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수업
아니샤 라카니 지음, 이원경 옮김 / 김영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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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교육계를 이야기할 때 사립학교는 빠지지 않는 주제다. 늘 공교육이 무너진 미국의 현실을 보면서 놀라곤 했는데 최근 한국도 그런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아니 이미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미국 교사의 급여수준이다. 교사의 급여가 청소부보다 적고, 방학이나 평소에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이런 사실을 들으면서 왜 미국의 학력이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되었다. 부모들이 공립학교를 배척하고,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단순히 안전문제만이 아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특목고에 열광하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미국 대학을 이야기할 때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많은 수의 학생을 부유층 자녀들의 기부입학으로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그 돈으로 각 지역을 뛰어난 학생을 장학생으로 뽑아 학교의 이름을 떨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아이비리그 출신이면 그 자식도 아이비리그를 나와 부를 대물림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소위 말하는 상류층으로 군림한다. 이런 현실이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된다.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아이비리그에 입학하고, 졸업하여 자신이 물려받은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바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현실의 일부만 소설 속에서 빠르게 진행하면서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한국도 이미 상위 몇 개 대학에서 강남 부유층 출신을 우선적으로 선별하고 있는데 이것과 겹쳐지는 느낌이 든다.

소설은 참된 교사가 되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애나의 일 년을 담고 있다. 그 일 년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시간이다. 뛰어난 사립학교 랭던홀에 채용되었을 때만 해도 그녀의 신념은 순수하고 열정으로 가득했다. 첫 수업 후 그녀가 겪게 되는 수난은 현실에 대한 무지와 열정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었다고, 말도 없이 퀴즈를 내었다고 학부모들이 불평과 비난이 쇄도한다. 아이들 또한 수업에 대한 열정이 없다. 그러다 보게 되는 과외수업을 하는 랜디의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그녀의 일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되돌아오고, 그녀는 현실에 굴복한다.

과외에 대해 굴복했지만 그녀가 게임처럼 만들어가는 수업은 학생들의 열정을 자극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대성공이다. 하지만 이 성공이 오히려 부모들에게 불만과 불안을 가져다준다. 아이들이 밤늦게 몇 시간이고 이 수업준비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시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고, 일자리를 걱정하는 그녀는 신선한 수업 방식을 접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과외에 대한 유혹이 다가온다. 월급 1800달러에 집세 1200달러를 내고 나면 생활이 어려운 그녀에게 시간당 200불은 너무나도 강한 유혹이다. 이제 그녀는 달콤한 유혹에 빠지고, 그 돈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과외 때문에 부족한 수업준비를 자습이나 도서관 보내기 등으로 채운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의 이런 변신이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열광하게 만들고 인기를 더 높이게 한다.

본업보다 아르바이트가 더 많은 수입을 가져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소설은 그런 상황을 설정하고, 무너진 학교 교육의 풍경을 그려내면서 부유층의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 고가 브랜드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고, 손에선 최신 기기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자식에 대한 무한 신뢰는 비판이나 비평을 용납하지 않고, 달콤한 이야기만 요구한다. 숙제는 과외교사가 대신하고 그들은 점수만 받는다. 혹시 몇 시간 동안 책 한 권을 읽고 글을 써야 하면 부모들은 온갖 이유를 붙여 아이들이 왜 책을 읽을 수 없는지 말한다. 그 덕분에 과외교사들은 천 불 이상의 수입이 생긴다. 이제 모든 시간은 과외로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 바뀌고, 본연의 임무는 뒤로 밀린다. 

미국 사립학교의 이면과 사교육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는 즐겁고 재미있다. 그 속에 담긴 풍자와 사실은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특히 마지막에 데미언이 말하는 학생들의 입장은 선생들이나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할 문제다. 현실이 비록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말이다. 할리우드적인 진행과 설정과 마무리지만 빠르게 잘 읽히고 몰입도가 높아 단숨에 읽을 수 있다. 물론 교육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도 그 재미에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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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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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품에 대한 화려한 찬사들과 수상 경력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데뷔작임을 생각하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런 찬사들을 가슴 한 곳에 담고 읽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단한 작품임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엔 연쇄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착각을 했다. 하지만 계속 읽으면서 하나의 살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을 통해 몰락하고 있는 한 사회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그들의 행동과 심리에 완전히 동조를 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현실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고, 그 끝없어 보이는 삶의 왜곡과 상처들은 계속해서 가슴으로 파고든다.

