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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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그 전 달에 나는 그와 여섯 번쯤 대화를 나눴는데 실망스럽게도 그와는 별로 할 얘가기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어떤 신비로운 거움일거라는 첫 인상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그저 한동네의 호화로운 여관집 주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누구나처럼 개츠비와 데이지를 중심에 놓고 읽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 사랑일까?

통속적이고  들 떠 있는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한 사람들 과연 사람은 뭘까?

왜 개츠비가 위대하지?

왜 이것이 고전이 되었지? 그냥 통속적인 이야기인데? 하이틴 로맨스랑 다른게 뭐지?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나는 다른 인물보다 화자인 닉 게러웨이에 주목했다.

그는 이 소설의 화자이다.

우리는 그가 보고 그가 느끼고 그가 판단하는 걸 볼 수 밖에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처럼 누군가 일인칭 화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른 판단을 할 수 없다.  독자는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책을 닉의 시선을 통해 그에게 의지하며 알아간다.

 

닉은 상류층 인물이다. 개츠비보다는 데이지와 톰에 가까운 인물이다. 다만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인묭문처럼 내가 가진 시선이 어떤 특수성에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걸 늘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나 인식과 행동이 일치하진 않는다. 의식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생각하고 타인을 바라보지만 알게 모르게 닉의 계급과 그가 가진 익숙한 문화가 튀어나와 그의 시선을 조절한다.

 

닉의 시선에는 늘 우월함이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주인공들의 움직임에서 한 발 떨어져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입장을 취하고 어느 편에도 쉽게 서려고 하지 않았다. 일인칭이지만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게 화자가 끼어들 만한 여지가 없을 수도 있지만  닉을 얄미울만치 두 세계 사이를 걸치고 있으며 빠져들지 않는다.그는 늘 세계의 바깥에 서 있고 셰게 안으로 발 하나를 걸쳐 놓을 뿐이다. 언제든 뺄 수 있고 언제든 선을 그을 수 있게

그는 이야기 밖에서 인물들을 바라보지만 모두에게 공정하지 않고 가끔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그때는 철저하게 자기의 입장이고 스스로를 변호할 뿐이다.

톰과 데이지와의 관계 그리고 개츠비와의 관계에서 나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라는 위치에서 둘 을 내려다 본다.

속물적이고 즉흥적이 인물의 일탈들에도 냉소적이고  개츠비의 막무가내의 자아도취같은 로맨스에도 쉽게 공감하지는 않는다.

어떤 인물도 이해하지만 그 입장을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사실 누군가 나와 다른 타인을 공감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비지의 조언이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제각각의 입장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이다. 나의 입장에서 타인을 판단하는 건 어쩌면 편견이고 오만일 수 있다.

 동시에 그 말은 많은 걸 가진 입장에서 너보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주위해야한다는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닉의 태도는 각자의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태도와 함께 그럼에도 나는 그 지저분한 관계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몸사람도 느껴졌다.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통속적인 치정극을 닉과 함께 보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닉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 결핍을 알지만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그 결핍을 채우고 싶어 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통해 상류층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싶고 데이지는  로맨틱한 사랑도 꿈꾸지만 동시에 톰과의 생활이 주는 상류층의 달콤함을 더 갈망하고 톰은 머틀과의 불룬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머틀 역시 톰을 통해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닉 역시 이들의 일상을 우연히도 함께하고 엿보면서 아무일도 없고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더하고 자기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얻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내게 없는 걸 굳이 나를 쥐어 짜내며 구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풍요하게 가지고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전적으로 타인이 그것을 충족시켜 줠거라고 믿거니 해서는 안된다.

인물들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채워주길 바란다.

내가  결핍된 것을 말하지 않아도 타인이 채워주기를.. 너무 바라기만 한다.

그러나 결핍된 사람이 또다른 결핍된 사람을 채워주긴 힘들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하고 편한 것에 끌리는 편이라 상처를 가진 사람은 또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상처를 있는 대상을 택한다. 동병상련이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위안이 되리라 믿지만 냉정하게도 내 상처조차 어쩌자 못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 줄 수 없다. 오히려 내 상터가 거 벌어지지 않은 것에 더 신경을 쓰느라 타인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내가 가진 상처는 그 상대로 인해 더 커지고 오히려 또다른 상처를 얻게 된다.

