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스피노자는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중략)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문장을 쓰고 그걸 다듬어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의 힘으로 한 페이지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서 영감을 기닫리고 지적 자극을 위해 벤야민을 읽고 벤야민을 읽다보면 마르크스가 궁금해지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려면 자본론을 펴야하고.... 무능력에서 출발하면 글은 영원히 쓸 수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봐야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를 볼 수 있다, 글쓰기의 초기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짜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라고 다그치듯 말할 수도 없다, 몸에 들러붙은 그것이 쉬이 떨어진다면 왜 고민이겠는가 고통이란 원래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시선이 감옥이 되어버린 상태인 것이다,   (중략)

 

또 한가지 명심할 것은 '과도한 주인공 의식'을 글쓰기에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 문제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색안경'으로 타인을 바라볼 만큼 부지런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 자신의 현아에 가려 남의 일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의 개방 수위를 고민하다보면 자기 몰입이 어렵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 검열 사회적 검열에 걸려 넘어지면 글ㅇ르 쓰기 어렵다, 대개는 자기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로 남을 대한다, 만약 누군가 자기 과거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유사한 삶의 경험치를 가진 타인을 동정과 수치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은 가기의 편견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 고통쓰기 혼란과 초과의 자리 -

 

 

나는 성폭력 피해 경험자의 글쓰기를 같이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노동자의 심정을 자본가가 장애인의 집장을 비장애인이 동성애자의 아픔을 이성애자가 대신 말할 수 없고 말한다고 해도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고착시킬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고통 성폭력의 피해자의 고통을 남성의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피해자의 언어가 필요하다,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성폭력 피해 경험자들과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표현하고 아픔을 나누고 의미를 발견하면서 ' 피해자의 언어'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자기 고통을 자기 언어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해질 때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사람 곁에 사람 자신의 복받치는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사실파악과 증거를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편파적으로 편들어주고 옹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질문을 만들어보았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느냐? 이것은 자신 없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기다리고 들어줄 수 있느냐? 물음을 바꾸었을 때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자는 누구나 약자다 -

 

 

'과제의 결과물이 지금 없지만 그래도 일주일 동안 뭘 쓸까 고민하고 썼다 지우고 하는 과정이 있었을 테니 그것도 소중한 게 아닐까요"

그 분의 혜안에서 나온 말이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말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용감하게 글을 쓰면 쓴 대로 못 써내면 침묵할 수 밖에 없는 무언의 글로 우리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받았다, 각자의 글ㅇ르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내고 눈물 훌리면서도 낭독을 포기하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는 말은 밖으로 나오려 하고 고통은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남의 이야기는 자기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같은 성폭력 피해자로 만났지만 그 안에서도 차이는 존재했다, 그래도 저마다 상황의 특수함 사건의 각별함 실존의 절실함을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피해 경험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된 것, 자신의 아픔으로 꽉 찼던 자아에 타인의 아픔을 들여놓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고마운 선물이다, 우리 품은 넓어졌다, 자아가 확장되면 상대적으로 고통은 줄어들게 마련이니 일석이조다,  (중략)

 

우리는 ㄴ책과 사람 그리고 글쓰기라는 이전에는 없던 세 친구가 생겼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품고 가야 하는 것 아픈 채로 불편한 대로 안고 같이 살아갈 힘이 길러졌다, 삶이 다소 견딜 만해진 것이다,

 

                                  - 말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기 -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여거지는 시 암송을 통해  '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그동안 오직 쓸모를챙기기 위해 이루어진 지식의 축적에 물음표를 남겼다, 이것이 문학 평론가 김현이 말한 문학의 쓸모 -없음의 쓸모-있음으로의 이행이 아닐까 잘 알려졌다시피 , 김현은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내 남없이 그렇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 쓸모를 세뇌당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쓸모의 척도는 물론 화폐다, 내 앎이 내 삶이 교환가치가 있는가 잉여가치를 낳는가 제도 교육은 남보다 교환가치가 있는 인간 곧 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육과정이다,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맞춰지면서 보성은 찌그러지고 감각은 조야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상태 로 일상이 굴러간다, 그런데 유용하지 않아서 억압하지도 않는시 이 새디에 쓸모없다고 취급받는 시 언어들의 낯선 조합으로 정신을 교란시키는 시 가장 간호한 물성을 가진 시를 통화하며 학인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을 자각한다,

