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2
권김현영 엮음, 권김현영.루인.엄기호 외 지음 / 교양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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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대목은 어려웠고 몇몇 대목은 흥미있었다.

 저자의 생각들을  아직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일방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문득 했다.

 내가 리뷰를 쓰거나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읽은 내 느낌.. 내가 받아들인 만큼 그리고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서재는 넓고 좋은 리뷰는 많고 이 책에 대한 글들도 좋은 것들이 많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끄적임이다.

 

 

한국남성들은 아비없는 자식과도 같다.

아비가 자식에게 몸으로 보여주며  따라하게 하는 역할모델을 하며 자식이 성장하는 법인데

어느 순간 한국 남성은 내가 따라야 할 롤 모델이 사라졌다.

일제와 함께 시작된 근대화에서는 이미 조국은 사라졌고 기존의 가치관은 땅에 떨어졌고

일본을 모방해서 살아남거나 그저 식민지하의 남성으로 열등하게 살아가거나 하는 방법밖엔 없다. 살아남기 위해 따라야 하는 관습은 우리것이 아니고 내게 익숙할 수 있는 방법은 여성의 것이거나 노예의 것뿐이다. 그렇게 혼란스럽게 스스로 자기가 어떤 모습을 해야하는지 급하게 결정하거나 주어진 대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광복된 후 들어온 서양의 문화와 정치를 단계를 건너뛰며 받아들인다.

더 좋아보이고 더 힘이 있어 보이는 문화를 걸치지만 그것 역시 내것이 아니어서 비틀리고 어딘가 품이 어정쩡한 형태로 내 몸이 되었다.

남자다움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고개숙인 남자라든가 어깨가 쳐진 가장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경제적 위기로 모두가 절망에 빠진 그 때 누구보다 남자들이 더 힘들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의 외로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내지 않았으면 그런 변화가 천지개벽할 일처럼 여겨졌을까?  여성도 함께 겪여내야 하는 일에 남자들에게 더 동정이 떨어지고 호들갑스러웠다.

가장이니까 자를 수 없고 여자가 나가는게 모양새가 좋지 않은가 하는 말들이 오간 것도 그때였고, 여자들은 돌아갈 가정이 있다고 핑계를 댄 것도 그때였고 신문이나 문학이나 모든 것들이 남자를 위로하기바빴던 것도 그때였다.

세상은 늘 변한다.

내가 고작 반백년도 살지 못했는데 컴퓨터가 등장하고 핸드폰이 등장하더니 스마트 폰으로 바뀌고 인터넷으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없고 나를 지켜보는 눈들이 여기저기 생겨나며 더 이상 개인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변하는 세상에 맞춰 변해야 하는 건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쩔 수 없는데

남자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줄 알았고 변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남자라면 의례 그래야 하는 것들을 놓고 싶지 않은데 세상은 자꾸 변하라고 하고 여성들은 변해가고 나의 영역은 점점 좁혀오고 이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걸까?

결국 남자다움 혹은 남성성에 집착하면 점점 세상이 좁아지는 것 뿐인데 그걸 바꾸려고하지도 않고 그저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젠더 연구로서 남성성을  분석하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남성성과 관ㄹ녀한 신체 심리 문화는 실재가 아니라 규범이자 신화라고 본다. 또한 페미니즘이 여성을 여자다움에서 버어나도록 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이론이라면 남성 역시 남자다움의 구속으로 부터 멋어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이며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는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들어가는 글>에서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낫어과 함꼐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에게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주의의 가장 큰 논쟁거리이자 이론과 실천의 어려움을 안긴다. 한국 남성들은 해방 후 친일 청산과 대미 사대주의 극복을 제일 과제로 삼앗지만 그 방법론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을 빚게 된다. (중략) 남성 세력간의 투쟁과 세력 교체(정권교제) 자체가 한국 사회의 정치적 전선을 독점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독자적 정치학으로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젠더는 모든 권력 관계의 모델이다. 특히 국제 정치학은 논리자체가 젠더 은유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강대국은 남성으로 약소국은 여성으로 재현된다. 한국의 오랜 오세 콤플렉스는 실제 침략당한 경험과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생성된 것이다. 한국남성은 '여성'으로 간주되거나 스스로 '여성'암을 자처했다. 자신은 영원한 식민지 피해자라는 것이다. 한 사회의 주된 남성 문화를 '식민지 남성성'으로 명명하기 위한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남성은 보편적 주체로서 자신을 국가나 민족과 동일시 한다.