사실 없는 사람들끼리 보듬고 살거나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치유해주고 살아가면 좋겠지만

사람은 내가 가가진 것과 비슷한 사람에게 익숙하게 끌리면서 동시에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채워주기를 바란다. 같은 대상에게 너무나 다른 걸 바라는 것이다.

 

자기부정에서 출발한 개츠비는  허영심이 많고 나약한 데이지를 안아 줄 수 없다.

데이지 역시 개츠비에게 색다른 매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에게 어떤 안전기지가 되어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톰은 데이지가 상징하는 상류층의 세상을 버릴 생각은 없지만 머틀이 가진 육감적인 매혹을 떨쳐버릴 생각도 없다.

닉 역시 모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저 자신에게만 관심있는 인물이다. 그들을 통해 그들을 이해햐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보며 나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야.. 하며 안도하는 인물이다.

모두 이기적으로 타인을 통해 자기를 위안하고 적당히 무시하면서도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행동한다.

모두가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것이 그가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것보다.

그런 위선적이고 욕심스러움 속에서도 대책없이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무언가를 믿고 달려가는 무모하면서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때문 아닐까

대책없이 무모하며 순수한 개츠비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데이지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지만 결국 스스로  파멸한다. 결핍을 채우기위해 가졌던 것이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었지만 그가 소망했던 그 순수함은 거짓이고 찰라적인 것이고 허상이었을 뿐이다.

좀 서글픈 위대함이다.

 

누구나 자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

자기가 얼마를 가졌든 보잘것없는 위치든 제각각 자기 위치에서 보이는 시선을 가졌을 뿐이다.

개츠비의 집에서 건너 보이는 반짝이는 초록불빛은 그립고 갈망의 대상이었고

부캐넌의 집에서 건너보이는 집들은 그저 졸부들의 천박한 모습이다.

내가 보는 것이 사실 그 대상의 본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런 모양인지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닉이 들려주는 개츠비의 살아온 모습과 개츠비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아들 개츠의 모습은 다르다. 각자의 시선에 각자의 정서를 필터로 보는 것이지만 두 가지 모습이 다 개츠비였을 것이다.

다만 닉은 닉의 입장에서 보고 판단하고 타인의 판단들은 유보하거나 무시한다.

아예노골적으로 무시하며  타인을 보려고 하지 않은 톰이나 데이지, 조던보다 모든 걸 다 보려고 한다는 중립적인 자세를 지니려하지만 정작 자기의 시각도 그리 넓지 않다는 걸 모르는 닉의 시선은 더 큰 편견이다.

 

닉도 신비한 이웃 개츠비에게 관심을 가진다.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을 갖고 경외감을 느낀 적도 있지만 금방 개츠비가 진실되지 않다는 것과 자신과 다른 부류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데이지에게 아직도 미련을 가졌고 그가 데이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름다운 셔츠로 상징되는 부의 과시이상 아무것도 없으며 결국 데이지는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거라는 것도 짐작한다. 개츠비는 그냥 그들 옆을 서성이다 쫒겨날 거란 걸 안다.

개츠비의 파티에 왔던 사람도 호기심으로 다가 왔다가 그냥 이용하고 즐기기만 했을 뿐이듯

닉 역시 마지막까지 개츠비를 지켰지만 나는 아직 그의 진심을 믿을 수 없다. 게츠비는 어쩌면 닉의 삶에 하나의 색다르고 의미있을 추억의 하나로 남을 뿐이다.

재즈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곧 다시 전쟁이 시작될 것이고 밀주를 마시며 떠뜰썩하게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은 또다른 삶이 시작될 것이다. 개츠비는 잊힐 것이고 톰과 데이지는 그냥 같은 패턴으로 살아갈 것이다.

삶의 한 시대가 지난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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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의 걱정인형이 되고 싶었다.

아이가 나에게 자기 고민을  울면서 화를 내면서 후회하면서 털어놓는 순간 내가 그 걱정을 모두 흡수해서 아이는 다시 뽀송뽀송하고 무지하고 순수해졌으면 좋겠다.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그 말을 통해 그의 걱정이 나에게로 옮겨왔으면 좋겠다

걱정인형에게 모든 걱정을  맡겨버린 아이는 이제 아무런 거침이 없으면 좋겠다.