처음에 아이작이 아버지 돈 4천불을 훔쳐 달아나려고 했을 때 어떤 삶이 앞으로 펼쳐질지 전혀 짐작도 못했다. 떠나기 전 그를 돌봐주고, 그가 가르쳐 무사히 졸업하게 한 학교 풋볼 영웅 포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이 만남과 잠시 동안의 동행이 이 두 남자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린다. 그것은 둘 중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잠시 화를 잘 참지 못하는 포의 기질과 차마 자신을 돌봐준 포를 버리지 못한 아이작의 우발적인 행동이 부랑자들의 도발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 우발적인 살인은 이제 둘만의 문제가 아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과 그 관계자 모두의 문제로 번진다.

처음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들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아이작, 그의 누나 리, 아버지 헨리, 포와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 그레이스를 좋아하는 경찰서장 해리스 등이다. 이들 중 역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아이작과 포다. 실제 살인을 한 사람은 아이작이지만 살인 현장과 증인으로 등장한 인물이 범인으로 가리킨 것은 포다. 그것은 포가 이전에 보여준 행동과 전과 덕분이다. 이 오해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 묘사를 통해 애증과 절망과 도덕심과 속죄 등과 뒤섞인다. 

뛰어난 지능이 있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작에 비해 그의 누나 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잘 맞추고 뛰어난 성적으로 예일 대학에 들어가 부유한 남편을 만난다. 이 둘의 현재 모습이 갈리게 된 분기점은 바로 엄마의 자살과 아버지의 산재다. 리는 가족의 어두운 그림자를 뿌리치고 자신의 삶을 찾아간 반면에 아이작은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썩혀버리고 있다. 그가 가출을 결심한 것은 성장을 향한 조그마한 도전이지만 그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를 뒤로 하고 그가 도망갔을 때 마주하는 현실들은 그가 얼마나 큰 보호 속에서 살았으며 세상에 대한 무지가 깊은 지 보여준다. 그리고 힘겨운 도망 속에서 자아와 자신을 일치시키고 성장하는 모습은 포의 성장과 같이 맞물려 한 편의 성장소설로도 해석이 가능하게 만든다.

아이작에 비해 포는 머리는 딸리지만 뛰어난 육체와 운동신경이 있다. 풋볼에 재능이 있지만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놓친다.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학창시절 영웅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보여준다. 대표적인 몰락은 여자들이 그를 대하는 방식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와 자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그녀들이 이제는 그가 애걸을 하여도 잘까 말까 한다. 현실의 높은 벽은 그들이 사회로 나오면서 더욱 높아지고, 한때의 열정은 현실 앞에 차갑게 식는다. 포의 심리를 따라가면 아직도 그 시절의 치기 혹은 영웅심이 남아있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작을 위해 그가 다문 입과 감옥에서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속에 내재한 연약함과 그것을 딛고 성장하는 그를 보게 된다.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도시로 옮겨가고 결혼했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마음이 빼앗긴 리나 역시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남편 버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자신의 삶을 수렁으로 밀어 넣은 그레이스나 이런 그레이스 때문에 위험한 일을 저지르는 서장 해리스 등도 이 사건을 통해 좀더 자신들의 현재와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삶이 선택의 연속이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처럼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은 냉혹하고 비정하다. 그들이 잠시 서글픈 희망을 품는 것도 황량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조그마한 시도다. 

작가는 “큰 문제들을 개인의 행동 탓으로 돌리는 것, 아메리칸 드림의 추악한 이면이었다.(349쪽)”고 말하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과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그려낸다. 몰락한 도시에 벌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끔찍하다. 경제적인 능력이 사라지고, 미래가 사라진 도시에서 희망마저 사라지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 개인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아이작과 포가 부랑자들을 만난 것도 바로 실업 때문이고, 이들의 부모에게 문제가 생긴 것도 철강 산업의 몰락과 관계있다. 이 몰락이 단지 인건비가 높고 노동조합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과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의 성장을 비교하면 얼마나 거짓인지 보여준다. 신자유주의가 내세운 거짓은 연쇄적으로 몰락한 도시들을 통해 새로운 절망과 서글픈 희망과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서 발생한 사건은 바로 이런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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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 1 환상 왕국 연대기 1
제로니모 스틸턴 지음, 이현경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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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환상 왕국 연대기 중 첫 번째 이야기다. 숲의 왕국이 검은 여왕에게 함락된 후 그곳을 탈출한 아기 요정 옴브로소의 활약을 그렸다. 그는 별들의 왕국에서 15세가 될 때까지 자란다. 그 후 숲의 왕국을 구하기 위해 문을 열고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왕국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가 보여주는 활약은 엄청난 것이 아니다. 아슬아슬한 모험이나 새롭게 엄청난 힘을 얻어서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다. 용기와 동료들의 도움으로 앞에 놓인 고난을 이겨낸다. 이 부분이 동양 판타지와 조금 다른 부분이다. 