2)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국내 여성과의 관계에서 구성하기보다는 외세와의 관계에서 파악한다. 이때 자신은 강대국에 비해서 약자이므로 '여성'으로 정체한다.

3) 하지만 자신은 '본질적'으로 남성이므로 강자에 저항하거나 강대국을 '이용해야하는 중대한 업무를 띠는데 이때 자기 옆의 여성들이 자신과 뜻을 함꼐 하지 않고 평등을 외치는 것은 반민족 반국가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4) 여성해방은 계급 해방이나 민족 해방 이후의 과제이다

5) 이때 여성의 역할은 강자와의 투쟁에 바쁜 자신을 대리하여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즉 여성은 성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대의이다.

6) 동시에 자신이 지쳤을 때는 언제나 위로와 지지와 격려를 해주는 정치적 '동지'여야 한다.

7) 자원ㅇ 부족할 때는 자국 여성에게 적의 '성적 노리개'가 도어 먹을 것을 얻어오라고 강요한다. 이때 우울해하거나 (이상의 날개) 자존심이 상해 여자를 도리어 두둘겨 패거나 여성을 혐오한다.  환향녀(화냥년)라는 낙인을 찍어 공동체에서 매장한다.(안정효 은마는 오지 않는다) 혹은 중산층 여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피해 여성을 진정한 민중으로 숭배하거김기덕 해안선) 나 분노로 인해 스스로 미친다(남정현 분지)

8) 손상된 자신과 아버지의 자존심을 되찾ㄱ위해 어머니와 누이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하거나 이 영화를 아버지에게 바친다

9) 좌파 민족주의 진영은 가해국(일본)과의 투쟁에서' 우리에겐 위안부카드가 있다'며 외세 협박용으로 삼거나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사과 대신 경제 협력이나 군사 원조를 받아낸다. 강대국에게 군사력이 협상할 수 있는 힘이라면 한국 남성에게 그 자원은 여성이다.

10) 자신의 이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기 성찰이나 강자에 대한 저항이지만 강자는 멀리 있거나 강대국 자체도 균질적 존재 (여성이나 흑인이 있다)가 아니므로 도리가 없다. 결국 술을 마신다. 무겨력 자기 연민 고뇌하는 자기도취상태에 있다.

 

                                            정희진 < 한국 남성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중

 

 

누구와 동일시할것인가 누구와 함꼐 무엇을 할것인가의 내용은 완전히 다시 쓰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의 기획이었던 근대는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으로 다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 간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움직임은 헤러웨이(Donna J. Haraway0 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계속에 차이를 낳으려는 노력이다. 잰도룰 꾾임없이 이분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를 ㅍ평등하게 하지도 못했고 자유롭게 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그 결과 한국 남자들은 끊임없이 보편의 위치와 동일시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고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외부 생식기의 기능에 집착하며, 자신들을 탈식민지화 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을 식민화함으로써 정신 승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남성문화로 승인하는 순간 남자들간의 차이는 사라져버린다. 남자들 간의 차이가 드러날 수 있어야 만 다시 지배적 남성성을 획득하려는 불가능한 기획이 반복 수렴되는 무한 루프를 멈출 수 있다. 그래야만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성이 아니라 남자들의 남성성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이때 비로소 탈 식민지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권김현영 < 근대 전환기의 한국의 남성성>

 

 

인간을 두가지 젠더로 인식하는 문화 장치이나 이를 자기 범주로 몸에 익히도록 하는 과정인 섹스-젠더 이분법 혹은 이원젠더체계는 언제나 근대 의료 기술과 인식론을 밑절미로 삼는다. (중략)

근대적 젠더는 늘 개인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분류하고 정의하여 한 개인을 교집합 없는 범주에 가두고 단 하나의 명료한 범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며 한 개인의 몸을 둘 중 하나의 범주에 오차없이 부합하는 형태로 만든다. 하지만 개인을 명료하게 만드는 작업은 언제나 남성이냐 남성이 아니냐로 나뉘고 트랜스젠더퀴어나 인터섹스 혹은 다른 젠더 범주의개인은 남성 범주와 무관하게 된다. 남성 범주는 민족을 대표하는 동시에 그 민족 자체이기때문에 순수하다는 신화를 유지해야한다. 남성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이협하는 요소는 모두 비낭성 범주로 버려진다.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는 바로 이 과정 남성의 몸과 그 몸에 당연히 부착해 있다고 여겨지는 남성성을 여과하는 과정이며 특정한 남성 신체에 남성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는 신화를 영속하는 정책적 과정이다. 하지만 규법적 남성성은 트렌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중략)