 

타인의 걱정따위는 관심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아이의 걱정만큼은 내가 안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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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페미니스트 -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 쏜살 문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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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옹고지 아디치에의 두번째 페미니즘 서적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조언을 해달라는 친구를 위해 그녀가 열네가지 제안을 한다.

이 제안들은 아이에게도 좋은 지침이 되지만 엄마에게도 그리고 여성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제안하는 것들이다.

사람에 따라서 이정도 쯤이야 하는 사람부터 아니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거야? 싶은 사람까지 다양하다. 내 입장에서는 다 대단하지 않고 알만한 것들인데 다만 내가 얼마나 몸에 익히고 있느냐의 문제들이다.

사람이 바뀌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 깨달음을 실천 해야하며 계쏙되는 반복과 훈련으로 몸에 익혀야 비로소  제것이 된다.

누구나 책을 읽고 공부하고 생각을 하게되면 꺠달음의 단계를 가질 수 있다.

여태 내가 어떤  모순된 패턴으로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고 내 속의 검은 그림자나 자라지 못한 내면아이를 직면할 수 있고 내가 어떤 태도로 가치관으로 살아왔으며 그게 어떻게 잘못되었거나 왜곡되었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제 알았으니 되었다.. 라고 생각하그 마무리한다.

알았으면 행동해야한다. 몸이 바뀌는 일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다리로....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먼 여행길이다.

그렇게 행동하게 되면 조심스럽게 두 눈 질끈 감고 한번 해버리면 의외로 쉽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은 쉽다.

바뀐 깨달음을 내 몸이 익혀야 하고  계속 훈련을 해서 무심코 바뀐 행동이 나올때 비로소 나는 변한 것이고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열네가지 제안은 몇권의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면 다들 알고 있는 것들이다

 

충만한 사람이 될 것

같이 할 것

성 역할은 완전히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여자니까"는 그 무엇에 대한 이유도 될 수 없어 절대로

내가 '유사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의 위험성에 주의 할 것

독서를 가르칠 것

흔히 쓰는 표현에 대해 의구심을 가르칠 것 

                       언어는 우리의 편견 믿음 추측의 저장고야. 

                       하지만 아이한테 그 점을 가르치려 면  우선 너부터 네가 쓰는 말에 의구심을                    가져야 해

                      질문들을 할 때 항상 일상적인 예를 드는 것이 유용해

                      추상적인 언어는 쉽게 와 닿질 않아

결혼을 업적처럼 이야기 하지 말것

호감형이 되는 것을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호감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사람 정직한 사람. 친절한 사람

                           용감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자기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도 자기와 동등

                           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누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누군가를 좋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도록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칠 것

아이의 일 특히 외모와 관련된 일에 관여할 때 신중히 할 것

                             나의 외모에 대한 관심이나 취향이 누군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만족감이 기준이 되어야 해  화장을 좋아하고 꾸미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그렇게 하고 외모에 무심한 아이는 그렇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지

우리 문화가 사회 규범에 대한 근거를 들 때 선택적으로 생물학을 사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생물학은 매력적인 학문이지만 사회규범을 정당화 하기 위한 근거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사회규범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사회규범은 존재하지 않아.

일찍부터 성교육을 할 것

사랑은 반드시 찾아올테니 응원할 것

억압에 대해 가르칠 대 억압당하는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

차이에 대해 가르칠 것

 

 

꼭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자녀교육에 좋은 조언들이다.

건전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서로 존중하고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 타인을 공감하는 건 중요하다.

그의 말대로 쉬운 말로 일상적인 내용을 예로 들어 씌여 있어 언제 어디를 펼쳐 보든 좋다.

내가 조금 흔들린다고 느낄 때 내가 가진 가치관에 혼돈이 올때 보면 좋겠다.

아이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다만 책의 부피에 비해 가격은 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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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7-09-0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배송받아 읽고 있습니다.
정말 양에 비해 가격이 무겁지만
그만큼 읽는 제 눈도 무거워서인지 빨리 읽히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에서 상처받고 관계에서 위로받는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위로한다면  그건 살아가는 큰 힘이다.

 

아이가 엄마를 떠나 세상을 탐험할 수 있는 힘은 언제나 뒤에서 든든하게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엄마가 있다는 믿음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다 다시 돌아가면 언제나 그곳에 나를 안아줄 엄마가 있다는 건 큰 힘이다.  애착관계에서 안전기지는 중요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싸우고 상처입고 돌아와도 쉴 수 있고 내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안전기지는 아이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중요하다.