나는 궁금했다, 시 혹은 시적인 것은 왜 존재를 흔들고 지나가는 걸까

  (중략)

시집은 나의 변화를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때는 도저히 감각의 주파수가 안 맞던 시가 계절이 바뀌고 나면 읽힐 때가 있다, 매번 읽을 때마다 새 책같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사이 나는 살았고 뭐라도 겪었고 변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시집은 나에게 너무 어려워' 혹은 '이 책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제쳐두는 것은 자신을 고정된 사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고 화석처럼 살겠다는 이상한 다짐이다, 그 해 여름 나를 밀어내던 시가 이듬해 겨울에 조금씩 스며들고 문장들이 마음에 감겨오면 그 기쁨은 무척 크다,

 

                                                      -쓸모 -없음의 시적 체험 -

 

 

합평을 통해 우리는 배운다, 읽는 사람은 불쾌감없이 자신을 부그러워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듣는 삶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말하는 깋술을 익힌다, 합평은 그렇게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서로의 말을 참조하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했다,  (중략)

나는 이것을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삶의 자리에 자기 몸을 들여놓아 보는 상상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작은 관점 하나 바꾸기도 얼마나 어려운가 관성적 사고와 법칙에서 벗어나 자기 갱신을 촉구하는 어떤 강력한 긴장이 합평 시간에 자연스레 조성된다, 세상에 알려진 유명 작가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만큼이나 학인들이 쓴 글 서툰 글을 읽고 서로에게 최초의 독자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도 값진 독서 체험이다,

 

                                - 합평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 -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 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가 '구조주의'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 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제도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축적된 정보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슬프게도 한 인간의 우주가 미디어를 통해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상식 통념이라고 부르는 가치 체계는 워낙 당대의 것일수밖에 없다,

그러니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 지 알려고 해야한다, 언론매체에서 떠드는 상식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 tv에서 커트된 무수한 삶을 감히 알려고 하는 자가 작가이다,

 

(중략)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마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때로 도덕은 가족 학교 등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며 살아가는 순치된 개인을 길러낸다, 하지만 평군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율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개여야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느 ㄴ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작가는 그럿을 촉발해야한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적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내가 쓴 글이 숨 막히는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막을 옥토를 만들 물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왜라고 묻는 글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하도록 등 떠미는 글 도덕 위에서 춤추도록 깨달음의 오르가즘을 선사하는 글 모든 글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  자명한 것에 물음 던지기 -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것은 창작자의 임무이다, 창작 분야 종사자중 '대체 가능한 존재;는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아니어도 남이 할 수 있으면 그건 누구나 할 수있다는 뜻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나만 쓸 수 있어야 한다, 박완서의 글은 김훈이 흉내낼 수 없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라고 했다, 내가 글응ㄹ 쓸 때 꼭 염두에 두는 말이고 학인들에게도 자주 당부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하는 이유이다,

 

                                -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나는 왜 언제부터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갖게 되었는지 일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일에 대한 환상이 어떤 지점에서 깨졌는지 이 일을 계속 할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돋는가? 꽃들이 피거나 폐허가 되거나 돌이 굴러와 뿌리를 내리거나 할 거싱다, 관찰하면 신비롭다, 살면서 무수히 겪게 되는 별의별 일들 소소하든 대수롭지 않든 그것을 통화한 시체는 변화를 겪는다, 이같은 잀강의 풍경과 생각과 느낌이 별처럼 은은히 차오른 글은 구체적인 한 사람을 선명히 보여준다, 그럴 때 그 글이 다른 이의 경험이나 감정과 겹치고 공감을 낳는다, 남의 글에서 억눌러놓았던 '나;를 보았을 때 미처 몰랐던 자기의 욕망을 알아차렸을 때 사람들은 그 글을 좋은 글이 아니라고 느낀다, 고마워한다, 내가 게을러서 혹은 두려워서 아니면 막막해서 마처 들쳐보지 못한 마음의 자리를 누군가 살뜰히 드러내주면 덩달아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가슴에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다, 작은 자극에도 촉발을 받고 영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표가 어느 순간 느낌표로 변하고 다른 삶의 국면을 통과하면 그 느낌표는 또 다른 무음표가 된다, 내게 이렇게 믿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 물음표와 느낌표의 반복과 순환이 자기안의 사유를 낳는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 사유하기 -