근대 의료 기술은 남성성을 통해 제지위의 변화를 꾀했고 남성성은 의료 기술을 통해 제 실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렇게 구축된 실체는 불분명하다. 구체적인 것은 외부 성기 음경과 고환뿐이다. 이성애 관계에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음경이 있어야 비로소 의료 규범적인 남성이다. 재생산할 수 있는 음경이 있다면 자신의 젠더 인식과 상관없이 남성이어야 한다. 이것은 의학에서 신생아를 남성으로 판별할 때 가장 중시하는 조건이다. 이 조건은 아이러니하다. 근대의 이상게서 남성성은 과학적 합리성과 이성을 대표한다. 비합리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은 언제나 비남성성에 속한다. 아울러 자연적인 것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것도 남성성의 성질은 아니라고 회자된다. 남성성은 과학적 이성이며 감정없는 판단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과학과 이성을 자신의 밑절미 삼은 의학과 의료 기술기획이 규정한 남성/성은 외부 성기와 재생산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지만 아이러니가 아니다. 성폭력 가해 남성이나 성구매 남성이 가장 많이 하는 항변은 남성의 성욕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항변은 성폭력 가해와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자 생물학 혹은 의학을 본질주의로 만들고 규범으로 만드는 과학적 실천이다. 즉 근대적 이성 과학적 합리성은 거의 언제나 남성 (혹은 지배규범) 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실천 양식이다. 따라서 남성의 성욕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식의 언설은 의료 근대화가 기획하는 남성성의 핵심을 요약한다.

 

                                               루인 <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 중

 

 

 

 

새로운 인간 개념은 존재 자체를 사회적으로 존재할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사유하고 사회적인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민권을 다시 상상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하는 노동과 재생산하는 노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이 생산이자 재생산이며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이미 그 생산과 재생산의 거대한  사회적 과정에 개입한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그래서 시민권은 노동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기 이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로 혁신 될 필요가 없다. 이는 우리들이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시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두가지 다른 양상의 남성성이 출현했따. 이 둘은 국민국가의 주권적 존재인 남성의 위기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는 두가지 방식이다. 한쪽은 주권자로서 남성의 위기에 반응하여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자신들 역시 기득권자가 아니라 박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남성이 더는 주권의 독점자일 수도 생계 부양자일 수도 없는 재편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다음이 무엇이어야 하며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우치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어는 없다. 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자기 연민의 언어이다.

그리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남자들이 있다. 이들은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 특수성을 강조하는 모든 언어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이라 공략하면서 낙후시킨다. 이들이 운명 담론을 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다. 흥미롭게도 피해자 남성들의 언어가 자기 연민적이라면 이들의 언어는 자기 확신적이다. 이들이 이렇게 자기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적 약자의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다. 따라서 이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을 보편성의 옹호자로 선언하는 것이다.

 

 

                                                        엄기호 <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중

 

 

 

우리는 남녀라는 성별 이분법뿐만 아니라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이분법 부치와 펨이라는 이분법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이 대립적으로 있다는 섹스와 젠더 이분법까지도 모두 넘어서야 한다.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것은 두 개보다 더 많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숫자는 애당초 중요하지 않다. 이분법을 깬다는 것은 대립된 한 쌍으로 이루어진 구조의 언정성에 대한 거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항상 그렇게 명쾌하고 깔끔하게 분류될 필요가 없으며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질문은 다시 시작된다. 이른바 이성애자 남성은 누구인가? 이성애자 남성의 정의는 무엇인가 어떻게 구분하고 판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성애자가 될 수 있었고 남성이 될 수 있었는가? 여성을 사랑하기에 이성애자가 된 것인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끌린 것인가? 이성애자 남성은 상대의 성별이 다르다는 것을 어떤 감각으로 판단하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다른 성별을 지녔는가? (중략)

남성성과 이성애를 동일시 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은 레즈비언을 남성성이 과잉된 여성으로 게이를 남성성이 결여된 존재로 다룬다. 그러다면 과잉이나 결여가 아닌 적정량의 남성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일까? 왜 남성성은 이토록 쉽게 과잉되거나 결여될 수 있는가? 게이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아들이 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성애자 부모들은 왜 그런 걱정에 사로잡힐까? 이성애는 자연의 질서이고 남성성은 타고나 ㄴ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질까 두려워하는 걸까? 남성서과 이성애의 정상성에 대한 믿음은 그토록 강력하면서도 인정성에 대한 믿음은 왜 이토록 허약할까?