 

집단 상담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참가자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기는 남편과 아이들의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고 했었다. 참하고  따뜻한 인상의 그 참가자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가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안다면서 가족에게 특히 남편에게 그런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참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때 상담선생님이 격려를 해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준다는 건 정말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역할이 나를 소모하면서까지 희생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준다는 건 중요하지만 상대가 성인일 경우 안전기지 기능을 넘어 그 대상의 대체 엄마 역할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건 할 수도 없지만 해서도 안된다. 아이의 엄마는 될 수 있지만 남편의 엄마는 될 수 없다. 성인사이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여야 하니 한쭉이 일방적으로 품어주고  희생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어쩌면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 경험이다.

우리엄마는 희생적인 엄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아이들도 안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다는 걸 어느 나이가 되면 안다. 아주 못되먹은 아이나 문제가 있는 가정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표현하지 않아도 부모의 희생을 고마워한다. 때로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다시 고마워할 주로 아는 존재다. 표현하느냐 마느냐로 판단할 수 없다. 말투나 태도는 껄렁거리고 무심하더라도 그 희생을 절대 모를 수 없다.

나도 한때 엄마한테 싸가지 없이 굴기도 했을것이고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속에는 항상 엄마를 걱정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나 아니어도 엄마에게는 걱정이 한보따리고 나 말고도 신경써야 하고 돌봐야 할 식구가 더 있고 더 속썩이는 사람도 있다.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거기에 돌을 하나 더 얹지는 말자라는 마음

내가 내키지 않아도 좋아요 괜찮아요 상관없여요 내가 하죠 뭐.. 이건 내가 가진 유일한 대사였다

물론 엄마에게 물어본다면 나로인해 속아 까맣게 타들어갔던 일 치사하게 상처받고 무시당하고 소외되었던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도 많이 저자세였다고 할 수 있다

나이를 먹어서일 수도 있지만 엄마가 얼마나 희생했고 고생했는지 아니까 사소한 건 그냥넘어가고 이건 아니지 싶지만 반박하지 않고 나는 늘 괜찮고 손이 가지 않고 혼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견뎌야 한다는 마음이 사실 나를 많이 외롭게 했다. 나 너무 속상해.. 하며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일은 될수 있는대로 하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하지 못했으면서 나는 자꾸 주눅들었고 혼자 외로웠고 혼자 미웠다.

그래서이다. 그 희생의 강도가 심하면 심할 수록 그 희생이 아이에게 족쇄가 되기도 한다.

희생하는 상대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다. 내 부모가 내 엄마가 저렇게 희생하고 고생하는데 그런 엄마에게 "노"라고 할 수 없다. 왠만하면 "에"라고 할 수 밖에 없고 괜찮다고 하고 좋다고 하고 그냥 소소한 상처는 내가 받고 내가 견디고 만다.

그리고 희생이란  숭고한 것이 아니다.

사실 사람이라면 내가 감당하는 범위를 넘어가면 보상을 생각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희생하는 순간은 순수했을 지라도 그 일이 자꾸 반복되면 왜 나만 참아야 할까 하는 마음 왜 내가 해주는 걸 알지 못하지 왜 나만 해야할까 내가 이만큼 해주면 나도 뭔가르 바래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기대하는 댓가가 없으면 당연히 실망한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희생은 더 이상 숭고하지 않은 부담이 되고 억압이 되고 관계가 왜곡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희생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베품 그 적정선이 중요하다.

이기적인 것과 내 중심을 잡고 나를 존중하는 것은 다르다.

언젠가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난다. 성장해야한다. 그게 정상이다.

나에게서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고 자유롭게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게 손을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언제든 상처받고 실패해서 돌아오고 싶아면 기꺼이 받아들이면 된다. 쉬게하고 울게 하고  맛있게 먹고 편안하게 자게 해주면 된다. 조언할 수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다시 떠날 때가 되면 손을 흔들어 줄 뿐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사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타인이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그건 그의 입장에서이고 그가 베푸는 친절들도  싸가지 없이 말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친절이고 그가 할 수 있는 친절이지 그게 꼭 나에게 맞는것도 아니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타인의 친절에 감동했다면 우연히도 서로의 감정 주파수가 맞아 떨어진 행운일 뿐 그의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친절이 가장이거나 위선이라는 건 아니다. 그건 충분한 진심이고 정성이지만 모든 정성이 다 가치를

발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거절한다.

