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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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사실 단편으로 이름을 알린 것을 생각하면 약간 의외의 늦은 작품집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단편집 속에 나오는 제목 <누군가를 만났어>로 출간된 작품집이었다. 이것은 세 작가의 공동 작품집이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때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다른 단편집에서 그의 재능을 다시 확인했다. 그 공동 작품집에 같이 이름을 올린 김보영이 최근 두 권의 작품집을 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 공동 작품집이 지닌 매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번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이 그의 작품 중 일부임을 생각하면 김보영처럼 언젠간 모든 단편들이 출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단편집엔 여덟 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크레인 크레인>은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다.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게 된 여자를 쫓아 중국에 가고, 그녀가 사는 마을에서 본 이상한 장면에 놀란다. 처음엔 이 장면을 보면서 작가가 중국을 우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뒤로 가면서 비약이 발생하고 분위기가 다르게 바뀐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 중 유일하게 처음으로 발표된 것이다. 다시 읽은 <누군가를 만났어>는 역시 흥미롭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른 sf소설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그가 느낀 행복이 가슴 한켠으로 파고든다.

표제작 <안녕, 인공존재!>는 난해하다. 동시에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존재성 제품이란 기발한 발상을 통해 상실과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문구가 제품 설명서를 통해 해석될 때 아직 내공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인공존재를 태생적으로 외로운 물건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매뉴얼>은 다차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한 아이가 핸드폰 매뉴얼을 읽는데 그것은 매뉴얼 내용과 상관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사는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다른 세계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현실이 삶의 역설을 그대로 보여준다. 

<얼굴이 커졌다>는 한 저격수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 위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버린다. 그 후 그의 얼굴에 변화가 생긴다. 얼굴이 커진 것이다. 그는 커진 얼굴의 원인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프로가 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그가 죽이려는 사람들이나 그를 죽이려는 상대 저격수도 모두 얼굴이 커졌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불현듯이 깨닫는다. 행복. 그가 잊고 있던 단어다. 이것을 기억한 순간 주변에 머리가 커진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

<엄마의 설명력>은 현재의 과학을 뒤집어놓았다. 지동설을 하나의 음모로 만들고, 묵희를 통해 드러나는 엄마의 설명은 현실과 거짓을 경계를 왔다 갔다 한다. 진실 속에 거짓이 있고, 거짓 속에 진실이 자라 잡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혼란을 가져오지만 마지막의 멋진 반전은 즐거움을 준다. <마리오의 침대>는 한 남자의 고통스럽지만 사랑스런 잠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가 쓴 동화로 거대한 성공을 거둔 남자가 아내의 유별난 잠버릇 때문에 고생하는데 이것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재미있다.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은 합체로봇 이야기의 외양을 가진 우리 이야기다. 두 로봇이 합체를 하면서 거대한 적을 무찌른다는 설정인데 적이 거대해짐에 따라 합체하는 로봇수가 늘어난다. 처음엔 두 대가, 다음엔 세 대, 최종적으론 52만 대가 합체한다. 합체한 로봇이 점점 거대해지고 강해진다는 설정이 재미있다는 것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힌다. 52만 대가 합체한 리바이어던을 움직이는 것이 결국 소수고, 그 소수를 막기 위해 또 다른 소수가 싸우는 장면은 전체주의의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수에 의해 52만 명이 광기와 폭력으로 상대를 잔혹하고 처참하게 학살하는 장면은 섬뜩하고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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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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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처음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에 장편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읽은 청춘소설 <파랑이 진다>의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그 이미지 덕분인지 처음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호흡의 문장 때문에 조금 집중이 어려웠던 순간도 있다. 이런 이미지와 다른 문장을 조금씩 걷어내면서 읽다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의 소설을 만나게 된다. 푸름이 사라진 자리는 회색빛의 죽음과 추억이 대신 자리 잡고 있다.

네 편의 단편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 죽음과 추억이다. <환상의 빛>은 서른두 살이 된 여자가 회상과 현재를 통해 자살한 듯한 남편의 이유를 끝없이 묻고, 그 답을 갈구한다. 그 과정에 드러나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은 현재를 살짝 뒤흔들기도 한다. 매일 그 이유를 묻고, 감정을 소모하는 삶은 힘겹고 외롭다. 이 글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감정은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잔잔한 일상 속에도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 같은 일이 있음을 경계하는 것은 남편의 죽음 때문이다.