이 시대를 뒤덮은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는 사실상 이성애자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의 작동때문이다.

 

                           정채윤 <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

 

 

트랜스 남성의 남성성은 일견 전형적인 한남이 되고 싶은 욕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내가 처음 느꼈던 평범한 남성성은 일상에 만연해 있고 한남들이 과시하는 바로 그 남성성이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이나 페니스 유무를 비롯해서 신체적 차이등 들킬 위험을 내재화하는 맥락상 조건은 분명 다르지만 마초스러운 너무나 마초스러운 트렌스남성은 한국 사회의 남성성과 구분짓는 게 무의미하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의 규범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수행 불가능 그자체가 남성성의 특성이기도 하다. 언제나 지연되는 것 늘 실패하는 것 적절한 좌절을 추동력 삼아 사회적 남근이라는 성별 위계와 역할을 지속하는 것이 지배적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ㅏ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남성성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각의 남성 집단들이 바련하는 남성성이 그러하듯 트랜스 남성 역시 한남으로서 남성성이 지니는 수행 불가능성을 이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트랜스남성에게 남성성이란 언제나 획득할 수 엇음으로써 얻어지는 역설적이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트랜스 남성의 트랜지션 과정은 그저 한남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트렌스 남성의 남자되기 욕망과 실천은 결국 이 사회 주류 남성의 문화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트렌스 남성은 지금껏 그래왔듯 자신들의 맥락과 입장에서 성별 규범을 충실히 수행하고 남성성을 발현하며 살아갈 것이다. 트렌스 남성성은 한남이 됨으로써 한국 남자의 남성성을 충실히 따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생겨날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 다른 방향의 변화를 만들지도 모른다"트래느 남성이 되거 싶은 것은 한남인가?"

 

                                                    준우 <트랜스 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남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

한국남성은 한국 남성으로 만들어진다.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국가에서 부여하는 주민번호 뒷자리를 홀수로 부여받는 순간 남자로 길러지고 만들어져간다.

내 의사나 성향 어떤 호르몬의 작용과는 상관없이 남자라는 틀에 들어간다.

남자답지 못하게.....

남자가  그러면 안되지....

남자가 이깐 일로....

남자라면 당연히....

어떻게 남자한테 감히...

남성은 권력이고  힘이고 세상의 기준이 된다.

세상은 남자와 남자가 아닌 나머지로 나뉜다.

그렇게 기준이 된 그들은 그 기준에 벗어나는걸 못견디고 두려워한다.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다 다르다고 하는데 세상에는 모두가 같은 남자와 다른 나머지들이 있다.

모두 같아야 하는 남자들은 힘들것이다.

나도 내가 아닌 것을 그런 척 하는게 힘들다는 걸 알고 그건 꼬마들도 몸이 배배꼬이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그냥 다른 수도 있고 다양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게 편하다,

세상이 변하니까 내가 변해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변하하는 세상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움직여가는게 편하지 않나?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은 변해도 되고 달라도 되고 힘을 빼도 된다는 걸 아는 일이다.

페미니즘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좋은 방향이라는 걸 이렇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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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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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그 전 달에 나는 그와 여섯 번쯤 대화를 나눴는데 실망스럽게도 그와는 별로 할 얘가기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어떤 신비로운 거움일거라는 첫 인상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그저 한동네의 호화로운 여관집 주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누구나처럼 개츠비와 데이지를 중심에 놓고 읽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 사랑일까?

통속적이고  들 떠 있는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한 사람들 과연 사람은 뭘까?

왜 개츠비가 위대하지?

왜 이것이 고전이 되었지? 그냥 통속적인 이야기인데? 하이틴 로맨스랑 다른게 뭐지?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나는 다른 인물보다 화자인 닉 게러웨이에 주목했다.

그는 이 소설의 화자이다.