내가 원치 않은 것도 거절한다.

내가 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면 그 이후는 어찌 될지 생각하지 않는다.

원하는 걸 해주고 그냥 잊어버린다

그게 원망으로 돌아와도 그건 내탓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걸 내가 몰랐던 건 내가 그가 아니니 당연하고 그가 싫어하는 그 무언가는 내가 아니다. 내가 행한것 내가 주었던 무엇일 뿐이다.

이기적이고 냉정하지만 그게 맞을 거다.

타인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고 부담을 갖지도 주지도 않는것

그건 이기심이지만 동시에 내가 지탱하는 힘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잘 늙어가는 것 노후 준비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내가 잘 살아가는 것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타인도 타인의 삶을 제대로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이기적이지만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유감이지만 내가 지치지 않게 지키는 하나의 갑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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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을 읽은 건 아닙니다..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에서 들었지요.

서간문인줄 몰랐습니다.. 김영하가 서간문 소설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네 하는 것이 첫 생각이었습니다. 어딘가 신경숙의 <풍금이 있는 자리>를 닮았고 김애란의 <서른>이 떠올랐습니다.

여성분이 낭독해서인지 아니면 주인공 화자가 여성이어서인지 여성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세상에 흥미로운 부녀지간이구나 하며 듣고 있는데 자꾸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물론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그냥 정상이 아닌 독특한 경우라고 하기엔 뭔가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관계가 답답하고 소극적이어서인가 했는데 그것때문만은 아닌거 같더군요.

뭐랄까 화자는 딸이고 딸이 자신의 입장에서 아버지와의 관계 가족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데, 분명히 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도데체 그 딸의 모습이 잡히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자신만만하고 이기적이고 여성편력도 있고 그러면서 어린아이같은 면도 있는  한마디로 대책없는 유형이구나 하는 게 딱 왔어요. 젊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고 나이 먹어서도 철들지 않은 영원한 피터팬처럼 살면서 보여지고 보여줄 수 있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정작 말하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걸까?

남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대도 말입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드러내는 법을 몰라서

아니 어쩌면 자기가 어쩐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딸은 그냥 아버지의 딸 그 이외의  존재감은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아버지에게 벗어나질 못했지?

다른 가족이 하나 둘 아버지 곁을 떠나고 아버지가 다른 평범한 아버지와 다르고 자기와의 관계조차 평범한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복종하고 따랐을까 의문이었습니다

배울만큼 배웠고 알만한 건 다 알고 있을  성인인데 말입니다.

 내 입장에선  한없이 어리석고  미련하고 어떤 면에서는 무책임해보였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아버지에게 길들여질 수 있을까?

딸은 아버지와 둘이 떠난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의 기이함을 느낍니다.

혼자서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는 말에 화를 내던 아버지 . 이국의 역에서 만난 한국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로 냉담해지는 아버지는 분명 정상은 아닙니다.아직은 어린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그 아버지가 딸을 이성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 딸이라는 인식이 '내 것'이라는 소유와 일치외면서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라 보였습니다.

그 지점도 편하질 않은데 어떤 저항도 없이 그대로 따르는 딸이 더 불편했습니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동경하지도 않았나?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나?

물론 아버지와의 테이트 외식등이 더 고급지고 더 편리하다는 걸 알지만

그 또래 딸이라면 아버지가 주는 물질적 풍요로움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자유도 갈망하고 달콤한 사랑도 꿈꾸지 않을까요?

딸의 모든 기준은 아버지이고 아버지와의 생활이 삶의 중심입니다.

물른 짐작하다시파 사회관계는 점점 좁아지고 사람들이 멀어지고 가족마저 모두 떠나고 혼자 아버지와 남게되죠. 그 아버지 역시 딸에게만 집중하진 않습니다.

끊임없이 다른 여성을 만나고 추문을 만들고 딸은 자기의 성공한 하나의 장식정도로만 여기는 걸 뻔히 알지만 딸은 오히려 아버지의 기대에 못미친다는 것에 죄책감마저 느끼고 미안해합니다.

