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에드 맥베인.로런스 블록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씩 골라먹는 초코렛 상자 그 속에서 무얼 골라도 맛있을 수밖에..... 무엇을 읽든 괜찮다
크리스마스이고 미스터리가 있고 서점이 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책 씁쓸하고달콤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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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스피노자는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중략)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문장을 쓰고 그걸 다듬어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의 힘으로 한 페이지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서 영감을 기닫리고 지적 자극을 위해 벤야민을 읽고 벤야민을 읽다보면 마르크스가 궁금해지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려면 자본론을 펴야하고.... 무능력에서 출발하면 글은 영원히 쓸 수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봐야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를 볼 수 있다, 글쓰기의 초기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짜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라고 다그치듯 말할 수도 없다, 몸에 들러붙은 그것이 쉬이 떨어진다면 왜 고민이겠는가 고통이란 원래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시선이 감옥이 되어버린 상태인 것이다,   (중략)

 

또 한가지 명심할 것은 '과도한 주인공 의식'을 글쓰기에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 문제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색안경'으로 타인을 바라볼 만큼 부지런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 자신의 현아에 가려 남의 일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의 개방 수위를 고민하다보면 자기 몰입이 어렵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 검열 사회적 검열에 걸려 넘어지면 글ㅇ르 쓰기 어렵다, 대개는 자기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로 남을 대한다, 만약 누군가 자기 과거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유사한 삶의 경험치를 가진 타인을 동정과 수치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은 가기의 편견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 고통쓰기 혼란과 초과의 자리 -

 

 

나는 성폭력 피해 경험자의 글쓰기를 같이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노동자의 심정을 자본가가 장애인의 집장을 비장애인이 동성애자의 아픔을 이성애자가 대신 말할 수 없고 말한다고 해도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고착시킬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고통 성폭력의 피해자의 고통을 남성의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피해자의 언어가 필요하다,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성폭력 피해 경험자들과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표현하고 아픔을 나누고 의미를 발견하면서 ' 피해자의 언어'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자기 고통을 자기 언어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해질 때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사람 곁에 사람 자신의 복받치는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사실파악과 증거를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편파적으로 편들어주고 옹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질문을 만들어보았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느냐? 이것은 자신 없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기다리고 들어줄 수 있느냐? 물음을 바꾸었을 때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자는 누구나 약자다 -

 

 

'과제의 결과물이 지금 없지만 그래도 일주일 동안 뭘 쓸까 고민하고 썼다 지우고 하는 과정이 있었을 테니 그것도 소중한 게 아닐까요"

그 분의 혜안에서 나온 말이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말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용감하게 글을 쓰면 쓴 대로 못 써내면 침묵할 수 밖에 없는 무언의 글로 우리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받았다, 각자의 글ㅇ르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내고 눈물 훌리면서도 낭독을 포기하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는 말은 밖으로 나오려 하고 고통은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남의 이야기는 자기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같은 성폭력 피해자로 만났지만 그 안에서도 차이는 존재했다, 그래도 저마다 상황의 특수함 사건의 각별함 실존의 절실함을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피해 경험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된 것, 자신의 아픔으로 꽉 찼던 자아에 타인의 아픔을 들여놓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고마운 선물이다, 우리 품은 넓어졌다, 자아가 확장되면 상대적으로 고통은 줄어들게 마련이니 일석이조다,  (중략)

 

우리는 ㄴ책과 사람 그리고 글쓰기라는 이전에는 없던 세 친구가 생겼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품고 가야 하는 것 아픈 채로 불편한 대로 안고 같이 살아갈 힘이 길러졌다, 삶이 다소 견딜 만해진 것이다,

 

                                  - 말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기 -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여거지는 시 암송을 통해  '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그동안 오직 쓸모를챙기기 위해 이루어진 지식의 축적에 물음표를 남겼다, 이것이 문학 평론가 김현이 말한 문학의 쓸모 -없음의 쓸모-있음으로의 이행이 아닐까 잘 알려졌다시피 , 김현은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내 남없이 그렇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 쓸모를 세뇌당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쓸모의 척도는 물론 화폐다, 내 앎이 내 삶이 교환가치가 있는가 잉여가치를 낳는가 제도 교육은 남보다 교환가치가 있는 인간 곧 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육과정이다,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맞춰지면서 보성은 찌그러지고 감각은 조야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상태 로 일상이 굴러간다, 그런데 유용하지 않아서 억압하지도 않는시 이 새디에 쓸모없다고 취급받는 시 언어들의 낯선 조합으로 정신을 교란시키는 시 가장 간호한 물성을 가진 시를 통화하며 학인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을 자각한다,