우리는 그가 보고 그가 느끼고 그가 판단하는 걸 볼 수 밖에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처럼 누군가 일인칭 화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른 판단을 할 수 없다.  독자는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책을 닉의 시선을 통해 그에게 의지하며 알아간다.

 

닉은 상류층 인물이다. 개츠비보다는 데이지와 톰에 가까운 인물이다. 다만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인묭문처럼 내가 가진 시선이 어떤 특수성에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걸 늘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나 인식과 행동이 일치하진 않는다. 의식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생각하고 타인을 바라보지만 알게 모르게 닉의 계급과 그가 가진 익숙한 문화가 튀어나와 그의 시선을 조절한다.

 

닉의 시선에는 늘 우월함이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주인공들의 움직임에서 한 발 떨어져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입장을 취하고 어느 편에도 쉽게 서려고 하지 않았다. 일인칭이지만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게 화자가 끼어들 만한 여지가 없을 수도 있지만  닉을 얄미울만치 두 세계 사이를 걸치고 있으며 빠져들지 않는다.그는 늘 세계의 바깥에 서 있고 셰게 안으로 발 하나를 걸쳐 놓을 뿐이다. 언제든 뺄 수 있고 언제든 선을 그을 수 있게

그는 이야기 밖에서 인물들을 바라보지만 모두에게 공정하지 않고 가끔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그때는 철저하게 자기의 입장이고 스스로를 변호할 뿐이다.

톰과 데이지와의 관계 그리고 개츠비와의 관계에서 나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라는 위치에서 둘 을 내려다 본다.

속물적이고 즉흥적이 인물의 일탈들에도 냉소적이고  개츠비의 막무가내의 자아도취같은 로맨스에도 쉽게 공감하지는 않는다.

어떤 인물도 이해하지만 그 입장을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사실 누군가 나와 다른 타인을 공감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비지의 조언이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제각각의 입장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이다. 나의 입장에서 타인을 판단하는 건 어쩌면 편견이고 오만일 수 있다.

 동시에 그 말은 많은 걸 가진 입장에서 너보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주위해야한다는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닉의 태도는 각자의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태도와 함께 그럼에도 나는 그 지저분한 관계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몸사람도 느껴졌다.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통속적인 치정극을 닉과 함께 보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닉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 결핍을 알지만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그 결핍을 채우고 싶어 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통해 상류층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싶고 데이지는  로맨틱한 사랑도 꿈꾸지만 동시에 톰과의 생활이 주는 상류층의 달콤함을 더 갈망하고 톰은 머틀과의 불룬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머틀 역시 톰을 통해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닉 역시 이들의 일상을 우연히도 함께하고 엿보면서 아무일도 없고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더하고 자기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얻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내게 없는 걸 굳이 나를 쥐어 짜내며 구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풍요하게 가지고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전적으로 타인이 그것을 충족시켜 줠거라고 믿거니 해서는 안된다.

인물들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채워주길 바란다.

내가  결핍된 것을 말하지 않아도 타인이 채워주기를.. 너무 바라기만 한다.

그러나 결핍된 사람이 또다른 결핍된 사람을 채워주긴 힘들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하고 편한 것에 끌리는 편이라 상처를 가진 사람은 또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상처를 있는 대상을 택한다. 동병상련이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위안이 되리라 믿지만 냉정하게도 내 상처조차 어쩌자 못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 줄 수 없다. 오히려 내 상터가 거 벌어지지 않은 것에 더 신경을 쓰느라 타인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내가 가진 상처는 그 상대로 인해 더 커지고 오히려 또다른 상처를 얻게 된다.

사실 없는 사람들끼리 보듬고 살거나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치유해주고 살아가면 좋겠지만

사람은 내가 가가진 것과 비슷한 사람에게 익숙하게 끌리면서 동시에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채워주기를 바란다. 같은 대상에게 너무나 다른 걸 바라는 것이다.

 

자기부정에서 출발한 개츠비는  허영심이 많고 나약한 데이지를 안아 줄 수 없다.

데이지 역시 개츠비에게 색다른 매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에게 어떤 안전기지가 되어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톰은 데이지가 상징하는 상류층의 세상을 버릴 생각은 없지만 머틀이 가진 육감적인 매혹을 떨쳐버릴 생각도 없다.

닉 역시 모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저 자신에게만 관심있는 인물이다. 그들을 통해 그들을 이해햐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보며 나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야.. 하며 안도하는 인물이다.