대부분의 판타지 영웅들이 동료들의 도움으로 임무에 성공하듯이 이 소설에도 멋진 동료가 등장한다. 먼저 그와 같이 자란 별들의 왕국의 레굴루스다. 형제처럼 자랐고, 옴브로소와 동행하여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혼자 알지 못하는 미지의 왕국에 들어가 자신이 할 일을 찾아야 하는 옴브로소 입장에선 최고의 동료다. 또 다른 한 명도 역시 별들의 왕국에서 같이 자란 스피카다. 그녀는 레굴루스의 동생이다. 처음엔 함께 동행하지 못하지만 별들의 왕국에서 펼쳐 보여주는 그녀의 성장과 활약은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소설은 재미난 설정을 몇 개 보여준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문이다. 각 왕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문이 필수적이다. 각 왕국을 왕래하기 위해서 반드시 큰 용을 타고 가야 했다. 이 때문에 요정들은 넓고 많은 환상의 왕국 땅을 하나로 잇고, 평화와 지혜와 조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문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문을 통해 작고 어두운 왕국에 사는 마녀들이 악의 힘을 넓히기 위해 그 문을 드나든 것이다. 바로 이 문이 다른 왕국들의 함락과 침략을 막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 그리고 문을 여는 열쇠들이 등장하는데 아주 중요한 장치이자 다음 이야기에선 어떤 것이 열쇠로 나올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두 번째는 모두가 요정이란 것이다. 요정들의 왕국이고, 그들을 공격하는 인물들도 요정이거나 늑대로 불리는 존재다. 이런 설정은 배경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고, 혹시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마녀들의 수하로 나오는 존재가 늑대란 것은 늑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어린 용 졸파렐로는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고, 성장한 후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게 만든다.

마지막은 사냥꾼의 정체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요정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로 가면서 그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단순히 용을 잡기 위해 덫을 놓는 존재였던 그가 옴브로소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위험에 빠진 스피카를 구해준다. 뒤로 가면서 그의 정체가 밝혀지겠지만 머릿속을 스쳐지나 가는 인물이 한 명 있다. 그것이 맞는지 알고 싶고, 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여 이야기에 미스터리를 불어 넣을 지 궁금하다.

사실 처음에 이 소설이 만화인줄 알았다. 만화 컷을 보여줘서 더욱 그랬다. 원작에서도 이런 구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만화는 소설 속 이야기에서 생략된 것을 잘 보여주고 재미있다.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어딘가에서 본 듯한 장면이나 설정이 보이지만 나름대로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가 시리즈의 처음임을 생각하면 다음에 펼쳐질 이들의 활약이 더 기대된다. 도전과 모험을 통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그들의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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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구를 돌려라
칼럼 매캔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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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상 경력이 먼저 눈길을 끈다. 대단한 호평으로 가득한 기사들은 읽고 싶은 욕구를 솟구치게 만든다. 그러다 마주한 20세기 최고의 예술적 범죄란 문구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그 범죄가 예전에 얼핏 들은 뉴욕 무역센터 외줄타기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첫 문장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11쪽) 부터 시선을 끈다. 곡예사 필리프 프티의 감동 실화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하지만 소설은 이런 기대를 넘어 그 시대, 비슷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으로 이어지면서 전혀 다른 재미와 감동을 전해준다.

동생 코리건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필리프 프티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줄 알았다. 계속 읽는데 프티의 이야기가 없다. 그러면서 코리건의 삶을 설명하는 형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아일랜드에서 시작하여 뉴욕으로 이어진다. 프티는 언제 나오지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코리건의 삶 또한 흥미진진하다. 청빈과 이타주의로 가득한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것이 성인이 된 후부터라면 더 싶게 다가올 텐데 10대 초반부터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그 시간은 사제가 되어 뉴욕에 와서도 변화가 없다. 그리고 그 삶의 끝에서 또 다른 인연과 이야기가 펼쳐진다.