나는 궁금했다, 시 혹은 시적인 것은 왜 존재를 흔들고 지나가는 걸까

  (중략)

시집은 나의 변화를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때는 도저히 감각의 주파수가 안 맞던 시가 계절이 바뀌고 나면 읽힐 때가 있다, 매번 읽을 때마다 새 책같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사이 나는 살았고 뭐라도 겪었고 변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시집은 나에게 너무 어려워' 혹은 '이 책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제쳐두는 것은 자신을 고정된 사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고 화석처럼 살겠다는 이상한 다짐이다, 그 해 여름 나를 밀어내던 시가 이듬해 겨울에 조금씩 스며들고 문장들이 마음에 감겨오면 그 기쁨은 무척 크다,

 

                                                      -쓸모 -없음의 시적 체험 -

 

 

합평을 통해 우리는 배운다, 읽는 사람은 불쾌감없이 자신을 부그러워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듣는 삶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말하는 깋술을 익힌다, 합평은 그렇게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서로의 말을 참조하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했다,  (중략)

나는 이것을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삶의 자리에 자기 몸을 들여놓아 보는 상상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작은 관점 하나 바꾸기도 얼마나 어려운가 관성적 사고와 법칙에서 벗어나 자기 갱신을 촉구하는 어떤 강력한 긴장이 합평 시간에 자연스레 조성된다, 세상에 알려진 유명 작가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만큼이나 학인들이 쓴 글 서툰 글을 읽고 서로에게 최초의 독자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도 값진 독서 체험이다,

 

                                - 합평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 -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 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가 '구조주의'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 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제도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축적된 정보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슬프게도 한 인간의 우주가 미디어를 통해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상식 통념이라고 부르는 가치 체계는 워낙 당대의 것일수밖에 없다,

그러니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 지 알려고 해야한다, 언론매체에서 떠드는 상식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 tv에서 커트된 무수한 삶을 감히 알려고 하는 자가 작가이다,

 

(중략)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마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때로 도덕은 가족 학교 등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며 살아가는 순치된 개인을 길러낸다, 하지만 평군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율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개여야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느 ㄴ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작가는 그럿을 촉발해야한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적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내가 쓴 글이 숨 막히는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막을 옥토를 만들 물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왜라고 묻는 글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하도록 등 떠미는 글 도덕 위에서 춤추도록 깨달음의 오르가즘을 선사하는 글 모든 글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  자명한 것에 물음 던지기 -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것은 창작자의 임무이다, 창작 분야 종사자중 '대체 가능한 존재;는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아니어도 남이 할 수 있으면 그건 누구나 할 수있다는 뜻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나만 쓸 수 있어야 한다, 박완서의 글은 김훈이 흉내낼 수 없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라고 했다, 내가 글응ㄹ 쓸 때 꼭 염두에 두는 말이고 학인들에게도 자주 당부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하는 이유이다,

 

                                -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나는 왜 언제부터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갖게 되었는지 일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일에 대한 환상이 어떤 지점에서 깨졌는지 이 일을 계속 할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돋는가? 꽃들이 피거나 폐허가 되거나 돌이 굴러와 뿌리를 내리거나 할 거싱다, 관찰하면 신비롭다, 살면서 무수히 겪게 되는 별의별 일들 소소하든 대수롭지 않든 그것을 통화한 시체는 변화를 겪는다, 이같은 잀강의 풍경과 생각과 느낌이 별처럼 은은히 차오른 글은 구체적인 한 사람을 선명히 보여준다, 그럴 때 그 글이 다른 이의 경험이나 감정과 겹치고 공감을 낳는다, 남의 글에서 억눌러놓았던 '나;를 보았을 때 미처 몰랐던 자기의 욕망을 알아차렸을 때 사람들은 그 글을 좋은 글이 아니라고 느낀다, 고마워한다, 내가 게을러서 혹은 두려워서 아니면 막막해서 마처 들쳐보지 못한 마음의 자리를 누군가 살뜰히 드러내주면 덩달아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가슴에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다, 작은 자극에도 촉발을 받고 영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표가 어느 순간 느낌표로 변하고 다른 삶의 국면을 통과하면 그 느낌표는 또 다른 무음표가 된다, 내게 이렇게 믿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 물음표와 느낌표의 반복과 순환이 자기안의 사유를 낳는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 사유하기 -

 

 