모두 이기적으로 타인을 통해 자기를 위안하고 적당히 무시하면서도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행동한다.

모두가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것이 그가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것보다.

그런 위선적이고 욕심스러움 속에서도 대책없이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무언가를 믿고 달려가는 무모하면서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때문 아닐까

대책없이 무모하며 순수한 개츠비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데이지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지만 결국 스스로  파멸한다. 결핍을 채우기위해 가졌던 것이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었지만 그가 소망했던 그 순수함은 거짓이고 찰라적인 것이고 허상이었을 뿐이다.

좀 서글픈 위대함이다.

 

누구나 자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

자기가 얼마를 가졌든 보잘것없는 위치든 제각각 자기 위치에서 보이는 시선을 가졌을 뿐이다.

개츠비의 집에서 건너 보이는 반짝이는 초록불빛은 그립고 갈망의 대상이었고

부캐넌의 집에서 건너보이는 집들은 그저 졸부들의 천박한 모습이다.

내가 보는 것이 사실 그 대상의 본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런 모양인지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닉이 들려주는 개츠비의 살아온 모습과 개츠비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아들 개츠의 모습은 다르다. 각자의 시선에 각자의 정서를 필터로 보는 것이지만 두 가지 모습이 다 개츠비였을 것이다.

다만 닉은 닉의 입장에서 보고 판단하고 타인의 판단들은 유보하거나 무시한다.

아예노골적으로 무시하며  타인을 보려고 하지 않은 톰이나 데이지, 조던보다 모든 걸 다 보려고 한다는 중립적인 자세를 지니려하지만 정작 자기의 시각도 그리 넓지 않다는 걸 모르는 닉의 시선은 더 큰 편견이다.

 

닉도 신비한 이웃 개츠비에게 관심을 가진다.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을 갖고 경외감을 느낀 적도 있지만 금방 개츠비가 진실되지 않다는 것과 자신과 다른 부류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데이지에게 아직도 미련을 가졌고 그가 데이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름다운 셔츠로 상징되는 부의 과시이상 아무것도 없으며 결국 데이지는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거라는 것도 짐작한다. 개츠비는 그냥 그들 옆을 서성이다 쫒겨날 거란 걸 안다.

개츠비의 파티에 왔던 사람도 호기심으로 다가 왔다가 그냥 이용하고 즐기기만 했을 뿐이듯

닉 역시 마지막까지 개츠비를 지켰지만 나는 아직 그의 진심을 믿을 수 없다. 게츠비는 어쩌면 닉의 삶에 하나의 색다르고 의미있을 추억의 하나로 남을 뿐이다.

재즈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곧 다시 전쟁이 시작될 것이고 밀주를 마시며 떠뜰썩하게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은 또다른 삶이 시작될 것이다. 개츠비는 잊힐 것이고 톰과 데이지는 그냥 같은 패턴으로 살아갈 것이다.

삶의 한 시대가 지난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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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의 걱정인형이 되고 싶었다.

아이가 나에게 자기 고민을  울면서 화를 내면서 후회하면서 털어놓는 순간 내가 그 걱정을 모두 흡수해서 아이는 다시 뽀송뽀송하고 무지하고 순수해졌으면 좋겠다.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그 말을 통해 그의 걱정이 나에게로 옮겨왔으면 좋겠다

걱정인형에게 모든 걱정을  맡겨버린 아이는 이제 아무런 거침이 없으면 좋겠다.

 

타인의 걱정따위는 관심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아이의 걱정만큼은 내가 안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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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페미니스트 -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 쏜살 문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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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옹고지 아디치에의 두번째 페미니즘 서적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조언을 해달라는 친구를 위해 그녀가 열네가지 제안을 한다.

이 제안들은 아이에게도 좋은 지침이 되지만 엄마에게도 그리고 여성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제안하는 것들이다.

사람에 따라서 이정도 쯤이야 하는 사람부터 아니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거야? 싶은 사람까지 다양하다. 내 입장에서는 다 대단하지 않고 알만한 것들인데 다만 내가 얼마나 몸에 익히고 있느냐의 문제들이다.

사람이 바뀌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 깨달음을 실천 해야하며 계쏙되는 반복과 훈련으로 몸에 익혀야 비로소  제것이 된다.

누구나 책을 읽고 공부하고 생각을 하게되면 꺠달음의 단계를 가질 수 있다.

