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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배명훈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사실 단편으로 이름을 알린 것을 생각하면 약간 의외의 늦은 작품집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단편집 속에 나오는 제목 <누군가를 만났어>로 출간된 작품집이었다. 이것은 세 작가의 공동 작품집이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때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다른 단편집에서 그의 재능을 다시 확인했다. 그 공동 작품집에 같이 이름을 올린 김보영이 최근 두 권의 작품집을 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 공동 작품집이 지닌 매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번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이 그의 작품 중 일부임을 생각하면 김보영처럼 언젠간 모든 단편들이 출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단편집엔 여덟 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크레인 크레인>은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다.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게 된 여자를 쫓아 중국에 가고, 그녀가 사는 마을에서 본 이상한 장면에 놀란다. 처음엔 이 장면을 보면서 작가가 중국을 우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뒤로 가면서 비약이 발생하고 분위기가 다르게 바뀐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 중 유일하게 처음으로 발표된 것이다. 다시 읽은 <누군가를 만났어>는 역시 흥미롭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른 sf소설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그가 느낀 행복이 가슴 한켠으로 파고든다.
표제작 <안녕, 인공존재!>는 난해하다. 동시에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존재성 제품이란 기발한 발상을 통해 상실과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문구가 제품 설명서를 통해 해석될 때 아직 내공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인공존재를 태생적으로 외로운 물건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매뉴얼>은 다차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한 아이가 핸드폰 매뉴얼을 읽는데 그것은 매뉴얼 내용과 상관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사는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다른 세계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현실이 삶의 역설을 그대로 보여준다.
<얼굴이 커졌다>는 한 저격수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 위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버린다. 그 후 그의 얼굴에 변화가 생긴다. 얼굴이 커진 것이다. 그는 커진 얼굴의 원인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프로가 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그가 죽이려는 사람들이나 그를 죽이려는 상대 저격수도 모두 얼굴이 커졌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불현듯이 깨닫는다. 행복. 그가 잊고 있던 단어다. 이것을 기억한 순간 주변에 머리가 커진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
<엄마의 설명력>은 현재의 과학을 뒤집어놓았다. 지동설을 하나의 음모로 만들고, 묵희를 통해 드러나는 엄마의 설명은 현실과 거짓을 경계를 왔다 갔다 한다. 진실 속에 거짓이 있고, 거짓 속에 진실이 자라 잡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혼란을 가져오지만 마지막의 멋진 반전은 즐거움을 준다. <마리오의 침대>는 한 남자의 고통스럽지만 사랑스런 잠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가 쓴 동화로 거대한 성공을 거둔 남자가 아내의 유별난 잠버릇 때문에 고생하는데 이것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재미있다.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은 합체로봇 이야기의 외양을 가진 우리 이야기다. 두 로봇이 합체를 하면서 거대한 적을 무찌른다는 설정인데 적이 거대해짐에 따라 합체하는 로봇수가 늘어난다. 처음엔 두 대가, 다음엔 세 대, 최종적으론 52만 대가 합체한다. 합체한 로봇이 점점 거대해지고 강해진다는 설정이 재미있다는 것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힌다. 52만 대가 합체한 리바이어던을 움직이는 것이 결국 소수고, 그 소수를 막기 위해 또 다른 소수가 싸우는 장면은 전체주의의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수에 의해 52만 명이 광기와 폭력으로 상대를 잔혹하고 처참하게 학살하는 장면은 섬뜩하고 무시무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