한 사람의 독특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를 가늠한다, 직업과 취향 인생관을 파악한다, 긍정적으로 사는지 부정적으로 사는지를 단어와 말투로 짐작한다, 그러니 어떤 단어를 주로 쓰는지 욕설을 자주하는지 간결한 화법을 좋ㅇ하는지 말끝마다 부연 설명을 붙이는지 심지어 문법적으로 수동형을 좋아하는지 능동형을 좋아하는지 사투리를 쓰는지 말끝을 흐리는지 그대로 전하는게 좋다, 또한 무의식적인 몸짓과 행동마저도 성격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말을 하면서 헛기침을 해대는지 어렷이 걸을 때 앞서 걷는지 뒤로 쳐지는지 아시다시피나  사실 가령 같이 자주 사용하는 말버릇이 있는지 그러한 디테일을 살피면서 글의 생생함을 더할 수 있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유쾌한 농담에서 진지한 토론까지 하나도 놓칠게 없다,

 

 

인터부이가 될 수 있는 사람과  못되는 사람의 구분은 자기 표현의 능력이 아니었따, 사회적 관계의 여부다, 보이는 존재인가  보이지 않은 존재인가  관계의 끈이 없으면 자기를 규정할 수도 없고 존재가 드러날 수도 없다, 백 세 어르신에게 반찬봉사를 다니던 한 사람이 어른신의 누워 있는 등을 보고 삶을 읽어내고 번역했듯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보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느낀다, 가장 큰 가난은 관계의 빈곤이다, 관계가 줄어들면 자아도 쪼그라들고 관계가 끊어지면 자아도 사라진다,

 

 

                    -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 -

 

 

책을 사야하나 잠시 고민한다,

무심하게 읽다가 순간순간 멈추는 지점이 점점 많아졌다,

빌려온 책에 줄을 그을 수도 없고 포스트 잇을 붙일 수도 없다,

그저 기록할 수 밖에....

 

글쓰기가 자기 치유의 역할을 한다는 건 충분히 알 고 있었다,

자기의 내면을 직시하고 응시하는 것 그건 어떤 힘을 필요로 한다,

그 힘을 용기라고 할 수도 있고 솔직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기의 감정과 내면 생각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고 어떤  감찰자도 없이 솔직히 드러낼 수 있을 때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간다,

내가 가진 것이 상처라는 걸 안다는 것 그리고 마주보고 드러낼 줄 아는 것

그게 결국은 치유의 전부이다,

그 과정에 읽기 말하기 쓰기가 있다,

글이 두서없고 너무 허황될만큼 추상적이고 몽롱해지는 건 자기를 드러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드러낼 자기가 없다는 변명속에 숨겨져 있기도 하고 뭘 써야 할지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과도 통한다,

얼마를 살아왔건 살아온 시간에는 제각각의 무늬가 있다,

그 무늬를 손가락으로 그려보고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직시할 수 있는 힘다,

 

글쓰기에 대한 글이었지만

결국 사람에 대한 글이었다,

모든 글은 사람에 대한 게 아니었던가

풀이든 돌멩이든 동물이든 하늘이든 심지어 기계나 상점이라도

그것이 사람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쓰는 것이기에,,,,

 

글쓰기로 나를 표현할 줄 알게 되면

다음은 타인을 들여다 봐야 한다,

타인의 글 타인의 말 타인의 아이기

그것이 나를 퐉장하는 일이고 나를 조금은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읽고 말하고 쓰는 일,,

그건 결국 살아있다는 것이고 내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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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28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북플이 합평이 이루어지는 분위기를 만들기 어려운 환경임에도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
 
베개를 베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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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써보고 싶었다,

어떤 감정도 없이 담담하게 혹은 냉정하게 혹은 무심하게

대상을 묘사하거나 일상을 따박따박 순서대로 나열하는 글쓰기

그런 글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고 감정을 흐르게 하고 감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관심을 가질까 싶은 소소한 일상에 대해

내가 겪은 시시한 일들에 대해 그리고 그 사건이라고 해야할지 모를 그런 사건의 흐름을 짚어내는 글을 쓰면서 스윽 알게 모르게 긴 여운을 주면 좋겠다고 욕심을 냈다,

결론적으로

글은 안쓰고 있고

써도 늘 읽어보면 감정과잉에 내 마음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징징대거나  쿨한척 하거나 그런 글만 쓰고 있었다,

책을 다 읽고서 다시 살폈다, 뭔가 약점을 잡야내겠다는 삐뚤어진 신념으로 문장들을 다시 홇어도  그녀의 문장들은 모든게 묘사고 담담한 서술이었다, 슬프다 기쁘다 아팠다 우울하다 괴롭다는 말이 없었다,  내가 졌다,,,

 

 

요새 고기가 땡기지 않는다,

사실 누군가를 위해 상을 차릴 때 고기반찬만큼 편한게 없다,

볶아먹든 구워먹든 삶아먹든 고기란 그 자체로 밥상의 모든 걸 커버한다,

딱하나 커다란 접시에 상가운데를 차지하고 나면  나머지는 뭘로 채우든 상관이 없다,

반면 나물찬은 너무 힘들다.