 

 

한 사람의 독특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를 가늠한다, 직업과 취향 인생관을 파악한다, 긍정적으로 사는지 부정적으로 사는지를 단어와 말투로 짐작한다, 그러니 어떤 단어를 주로 쓰는지 욕설을 자주하는지 간결한 화법을 좋ㅇ하는지 말끝마다 부연 설명을 붙이는지 심지어 문법적으로 수동형을 좋아하는지 능동형을 좋아하는지 사투리를 쓰는지 말끝을 흐리는지 그대로 전하는게 좋다, 또한 무의식적인 몸짓과 행동마저도 성격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말을 하면서 헛기침을 해대는지 어렷이 걸을 때 앞서 걷는지 뒤로 쳐지는지 아시다시피나  사실 가령 같이 자주 사용하는 말버릇이 있는지 그러한 디테일을 살피면서 글의 생생함을 더할 수 있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유쾌한 농담에서 진지한 토론까지 하나도 놓칠게 없다,

 

 

인터부이가 될 수 있는 사람과  못되는 사람의 구분은 자기 표현의 능력이 아니었따, 사회적 관계의 여부다, 보이는 존재인가  보이지 않은 존재인가  관계의 끈이 없으면 자기를 규정할 수도 없고 존재가 드러날 수도 없다, 백 세 어르신에게 반찬봉사를 다니던 한 사람이 어른신의 누워 있는 등을 보고 삶을 읽어내고 번역했듯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보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느낀다, 가장 큰 가난은 관계의 빈곤이다, 관계가 줄어들면 자아도 쪼그라들고 관계가 끊어지면 자아도 사라진다,

 

 

                    -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 -

 

 

책을 사야하나 잠시 고민한다,

무심하게 읽다가 순간순간 멈추는 지점이 점점 많아졌다,

빌려온 책에 줄을 그을 수도 없고 포스트 잇을 붙일 수도 없다,

그저 기록할 수 밖에....

 

글쓰기가 자기 치유의 역할을 한다는 건 충분히 알 고 있었다,

자기의 내면을 직시하고 응시하는 것 그건 어떤 힘을 필요로 한다,

그 힘을 용기라고 할 수도 있고 솔직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기의 감정과 내면 생각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고 어떤  감찰자도 없이 솔직히 드러낼 수 있을 때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간다,

내가 가진 것이 상처라는 걸 안다는 것 그리고 마주보고 드러낼 줄 아는 것

그게 결국은 치유의 전부이다,

그 과정에 읽기 말하기 쓰기가 있다,

글이 두서없고 너무 허황될만큼 추상적이고 몽롱해지는 건 자기를 드러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드러낼 자기가 없다는 변명속에 숨겨져 있기도 하고 뭘 써야 할지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과도 통한다,

얼마를 살아왔건 살아온 시간에는 제각각의 무늬가 있다,

그 무늬를 손가락으로 그려보고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직시할 수 있는 힘다,

 

글쓰기에 대한 글이었지만

결국 사람에 대한 글이었다,

모든 글은 사람에 대한 게 아니었던가

풀이든 돌멩이든 동물이든 하늘이든 심지어 기계나 상점이라도

그것이 사람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쓰는 것이기에,,,,

 

글쓰기로 나를 표현할 줄 알게 되면

다음은 타인을 들여다 봐야 한다,

타인의 글 타인의 말 타인의 아이기

그것이 나를 퐉장하는 일이고 나를 조금은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읽고 말하고 쓰는 일,,

그건 결국 살아있다는 것이고 내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12-28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북플이 합평이 이루어지는 분위기를 만들기 어려운 환경임에도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