<밤 벚꽃>은 아들의 죽음과 전 남편의 방문과 한 남자의 일박을 통해 잊고 있던 추억과 감정을 되살린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죽은 아들. 직원과 바람피운 것 때문에 아내와 이혼한 후 새로운 여자와 결혼한 남편의 현실. 그녀가 내놓은 하숙 공고를 보고 하룻밤 잘 것을 요구하는 청년. 이 세 남자는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특히 갑자기 하룻밤 잘 수 있길 바라며 그 집 전자제품을 고치는 남자의 하룻밤 사연과 일은 아야코로 하여금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결코 밝지도 활기차지도 않은 그녀의 현실에 말이다.

<박쥐>는 우연히 만난 친구를 통해 오년 전에 죽은 친구 란도의 소식을 들으면서 시작한다. 자신이 만나는 여자와의 여행을 앞두고 이어지는 과거의 회상은 역시 란도와의 마지막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만난 여자와 현재의 그녀가 살짝 겹쳐지는 순간이 발생한다. 그 순간 박쥐가 날아다닌다. 이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면서 미래에 펼쳐질 요코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짧은 이야기 속에 만나는 십대의 삶이 현재와 다른 매력을 던져준다.

마지막 <침대차>는 그 기차 안에서 본 한 노인을 통해 초등학교 3학년으로 그를 데리고 간다. 그 앞에 그가 왜 침대차를 타게 되었는지, 그의 현재 삶이 어떤지 알려준다. 이런 작업을 한 후 마주한 그 시절 사고는 또 다른 사고로 이어지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월급쟁이의 삶을 간결하게 그려내면서 살아가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묻는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이 그 답을 찾기 위한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그 누군가가 한 말처럼.

얇은 분량에 빠르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호흡이 다른 문장과 죽음과 추억과 빛이 만들어내는 환상들이 그 시간을 더디게 가게 만든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문장의 리듬을 따라가고, 잔잔히 흐르는 감정을 느끼고, 그 밑으로 흐르는 또 다른 감정을 읽는다. 죽음의 추억과 기억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이것들은 현실 속에서 불안과 외로움을 느낄 때면 부쩍 더 힘을 발휘한다. 작가는 그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 감정을 똑바로 보고, 잊고 있던 것들을 되살린다. 최근에 읽은 일본 소설들과 다른 느낌과 재미를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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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메리의 아기 밀리언셀러 클럽 57
아이라 레빈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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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영화로 먼저 본 소설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표작 중 한 편이다. 아직도 마지막 장면은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었는데 원작의 이미지가 잘 살아있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인상들이 가끔 원작 소설을 읽을 때 방해가 되기도 하는데 이번 소설은 약간 예외다. 사건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기보다 로즈메리의 심리에 더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그 심리 묘사가 영화 속 리듬과 묘하게 연결된다. 그래서인지 몰입도가 더 높다.

로즈메리와 가이 우드하우스 부부는 이사하려고 한다. 이전부터 들어가려고 했던 브램퍼드는 빈자리가 나지 않아 다른 아파트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때 브램퍼드에서 연락이 온다. 이미 다른 아파트와 계약을 한 상태다. 하지만 이전부터 살고 싶었던 집이다. 그냥 구경이라도 한 번 가자고 로즈메리가 말한다. 더 좋은 시설의 아파트를 계약했지만 그녀는 이 집에 끌린다. 거짓말로 이전 집 계약을 해지하고 브램퍼드에 들어온다. 이 선택이 이 부부의 삶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우드하우스 부부가 들어간 집은 예전에 노부인이 죽었던 집이다. 이 아파트는 예전부터 좋지 않는 소문이 있다. 로즈메리의 아버지 같은 은인 허치가 이 소식을 듣고 놀란다. 이상한 소문들과 뉴스가 그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과거 좋지 않는 뉴스 등을 이 부부에게 알려주지만 이미 푹 빠진 이들에겐 소귀에 경 읽기와 다름없다. 배우인 가이가 조금 더 성공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다. 이런 여유와 상관없이 허치에게 들은 소문들은 로즈메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불안 속에 사귀었던 옆집 아가씨 테리가 어느 날 밤 자살을 한다. 무서움이 몸속으로 조금씩 파고들기 시작한다.