씻고 다듬고 삶고  데치고 혹은 생채로 양념을 만들어 무치고 그 타이밍도 딱 들어맞지 않으면

물이 흥건히 생겨서 금방 숨이 팍 죽어버리거나 너무 펄펄  살아서 금방이라도 밭으로 뛰어갈 기세거나,, 그렇게 차려도 뭔가 초라하고 티도 안나는...

그런데 자꾸 요새 그런 찬이 땡긴다는 거다,

그냥 뚝딱 콩나물무침을 하고 취나물을 데쳐 무치고  무 생채를 서걱서걱 비벼내는 그런 찬

그냥 찬밥에 그런것들을 척척 올려 한그릇을 들고 앉아 소박하게 때로는 청승맞게 먹고 말고 싶은 ...

책읽기도 뭔가 휘몰아치는 갈등과 구조대신 심심하고 밋밋한 이야기가 끌렸을까

이 소설집은 그냥 가정식 백반같았다,

주인공은 없이 그저 조연들 아니 엑스트라 찬들이 모여서 그럭저럭 먹을만해지는 ...

딱히 끌리진 않지만 질릴 일도 없고 어제처럼 먹고 내일도 또 먹어도 그만일거 같은

그런 단편 10개가 비슷한 맛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맛을 내면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낙엽이나 동전을 아래 놓고 그 위에 흰종이를 올린후 뭉툭하게 깍은 연필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들고 힘을 빼고 살살 칠해주면 연필 칠 앙래로 희미하게 동전이나 낙엽의 문양이 서서히 드러난다, 낙엽의 임맥이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평소에 무심했던 동전속의 다보탑이나 이순신장군의 얼굴  때로는 학 한마리가 나 여기 있소.. 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저 검은 칠처럼 보이는 아무것도 아닌 색 위로 존재가 서서히 드러난다,

별일 아닌 일상들

하나도 특별할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는 사람들의 시시하기까지 한 삶들의 한 단편에서 우리는 서서히 우리와 다르지 않은  그럼에도 그 나름의 독특한 무늬를 가진 삶들이 드러난다,

 

뭐 이런 이야기가 소설이 되지?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야기는 시작될 듯 시작될듯 주춤주춤거리다가 어느 순간 툭하고 끝이 난다,

우리 할머니가 뭘 잘하는지 물어보면서

베개에 묻은 침자국을 보면서

12살 차이가 나는 친구의 수술실 앞에서

와인잔에 막걸리는 마시다가

군복을 입고 친구와 술을 마시고 첫차시간에 집에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제멋대로  시작을 했다가 제멋대로 끝이 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어느 한토막을 툭 잘라서 보여준다면 이것과 무엇이 다를까

나에게는 의미있는 순간이고 시간이었던 그 마다마다의  시간이 타인에게는 무심하고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는 것

필부필부의 삶들이  자고 일어나고 먹고 일하고 쉬고 싸우고 한숨쉬고 놀고 위안되던 거 시간들이 차곡차곡 묘여 삶이고 역사가 된다,

긴 역사의 사간이  우리가 역사책에서 보던 전쟁 변혁  문화융성기  왕위 찬탈 외교 진군 정벌  그런시간으로만 채워지는 건 아닐것이다,

그런 일들은 일상적이지 않아서 너무나 크고 버라이어티한 상황이라 기록되고 보존되겠지만 한사람한사람의 일상 그 사람들의 삶이 그 사이사이 빈틈을 매우면서 우리가 살아내고 살아온 역사를 완성시키는게 아닐까

 

이 소설집의 열가지 이야기는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들

절대 역사책에는 기록되지 못할 한 순간의 이야기들

그럼에도 무의미하게 버려질 수 없는 그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준다,

어떤 감정의 묘사도 없이 인물의 감정을 알 수 있고

어떤 대단한 사건도 없으면서 대단한 삶의 다이나믹을 보여준다,

별일 아니라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별일 아니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소함이 주는 가치  그것이 이 책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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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2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희망님이 쓰시고 싶은 글의 장르가 에세이에 가깝군요. 푸른희망님이라면 잘 쓰실 겁니다. ^^