코리건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그와 이어지는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한 노부인 클레어 아들의 죽음이 나온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실과 아픔이 긴 추억과 회상을 거쳐 펼쳐진다. 아들 조슈아는 베트남 전쟁터에서 죽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도 아닌 카페에서 죽은 것이다. 이런 황당하고 안타까운 죽음은 또 다른 부인의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그들이 모여 죽은 아들을 회상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들이 느낀 혼란과 아픔과 죽음에 대한 부정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리고 “더 이상 거울을 들여다볼 수 없는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내보내 죽게 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헛됨을 한데 모으는 일이다.”(177쪽)란 말에선 전쟁의 본질과 그로 인해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을 느끼게 한다.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나오는 도중에 무역센터에서 줄은 탄 곡예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준비과정과 실행 등이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삽입된다. 이 놀라운 곡예가 펼쳐지던 순간의 장면과 그 경이로운 장면을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 속을 스쳐지나갔거나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의 시간도 같이 흘러간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스쳐지나가고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엮인다. 코리건의 차를 뒤에서 박았던 차 주인의 이야기, 코리건과 함께 탄 창녀 재니스의 엄마 창녀 틸리 이야기, 해킹을 즐기면서 경이로운 줄타기 곡예를 중계하는 아이들, 베트남 전쟁을 찬성했다가 그 전쟁으로 외동아들을 잃은 판사, 사제 코리건을 사랑에 빠트렸던 그의 애인, 베트남 전쟁으로 세 아들을 모두 잃은 흑인 노부인,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그 놀라운 줄타기 곡예와 코리건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이 관련성을 작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처럼 풀어내지만 이들은 엮이고 꼬이고 관계를 맺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 소설은 적지 않은 분량이고, 엄청난 가독성으로 재빨리 읽히는 책도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환경과 직업과 인종들을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삶에 한발 다가가게 만든다.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바로 주변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가 필리프 프티의 놀랍고 경이로운 줄타기를 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슬픔과 아픔과 상실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과 동일선상에 올려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지구가 돌고 있지만 그 돌고 있는 지구 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상실을 이겨내고, 계속 나아가는 그들이 한순간의 도전과 이벤트보다 더 위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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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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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대한민국의 욕망과 허영과 꿈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성공을 꿈꾸거나 성공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하지만 그곳이 이렇게 변한 것이 불과 30여년 정도에 불과하다면 조금 놀랄 일일까? 지금도 가끔 전철이나 다른 곳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강남이 예전에 얼마나 허허벌판이거나 볼 것 없는 농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 급속한 변화가 바로 한국의 발전과정과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지표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는 다섯 명을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와 자본주의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각각 다른 위치와 입장에서 자신들의 삶을 사는데 그들이 충동하고 교차하는 곳이 바로 강남이다. 강남이란 공간에서 그들이 마주하지만 이들을 이어주는 인물은 박선녀다. 예쁜 얼굴 때문에 스무 살에 소위 잘나가는 롬 살롱 프리랜스로 활동하게 되고, 그곳에 정착하여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러다 재벌급인 김진을 만나 세컨드가 되고, 한 단계 올라선 부의 쾌락을 즐긴다. 이런 삶의 역정은 그 시대에 예쁜 여자가 가장 빨리 성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백화점의 붕괴는 이런 삶의 붕괴를 의미한다.

김진은 해방 후 친일파가 어떤 모습으로 변신하였고, 그들이 어떻게 이 시대의 주류로 생존하면서 기득권층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삶의 역정은 그의 전력과 맞물리면서 근,현대 정치사의 굵직한 사실들을 건드린다. 왜 해방 후 친일파가 유지되었는지. 그들이 미군정과 엮이면서 어떻게 자리를 유지했는지. 한때 친일파였다가 공산당이었던 박정희의 변절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술이 친일파들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해방 후 부의 축적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기보다 정경유착의 유산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경유착이 영원하지 않고,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도 같이 보여준다.

복덕방을 통해 부를 축척한 심남수는 70년대 부동산 불패 현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딱지와 미등기 거래를 통해 뻥튀기처럼 부풀어 오르는 땅값 상승과 고위층에서 흘러나오는 개발 정보를 통한 투기는 왜 우리가 부동산에 목맬 수밖에 없는지 보여준다. 업자들과 복부인들이 자전 거래를 통해 가격을 올리고, 그 거래에 막차를 타는 서민들의 비애가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된다. 자신들의 수십 년 치 소득을 쏟아 부어도 결코 살 수 없는 부동산을 생각하면 이들의 행위가 얼마나 부도덕한지, 반시장적인지, 많은 사회문제를 품고 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부동산 불패 신화 맹신의 결말에 대해서도 말이다. 심남수는 박선녀와 거의 반 동거 하다시피 한 인물이다.

홍양태는 박선녀가 나이트클럽을 운영할 때 만난 깡패 두목이다. 한때 전국을 휘어잡은 조양은을 모델로 했다. 그가 어떻게 성장하고 몰락했는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보여준다. 이들의 성장은 결코 그들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정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비정하고 잔인한 조폭의 세계가 낱낱이 밝혀지는데 그 속에서 만난 조폭들의 동향과 권력과의 유착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년이 결코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것을 보면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적들의 급습이나 살해 위협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기고, 불안과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박선녀와 같이 붕괴된 현장에 매몰된 임정아는 사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가난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매몰된 현장의 생존자라는 의미에서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현실과 미래엔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박선녀의 호의를 거절하는 당찬 모습에선 굳센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그녀 집안의 과거를 통해 드러나는 일반 민중의 삶은 위정자들의 거짓과 위선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그녀 부모를 통해 드러나는 도시빈민의 삶은 지금도 현재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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