테리의 죽음 속에서 그녀를 돌보던 로만 부부를 만난다. 이 만남은 처음엔 그냥 이웃 간의 의례적인 것이었다. 옆집 할머니의 방문이 달갑지 않지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들인다. 이 초대가 그들이 선택한 두 번째 잘못이다. 가이도 처음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 끝내고 다음을 기약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가이는 로만과 친해지고 그 집과 왕래가 많아진다. 이 만남이 계속 이어진 것은 로만이 가진 인맥을 이용해 배우로서 성공하고픈 마음이 강한 가이의 욕심과 로만의 욕망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 결합이 단단해질수록 로즈메리의 삶은 더욱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잘 생기고 능력 있는 가이를 붙잡기 위해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던 로즈메리지만 가이는 아이를 원치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취한 밤 가이가 그녀를 탐한다. 그 상황을 그녀는 꿈처럼 느끼면서 받아들인다. 그 꿈속엔 가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만 부부 외에 다른 입주자들도 같이 있다. 아주 음란하고 괴이한 장면이다.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가이의 행동을 탓하지만 부부란 관계 때문에 그냥 넘어간다. 바로 이 장면이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사건과 상황의 원인을 제공한다. 

사실 이 이전까지가 사전포석이었다면 이후 임신한 것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녀의 임신과 산부인과 의사 소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준비된 상황이다. 이 상황을 그녀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삶은 더욱 고통스럽고 불안하다. 이 불안감은 고통과 함께 점점 자란다. 이 상황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일들에서도 사건, 사고가 생긴다. 가이의 경쟁자는 눈이 멀고, 가이는 승승장구한다. 임신한 그녀를 방문한 허치는 그녀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나오지 못한다. 전날 실신한 것이다. 이런 사건들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의심을 싹 틔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던가! 친절한 의사와 이웃에 대해 의심을 품고, 불안이 점점 자라면서 삶은 위축된다. 허치의 죽음과 그가 남긴 책은 이런 불안을 사실로 만든다. 이런 심리 과정을 작가는 아주 뛰어나게 그려내면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책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악마주의가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로즈메리는 그 사실을 하나씩 밝혀낸다. 하지만 그녀를 촘촘히 싸고 있는 환경과 감시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뒤로 가면서 그녀가 마주한 현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리고 과연 그녀의 아기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다시금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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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신화 작가의 발견 4
김보영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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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을 처음 만난 것은 <누군가를 만났어>란 작품집을 통해서였다. 당시 한국 sf문학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던 나에게 이 작품집은 큰 충격을 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수준 높은 구성과 전개를 펼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 작품집에 이름을 올린 세 사람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거나 앤솔로지 중심의 단편만 나오면서 아쉬움을 주었다. 그러다가 특히 많은 관심을 두었던 배명훈의 장편이 나왔고, 이번엔 김보영의 단편들이 두 권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두 권으로 묶인 책 중에서 첫 권은 앞의 몇 편을 제외하면 이미 <누군가를 만났어>에 실린 작품이다. 아직 읽지 못한 초기작 몇 편이 나를 유혹하는데 차후 읽을 예정이다. 이번 중단편선은 sf와 판타지의 교차점에 있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작품 중에서 하드sf가 준 재미가 무척 강렬했던 것을 생각하면 좀 의외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녀만의 특성들이 묻어나고,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나도 모르게 그 상황과 설정에 집중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들은 앞의 세 작품이다. <진화신화>는 <삼국사기> 중 고구려본기 제6대 태조대왕 실록에서 발췌한 사실 몇 개에서 시작한다. 역사적 사실은 작가의 상상력을 거치면서 진화한다. 이 진화는 종의 진화로 이어지면서 가속화되고, 민초의 아픔과 지배자의 탐욕이 맞물리면서 역사는 새로운 길로 들어간다. <땅 밑에>는 하강자라는 존재를 통해 지하 탐험이 이어지고, 그 깊고 끝을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도전과 탐험은 긴장감을 불러온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진다. 작가는 하강자를 산악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데 개인적으로 이 단편을 읽으면서 동굴탐험가들이 연상되었다.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는 이전에 읽은 해외걸작 sf단편선 중 한 편이 연상된다. 그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에선 제목인 문장을 통해 상상력이 펼쳐지고, 한 특수기면증 환자의 편지를 통해 그 세계를 그려낸다. 밤도 없고, 잠도 없는 세계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병인 그 행성에서 2만 5천 광년을 넘어온 문장이 자신의 병을 새롭게 돌아보고, 다른 문화와 환경이 빚어내는 현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몽중몽>은 <스크립터>와 더불어 가장 어렵게 읽었다. 이 두 작품은 인간, 존재, 추상적 관념 등이 뒤섞여 있는데 충분히 집중하지 못해서인지 그 재미를 완전하게 누리지 못했다. 꿈이 이어지고, 깨고,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나 게임 속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와 존재를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어려움을 겪었다. 