푸른희망 2016-12-21 23:16   좋아요 0 | URL
아뇨 제가 쓰고싶은건~~~피칠갑도 목잘린 시체도 없지만 뒷 목이 서늘한 미스테리입니당=3=3=3
 

 

 

 

 

 

 

 

 

 

때로 자신이 왜 느긋할 수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은 채 우리 사회의 기본값을 싸그리 무시하는 이들의 주장은 이유배반적이기까지 합니다, 핼조선이라는 과격한 단어 대신 온건한 말을 쓰자는 말에는 격하게 반발했던 이도 동시에 다른 상황에서는  '아니 좋게 대화로 풀어야지 뭘 그렇게 화를 내?' 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온건한 헛소리는 겉보기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평화로워서 문제를 해결하려 안간힘을 쓴느 쪽을 나쁜 사람으로 만듭니다, 힘을 가지고 있는 편에 섰기 때문에 소리지르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자신들의 상황에 대한 일말의 성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p 80

 

 

상황은 비슷합니다, 자식과 교수으ㅟ 말 자체에는 잘못된 게 없습니다, 가저의 평화 청년의 패기라는 가치는 아름답고 이때 분노하는 사람들이 좋게 넘어가면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누군가가 좋게 넘어가자 며 분노하는 이들을 온화하게 타이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노할 필요가 없는 기듣권이기 때문일뿐입니다,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독권이 설파하는 아름다운 의도는 무의미하며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좀 깨닫고 예쁜 헛소리는 넣어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의도는 좋고 아름다울지언정 기득권의맥락에서만 가능한 많은 말이 별 여과 없이 매체에 실리고 또 한 번 파급력을 갖습니다, 문제없어 보이거나 듣기 좋은 말이 오히려 위험한 이유는 이겁니다,   (중략)   그러나 학식있고 교양있고 권력 있는 사람이 성찰 없이 뱉는 말은 말 자체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이고 나아가 바람직한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불균형에 히을 실어주는 데 일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건 청년들이 상처를 딛고 나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바람직한 의도의 말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은 왜 '아프면 환자자 뭔 청춘이냐'는 빈정거림을 낳았던가요?  

                                                                                    p 83

 

물론 대립이 아닌 화합으로 이르는 결말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기본값이 여성의 선택지를 제한하는 쪽에 맞추어져 있을 경우 다른 선택지를 확보하는 일이 더 시급합니다,  청년들에게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라고 독려하는 팔자 좋은 태도를 취하기 이전에 청년의 열정에만 기대게 된 현 상황의 문제점을 개선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상대를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해하기를 강요받아온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미명으로 포장된 사랑이 아니라 설득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자유입니다.

여성에게는 상대를 이해시키거나 포용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상대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손을 잡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택지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정말로 미미합니다, 눈치없다는 소리가 듣기 싫다면 성대결이 아닌 화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소리를 듣기 전에 여성의 선택지를 사실상 박탈하고 인내와 수용응ㄹ 여성의 당연한 속성인 양 착취해온 현실부터 직시해야합니다, 여성에게 실제로 어떤 선택지가 있으며 각 선택지가 현실적으로 얼마만큼 실현 가능한지에 집중해야 그 다음 논의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p 86

 

 

당신을 오독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신이 당연하게 상대를 설득해야 하고 그때의 어조는 당연히 온화해야하고 이성적이어야 하고 상대가 당신의 말을 듣는 시늉을 하면 당신은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받아들여줄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권리를 얻기위해 목소리를 냈을 뿐 당신에게 상대를 설득할 의무는 없습니다, 상대를 사랑으로  감싸야할 의무는 더더욱 없습니다, 당신은 상대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내킬 때에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이가 너무도 많은 상황이기에 상대가 당신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음을 다욱 강조하게됩니다, 

 

                                              p87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소란한 이유는 '여성혐오범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 것이냐 묻지마 범죄라는 기존의 이름을 쓸것이냐로 주장이 양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이름인 묻지마 범죄는 살인처럼 태초부터 있었을 것 같은 죄명과느 ㄴ달리 생겨난 지 얼마되지 않아 보입니다, 찾아보니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 처음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역시 이름은 필요에 의해 임의적으로 생겨납니다,

 

 

