나 보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200년 전인데도 소설에는 학교라는 교육 기관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긴 우리나라로 치면 영,정조 시대니까 지금과 다른 게 당연하긴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도 참 옛날 이야기다
서양 소설은 근대 소설이라고 해도 왠지 현대 소설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다
서구식으로 현대화가 진행되서 그런가?
영정조 시대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오만과 편견" 이 이 정도의 현대성을 갖는 것도 신기한 일이긴 하다
당시 써진 우리 고전 소설은 아예 공감 자체가 안 되니까 말이다
결혼은 정말 사회적 결합인가 보다
하긴 두 사람만의 사랑이 전부라면 굳이 결혼이라는 복잡한 예식을 치룰 필요도 없다
연애와 결혼이 별개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다는 말은 명백히 무책임한 얘기다
본성에 어긋나지만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 있는 파트너들을 포기하고 한 사람과 평생 살겠다고 만인 앞에서 서약하는 게 아닌가?
연애 결혼이란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생긴 새로운 결혼 제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 소설을 보면 재산과 신분, 영향력 있는 친척 등 결혼의 외적 조건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심지어 가장 분별력 있게 그려진 주인공 엘리자베드 역시 위캄이 청지기의 아들이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와의 결혼을 쉽게 고려하지 않을 정도다
위캄이 리디아를 데리고 도망간 것은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지참금을 얼마 정도 가져 오면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그 액수가 적은 것에 감격한다
너무 어이가 없어 당황스럽기까지 한 내용이었다
딸을 데리고 도망간 것도 황당한데, 감히 지참금을 요구하다니!
그런데 가족이란 사람들은 그 지참금이 적다고 횡재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설정이다
여자는 지참금을 들고 오고, 남자는 평생 그녀를 먹여 살리는 일종의 계약이었나 보다
지참금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온다
평범한 가문의 딸인 엘리자베드는 지참금을 많이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남자들이 자기와 결혼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돈과 사랑에 대한 함수 관계는 비단 요즘의 문제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다섯 딸의 어머니 베네트 여사는 속물 중의 속물로 나온다
그녀는 제일 예쁜 큰 딸 제인을 부자인 빙리와 결혼시키려고 애쓰고 막내 리디아가 위캄과 도망갔을 때도 지참금을 적게 요구한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기뻐한다
부유한 다아시가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싫어하지만 둘째 엘리자베드에게 청혼한 사실을 알고 얼마나 큰 횡재를 했냐고 금방 자세를 바꾼다
다아시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어머니를 엘리자베드는 한심하게 쳐다 본다
혹시 사윗감을 계속 싫어하면 어쩌나 고민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 베네트씨는 좀 낫다
엘리자베드가 콜린즈에게 청혼받았을 때 비록 그가 부자지만 인격이 형편없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사실 그 집안의 땅은 베네트가 죽고 나면 콜린즈에게 상속될 예정이었으므로 베네트 여사는 엘리자베드에게 청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베필이라고 승낙을 거부한다
부자인 다아시가 청혼했을 때도 평소 그녀가 그의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던 걸 기억하고서, 넌 네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충고한다
이 정도 분별력을 가진 부모라면 자식이 존경할 만 하다
그렇다고 베네트 여사가 자식 앞날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다소 속물적이긴 한데, 베네트 여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결혼이란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일생을 편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사윗감을 볼 때 재산을 최우선시 할 뿐이다
저자 역시 베네트 여사를 나쁘게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철이 좀 없다는 식으로만 얘기한다
당시 가치관이 결혼은 돈과 지위와 신분을 보고 한다는 관념이 강했던 것 같다
빙리와 제인이 맺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빙리가 일방적으로 마을을 떠난 후 둘의 관계가 끊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랬다
점잖게 묘사된 빙리가 실은 난봉꾼으로 제인을 데리고 논 건가?
아니면 숙녀에 대한 단순한 호의를 제인이 오해한 건가?
빙리의 여동생은 제인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정작 그녀 대신 부자인 다아시의 여동생과 오빠가 맺어지길 노골적으로 제인에게 말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쩌면 친구로서 제인은 좋지만, 올케로서는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제인이 아름답고 착하지만 돈이 없으니까 오빠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엘리자베드는 그녀의 위선을 간파하고 교제를 끊으라고 하지만,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제인은 빙리와 헤어지더라도 그의 동생과는 계속 좋은 관계를 맺길 원한다
또 나중에 둘이 결혼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제인은 막연히 시누이와의 관계가 좋아지리라 믿어 버린다
도대체 이 소설에는 복잡할 게 없다
원래 당시 사교계가 왠만한 것은 이해하는 분위기였는지, 아니면 오스틴 자체가 복잡한 갈등 구조를 싫어하고 주변 상황에 크게 상심하지 않는 캐릭터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건 마음에 든다
일반적으로 갈등 구조 유발을 위해 등장 인물간의 지나친 신경전이 벌어지곤 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참 담백하다
엘리자베드는 자신에게 좋은 과거만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다아시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원래 잊고 싶어 하는 거라고 답한다
마음에 드는 문답이다
엘리자베드는 다아시의 이모인 드 버그 부인에게 당당히 맞선다
사촌간의 결혼도 흔했는지 (하긴 찰스 다윈도 사촌 동생과 결혼했다) 그녀는 자기 딸과 다아시를 맺어 주려고 한다
자매끼리 서로 자기 자식을 맺어 주자고 약속하는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진다
우리도 사촌끼리 결혼할 수 있다면 가족의 범위가 훨씬 더 확대될텐데...
드 버그 부인은 감히 너 같은 게 다아시의 베필이 될 수 없다고 모욕을 주지만, 엘리자베드는 전혀 기죽지 않고 다아시가 선택할 문제라고 대꾸한다
결혼 문제가 나오기 전,드 버그 부인의 화려한 저택에 초대받았을 때도 엘리자베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부잣집 풍경을 즐긴다
가정 교사가 없어서 안됐다는 부인의 말에 배울 건 다 배웠다고 아무 모욕감 없이 말하는 그 여유라니!!
대단한 후원인을 얻었다고 드 버그 부인을 하늘 같이 받으는 콜린즈와 왜 이렇게 비교되는지, 그녀가 콜린즈를 택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만약 우리나라 소설이나 드라마였으면 드 버그 부인이 결혼을 방해할 것이고 다아시는 이모를 설득하기 위해 괴로워 할 것이다
대체 성인인 다아시가 왜 이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데도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극적 갈등 구조를 위해 사실은 별 영향력도 없는 가족의 허락을 얻기 위해 애를 쓴다
다아시는 결혼한다는 편지 한 장을 드 버그 부인에게 보내므로써 간단히 해결한다
이게 정상 아닌가?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다들 마마보이 같다
성인이면서도 자기가 선택한 결혼을 책임지지 못하는 어린애들 같다
물론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억지로 설정한 거겠지만 말이다
(일본 드라마는 아예 가족은 등장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청춘물에 출연하는 배우 수도 적고 횟수도 아주 짧다고 한다 산뜻하게 남녀 간의 사랑에만 집중한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