<거울애>는 거울의 이미지를 사람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능력을 가진 한 소녀 소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섬뜩한 느낌을 준다. 동시에 나의 감정이 만약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0과 1사이>는 누구나 겪게 되는 학창시절을 둘러싼 이야기인데 현실에 대한 풍자적 모습이 강하게 담겨 있다. 양자역학과 시간여행기를 통해 그려지는 미래 속의 현실은 현실의 그림자이자 가능성이 사라진 동시에 열린 시간이다. 하지만 어릴 때 경험했던 일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마지막 늑대>는 먼 미래 이야기다. 용이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을 애완동물처럼 키운다. 이 애완동물 중 한 명이 늑대로 불리는 저항세력을 찾아오는 과정과 이유를 보여주는데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실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과 큰 차이를 보인다. 개인적으로 그 소녀의 성장을 다루면서 미래의 변화를 담은 장편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노인과 소년>은 한편의 우화를 읽는 느낌을 준다. 자기 확신과 강력한 의지와 뚜렷한 목적의식이 어떤 의미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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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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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속도감으로 읽히고, 몰입하게 만든다. 프랑스에서 더 인기 있다는 말에 살짝 더딘 속도로 읽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히 기우였다. 세 장으로 나누어진 이야기 속에서 변신할 수밖에 없는 벤의 상황은 각각 다른 느낌과 재미를 준다. 성공한 월가의 상속 변호사에서 살인자로, 살인자에서 죽은 사람으로, 자신이 죽인 인물로 살아가면서 우연히 성공한 사진작가로 변신하는데 이 과정들이 세밀하고, 그 상황과 분위기를 잘 연출하고 있다. 

벤은 월가의 성공한 상속 변호사다. 하지만 그의 꿈은 사진작가다. 젊은 시절 잠시 사진작가를 꿈꾸며 살아보지만 실패한다. 꿈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아버지가 제시한 현실에 안주한다. 아름다운 아내와 두 아들을 가진 중류층 이상의 가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삶이 풍족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아내 베시는 작가의 꿈을 꾸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가정주부에 머문다. 자신의 삶이 변한 것을 남편 탓으로 돌리지만 그녀 또한 벤처럼 이상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안주한 것이다. 

벤의 삶도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베시의 삶은 더욱 그렇다. 안정적이고 화목해 보이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그 이면은 남과 다를 바가 없다. 아내와의 화해를 바라지만 이미 틀어진 베시가 그를 계속 무시하고 냉대한다. 이상한 낌새를 발견한다.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 잠시의 불륜이 아니다. 분노가 치솟지만 이성으로 억누른다. 하지만 술은 이성을 잃게 만들고, 그 때문에 아내는 더욱 멀어진다. 거기에 불륜상대가 그를 자극한다. 이미 자신을 잃고, 격해있던 그는 우발적으로 살인한다. 이 첫 장에서 작가는 한 중산층 남자와 가정의 허상을 벗겨내고, 인간이 지닌 나약한 심성과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 장으로 가면 한 편의 스릴러 같다. 그가 죽인 사람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마저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자세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불안과 긴장이 고조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 자신의 죽음을 포장하기 위한 노력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분명 살인자가 분명한데 왠지 모르게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그의 도망이 성공하길 바란다. 자신이 살인자로 잡히고, 아이들이 살인자의 아이로 남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의 행동과 대처는 냉정하고 치밀하다. 다른 사람으로 서류상 변했다고 하지만 그 불안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장은 사실 가장 흡입력이 강하다. 불안한 도주 속에 잠시 머문 마을에서 찍은 사진 때문에 호평을 받고,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이 만남이 화재 현장을 마주하게 하고, 멋진 현장 사진을 찍게 한다. 젊은 시절 그렇게 갈망하던 성공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는 이미 벤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는 것은 새로운 삶도 과거의 삶도 모두 변한다는 의미다. 꿈꾸던 성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이미 그가 살인을 하고, 자신을 버리던 순간 예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주 멋진 사진을 찍게 된 계기도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한 현실은 뒤틀린 삶의 한 단면을 잘 표현해준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지우고,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떨 때는 분명히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 변신이 알려졌을 때 문제가 될 수 있다면 어떨까? 혹은 그의 잘못을 아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또 어떨까? 변신이 즐거움으로 가기 위해서는 짧아야 하고, 그 순간들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벤은 그 순간들을 즐길 수 없다. 이 상황의 변화를 작가는 기발하면서도 빠르고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밖으로 드러난 일상 그 뒤에 숨겨진 삶의 진짜 모습을 포착하는데 이것은 좋은 사진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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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해요 2010-07-01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