이름이 생기면 부를 수 있다는 것 말고도 실질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낱낱이 흩어진 경험을 한데 모음으로써 보이지 않았던 현상이 가시화되므로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해결할 단초가 된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름이 없어서 사건마저 지워졌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름이 생기더라도 그 이름을 붙이는 기준은 게속 논란이 될 것이고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만사가 단번에 해결되지도 않겠지만 적어도 혐오범죄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사건이 없다머 개별 사례를 부정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리지 않았는데

상대가 분명히 뭔가를 모르고 있거나 잘못알고 있는게 분명한데

입이 딱 막힐때가 있다,

머리가 순간 정지되고 모든 것이 얼음 ! 이 되어버리는 상황

순간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올라오기시작하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감정싸움으로 심지어는 개싸움으로 번질거같은 위기감

 

상대는 실실 웃으며 여유를 갖기시작하는데

나혼자 바짝 약이 올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

저 말을 확 받아서 뭐라도 치고 나가고 싶은데 머리속은 하얗고

 

"저러는거 보면 남자한테 완전히 채였나봐"

" 그러다가 시집 못간다"

"남자들 보라고 입고 다니는거지 봐달라는데 봐줘야지"

" 너무 똑똑한 여자도 피곤하다"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
"남자도 살기 피곤한 세상이야 여자들만 그런거 아니야"

"여자가 대통령이 되니까 이모양이지"

"

등등등

 

그 중에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

"좋은게 좋은거 아니야?"

누구한테? 무엇이? 왜? 어떻게? 얼만큼? 좋은지

단지 너한테만 좋은거?

웃기고 있네...

그런데 이런건 전혀 이성적이지도 지적이지도 상대를 당혹하게 하지도 못한다,

좋은거.. 좋지

근데 그게 누구한테 얼마나 좋은건지 제대로 생각이나 해본적은 있는지?

누군가가 좋기 위해서 세상의 가정의 직장의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해야하는게 당연한거? 

그저 만사 아무렇지 않고 무탈하기만 하면 그 밑에서 어떤 지지고 볶는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거?

떠들고 따지고 반박하고 행동하는거 그거 다  시끄럽고 별나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한방에 일축해버리는 일?

그것들 앞에서 푸들도 아닌데 늘 부들부들거리기만 하고 에베베하다가 말았던 슬픈 기억....

이겨도 찜찜하고 지면 더 억울한 기분,,

 

사실 책 속의 모든 메뉴얼이 다 와닿는건 아니다.

근거가 희박하고 많이 주관적이고 반박당할 여지도 많다

그러나

내가 설명할 필요가 없지

모르는 건 너희 잘못이니까

그 좋은 머리 어디다 쓰겠니 미리미리 공부좀 하지

이렇게 속시원하게 말해버리고 싶은 때가 있었으니까 그걸 알아줘서 고맙다

 

어쩌면 시비든 건성이든 이렇게 물어보고 질문해오는 이들이 그나마 나은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틀린건가?

세상엔 아직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가 가부장적이라는 것 이사회가 아직은 자신들이 기득권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채 그때보다 전에보다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에만 더 골골하는 족속이 아직도 많다,

 

 

이 책의 장점은 딱 페미니즘을 논할 때 뿐 아니라

어떤 분야건 갑의 입장에서 꼰대의 입장에서 가르치려고 들고 바뀌고 싶어하지 않고

나대고 떠드는 것들이 너무 싫은 누군가를 대할 때도 좋은 메뉴얼이 될 것이다,

 

앞에서는 어버버하며 얼음이 되었다가 집에 돌아와서 양치질하는 순간 대꾸했어야 할 말이 떠올라서 혼자 머리를 찧으며 방방 뛴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보시길,,

그렇다고 나아질거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읽는동안은 통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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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6-12-2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님의 책 추천 방법은 완전 매력적이십니다.
‘그렇다고 나아질거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읽는동안은 통쾌합니다,‘라니,
저도 읽는동안의 ‘사이다‘를 위하여~^^

푸른희망 2016-12-21 14: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사실 책을 많이 읽는다는게 어떤 의미가 있나 어떤 가치가 있나 자꾸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저 머리만 커지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읽는동안의 즐거움이나 통쾌함도 포기할 수 없거든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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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체홉을 많이 몰랐구나
그는 근엄하다기보다는 유머를 즐길 줄 아는 작가다
밋밋하고 이게 뭐지 싶은 짧은 이야기인데 읽다보면 빠져든다 그냬나 러시아 이름은 보기에도 소리내보아도 자꾸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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