여태 내가 어떤  모순된 패턴으로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고 내 속의 검은 그림자나 자라지 못한 내면아이를 직면할 수 있고 내가 어떤 태도로 가치관으로 살아왔으며 그게 어떻게 잘못되었거나 왜곡되었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제 알았으니 되었다.. 라고 생각하그 마무리한다.

알았으면 행동해야한다. 몸이 바뀌는 일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다리로....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먼 여행길이다.

그렇게 행동하게 되면 조심스럽게 두 눈 질끈 감고 한번 해버리면 의외로 쉽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은 쉽다.

바뀐 깨달음을 내 몸이 익혀야 하고  계속 훈련을 해서 무심코 바뀐 행동이 나올때 비로소 나는 변한 것이고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열네가지 제안은 몇권의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면 다들 알고 있는 것들이다

 

충만한 사람이 될 것

같이 할 것

성 역할은 완전히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여자니까"는 그 무엇에 대한 이유도 될 수 없어 절대로

내가 '유사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의 위험성에 주의 할 것

독서를 가르칠 것

흔히 쓰는 표현에 대해 의구심을 가르칠 것 

                       언어는 우리의 편견 믿음 추측의 저장고야. 

                       하지만 아이한테 그 점을 가르치려 면  우선 너부터 네가 쓰는 말에 의구심을                    가져야 해

                      질문들을 할 때 항상 일상적인 예를 드는 것이 유용해

                      추상적인 언어는 쉽게 와 닿질 않아

결혼을 업적처럼 이야기 하지 말것

호감형이 되는 것을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호감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사람 정직한 사람. 친절한 사람

                           용감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자기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도 자기와 동등

                           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누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누군가를 좋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도록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칠 것

아이의 일 특히 외모와 관련된 일에 관여할 때 신중히 할 것

                             나의 외모에 대한 관심이나 취향이 누군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만족감이 기준이 되어야 해  화장을 좋아하고 꾸미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그렇게 하고 외모에 무심한 아이는 그렇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지

우리 문화가 사회 규범에 대한 근거를 들 때 선택적으로 생물학을 사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생물학은 매력적인 학문이지만 사회규범을 정당화 하기 위한 근거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사회규범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사회규범은 존재하지 않아.

일찍부터 성교육을 할 것

사랑은 반드시 찾아올테니 응원할 것

억압에 대해 가르칠 대 억압당하는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

차이에 대해 가르칠 것

 

 

꼭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자녀교육에 좋은 조언들이다.

건전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서로 존중하고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 타인을 공감하는 건 중요하다.

그의 말대로 쉬운 말로 일상적인 내용을 예로 들어 씌여 있어 언제 어디를 펼쳐 보든 좋다.

내가 조금 흔들린다고 느낄 때 내가 가진 가치관에 혼돈이 올때 보면 좋겠다.

아이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다만 책의 부피에 비해 가격은 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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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7-09-0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배송받아 읽고 있습니다.
정말 양에 비해 가격이 무겁지만
그만큼 읽는 제 눈도 무거워서인지 빨리 읽히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에서 상처받고 관계에서 위로받는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위로한다면  그건 살아가는 큰 힘이다.

 

아이가 엄마를 떠나 세상을 탐험할 수 있는 힘은 언제나 뒤에서 든든하게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엄마가 있다는 믿음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다 다시 돌아가면 언제나 그곳에 나를 안아줄 엄마가 있다는 건 큰 힘이다.  애착관계에서 안전기지는 중요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싸우고 상처입고 돌아와도 쉴 수 있고 내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안전기지는 아이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중요하다.

 

집단 상담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참가자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기는 남편과 아이들의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고 했었다. 참하고  따뜻한 인상의 그 참가자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가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안다면서 가족에게 특히 남편에게 그런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참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때 상담선생님이 격려를 해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준다는 건 정말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역할이 나를 소모하면서까지 희생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준다는 건 중요하지만 상대가 성인일 경우 안전기지 기능을 넘어 그 대상의 대체 엄마 역할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건 할 수도 없지만 해서도 안된다. 아이의 엄마는 될 수 있지만 남편의 엄마는 될 수 없다. 성인사이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여야 하니 한쭉이 일방적으로 품어주고  희생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어쩌면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경험이다.

