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네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처음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에 장편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읽은 청춘소설 <파랑이 진다>의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그 이미지 덕분인지 처음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호흡의 문장 때문에 조금 집중이 어려웠던 순간도 있다. 이런 이미지와 다른 문장을 조금씩 걷어내면서 읽다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의 소설을 만나게 된다. 푸름이 사라진 자리는 회색빛의 죽음과 추억이 대신 자리 잡고 있다.

네 편의 단편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 죽음과 추억이다. <환상의 빛>은 서른두 살이 된 여자가 회상과 현재를 통해 자살한 듯한 남편의 이유를 끝없이 묻고, 그 답을 갈구한다. 그 과정에 드러나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은 현재를 살짝 뒤흔들기도 한다. 매일 그 이유를 묻고, 감정을 소모하는 삶은 힘겹고 외롭다. 이 글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감정은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잔잔한 일상 속에도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 같은 일이 있음을 경계하는 것은 남편의 죽음 때문이다.

<밤 벚꽃>은 아들의 죽음과 전 남편의 방문과 한 남자의 일박을 통해 잊고 있던 추억과 감정을 되살린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죽은 아들. 직원과 바람피운 것 때문에 아내와 이혼한 후 새로운 여자와 결혼한 남편의 현실. 그녀가 내놓은 하숙 공고를 보고 하룻밤 잘 것을 요구하는 청년. 이 세 남자는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특히 갑자기 하룻밤 잘 수 있길 바라며 그 집 전자제품을 고치는 남자의 하룻밤 사연과 일은 아야코로 하여금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결코 밝지도 활기차지도 않은 그녀의 현실에 말이다.

<박쥐>는 우연히 만난 친구를 통해 오년 전에 죽은 친구 란도의 소식을 들으면서 시작한다. 자신이 만나는 여자와의 여행을 앞두고 이어지는 과거의 회상은 역시 란도와의 마지막 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만난 여자와 현재의 그녀가 살짝 겹쳐지는 순간이 발생한다. 그 순간 박쥐가 날아다닌다. 이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면서 미래에 펼쳐질 요코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짧은 이야기 속에 만나는 십대의 삶이 현재와 다른 매력을 던져준다.

마지막 <침대차>는 그 기차 안에서 본 한 노인을 통해 초등학교 3학년으로 그를 데리고 간다. 그 앞에 그가 왜 침대차를 타게 되었는지, 그의 현재 삶이 어떤지 알려준다. 이런 작업을 한 후 마주한 그 시절 사고는 또 다른 사고로 이어지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월급쟁이의 삶을 간결하게 그려내면서 살아가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묻는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이 그 답을 찾기 위한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그 누군가가 한 말처럼.

얇은 분량에 빠르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호흡이 다른 문장과 죽음과 추억과 빛이 만들어내는 환상들이 그 시간을 더디게 가게 만든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문장의 리듬을 따라가고, 잔잔히 흐르는 감정을 느끼고, 그 밑으로 흐르는 또 다른 감정을 읽는다. 죽음의 추억과 기억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이것들은 현실 속에서 불안과 외로움을 느낄 때면 부쩍 더 힘을 발휘한다. 작가는 그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 감정을 똑바로 보고, 잊고 있던 것들을 되살린다. 최근에 읽은 일본 소설들과 다른 느낌과 재미를 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