우리엄마는 희생적인 엄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아이들도 안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어느 나이가 되면 안다. 아주 못되먹은 아이나 문제가 있는 가정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표현하지 않아도 부모의 희생을 고마워한다. 때로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다시 고마워할 주로 아는 존재다. 표현하느냐 마느냐로 판단할 수 없다. 말투나 태도는 껄렁거리고 무심하더라도 그 희생을 절대 모를 수 없다.

나도 한때 엄마한테 싸가지 없이 굴기도 했을것이고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속에는 항상 엄마를 걱정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나 아니어도 엄마에게는 걱정이 한보따리고 나 말고도 신경써야 하고 돌봐야 할 식구가 더 있고 더 속썩이는 사람도 있다.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거기에 돌을 하나 더 얹지는 말자라는 마음

내가 내키지 않아도 좋아요 괜찮아요 상관없여요 내가 하죠 뭐.. 이건 내가 가진 유일한 대사였다

물론 엄마에게 물어본다면 나로인해 속아 까맣게 타들어갔던 일 치사하게 상처받고 무시당하고 소외되었던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도 많이 저자세였다고 할 수 있다

나이를 먹어서일 수도 있지만 엄마가 얼마나 희생했고 고생했는지 아니까 사소한 건 그냥넘어가고 이건 아니지 싶지만 반박하지 않고 나는 늘 괜찮고 손이 가지 않고 혼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견뎌야 한다는 마음이 사실 나를 많이 외롭게 했다. 나 너무 속상해.. 하며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일은 될수 있는대로 하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하지 못했으면서 나는 자꾸 주눅들었고 혼자 외로웠고 혼자 미웠다.

그래서이다. 그 희생의 강도가 심하면 심할 수록 그 희생이 아이에게 족쇄가 되기도 한다.

희생하는 상대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다. 내 부모가 내 엄마가 저렇게 희생하고 고생하는데 그런 엄마에게 "노"라고 할 수 없다. 왠만하면 "에"라고 할 수 밖에 없고 괜찮다고 하고 좋다고 하고 그냥 소소한 상처는 내가 받고 내가 견디고 만다.

그리고 희생이란  숭고한 것이 아니다.

사실 사람이라면 내가 감당하는 범위를 넘어가면 보상을 생각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희생하는 순간은 순수했을 지라도 그 일이 자꾸 반복되면 왜 나만 참아야 할까 하는 마음 왜 내가 해주는 걸 알지 못하지 왜 나만 해야할까 내가 이만큼 해주면 나도 뭔가르 바래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기대하는 댓가가 없으면 당연히 실망한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희생은 더 이상 숭고하지 않은 부담이 되고 억압이 되고 관계가 왜곡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희생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베품 그 적정선이 중요하다.

이기적인 것과 내 중심을 잡고 나를 존중하는 것은 다르다.

언젠가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난다. 성장해야한다. 그게 정상이다.

나에게서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고 자유롭게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게 손을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언제든 상처받고 실패해서 돌아오고 싶아면 기꺼이 받아들이면 된다. 쉬게하고 울게 하고  맛있게 먹고 편안하게 자게 해주면 된다. 조언할 수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다시 떠날 때가 되면 손을 흔들어 줄 뿐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사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타인이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그건 그의 입장에서이고 그가 베푸는 친절들도  싸가지 없이 말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친절이고 그가 할 수 있는 친절이지 그게 꼭 나에게 맞는것도 아니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타인의 친절에 감동했다면 우연히도 서로의 감정 주파수가 맞아 떨어진 행운일 뿐 그의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친절이 가장이거나 위선이라는 건 아니다. 그건 충분한 진심이고 정성이지만 모든 정성이 다 가치를

발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거절한다.

내가 원치 않은 것도 거절한다.

내가 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면 그 이후는 어찌 될지 생각하지 않는다.

원하는 걸 해주고 그냥 잊어버린다

그게 원망으로 돌아와도 그건 내탓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걸 내가 몰랐던 건 내가 그가 아니니 당연하고 그가 싫어하는 그 무언가는 내가 아니다. 내가 행한것 내가 주었던 무엇일 뿐이다.

이기적이고 냉정하지만 그게 맞을 거다.

타인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고 부담을 갖지도 주지도 않는것

그건 이기심이지만 동시에 내가 지탱하는 힘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잘 늙어가는 것 노후 준비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내가 잘 살아가는 것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타인도 타인의 삶을 제대로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이기적이지만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유감이지만 내가 지치지 않게 지키는 하나의 갑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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