중간에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동생과 엄마가 있는 미국으로 달아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아버지의 임종을 홀로 맞이합니다. 결국 죽음으로 아버지와 분리되는 거죠

누군가는 스무살에 누군가는 더 늦더라도 살아서 해내는 일을 그 딸은 죽음이 와서야 비로소 독립아닌 독립이 되고 성장 아닌 성장을  시.작. 하.려.합.니.다.

 

어린 왕자의 <길들여진다>는 건 참 매혹적이고 따뜻한 의미였습니다.

서로가 관계를 맻고 의미가 되며 그래서 세상이 더 넓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직 두 사람>에서의 길들여짐은 조금 끔찍합니다. 서로가 겹치며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거 포함되어져서 그러니까 먹혀서 비로소 하나가 되어버리는 의존적이고 식민지의 형태로 길들여집니다.

아버지가 정한 전공과 아버지가 정해주는 진로를 따라가지만 자기의 것이 아니니 늘 남의 옷처럼 어색하고 엉뚱한 별에 떨어진듯 적응할 수 없습니다. 누

딸은 아버지를 통해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의 꿈과 가치관을 결정합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인지 하지 않은것인지 자꾸 혼돈스럽지만 어쩌면 하지 않은게 더 편해서 하지 않음을 선택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냄비속이 편하다면 개구리는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지요. 그 냄비속의  개구리처럼 딸은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에게 젖어가고 익숙해지고 그 바깥의 세상은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인질이 자기를 잡고 있는 자에게 동화되는 스톡홀롬 신드롬처럼 보일 뿐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여행 이전에도 그 딸은 아버지에게 이미 길들여졌던 걸까요? 아니면 여행을 통해 어떤 전환점이 되고 아버지에게 종속도어버린걸까요?

아버지는 아내나 다른 가족은 (또 하나의 딸이 더 있는데)  관심이 없었을까요?

다른 가족은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 왜 그 딸을 그냥 두었을까요?

다 듣고 나니 (읽은 책이 아니니) 여행전 엄마의 말이 참 섬뜩합니다.

지금 여행을 가지 말고 나중에 동생 수험생활이 끝나면 그때 함께 가는게 어떠냐고 딸에게 말을 하던 엄마에게 딸이 지금 여행을 가겠다고 말했을때 엄마가 그러죠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 이건 니가 선택한거야" 라고..

아직 미성년자이고 미숙한 딸에게 선택을 묻고 책임을 지워버리는 말 참 무서웠습니다.

그 말 이후 딸은 선택을 하지 않음을 선택해버린걸까요 그리고  다른 가족은 두 사람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선택을 해버린거구요

 

소설의 첫머리에 아무도 모르고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 이상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고 그 언어를 배운 사람이 없이  그 언어를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서로만 사용합니다. 오직 두 사람만이 관계를 맺고 서로가 서로의 모든 세상이며 의지처입니다. 무심하게 듣기 시작했던 그 부분이 마지막에 다시 반복되면서 이것역시 끔찍해졌습니다.

왜 그들은 세상 다른 타인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을까?

두 사람의 언어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도 하면서 동시에 조금 더 세상을 넓혀보려고 하지 않으까? 왜 한 사람이 사라진다면  남은 한사람은 영원히 고립되어버리는 삶을 선택할까?

아니면 다른 이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두 사람만의 관계 그것으로 만족해버려서일까요?

아니면 타인들의 무관심때문일까요?

내가 어쩌면 그 딸의 입장이 아니니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불편했던건 아버지의 독재보다 그렇게 길들여지고  복종하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은 하더라고 행동하지 않는 딸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런 의심도 없고 질문도 없고 다른 호기심도 없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건 꼭 그 화자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익숙하고 편안한 무언가로부터 안정감을 느낀다면 다른 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은 경험이 많지 않을까요? 나의 선택들이 어떤 면에서는 익숙하고 안전한 무언가를 기준으로 했던 것일 수도 있고 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안전한 무언가가 있다면 다르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다가가ㅗ 이해하고 이해받는 과정을 다시 되폴이 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거나...

나랑 언어가 통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을 또다른 행동이나 노력으로 사귀거나 알고 싶지 않은 그 런 마음도 있다고요..

위험하고 불길한 건 좁은 울타리에 갇히는 일이고 동시에 자기가 갇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알지만 굳이 나가고 싶지 않아하는 무기력함입니다.

 

이 단편이 불편하고 불안했던 건 알고  익숙한 것들에 안주하게 되면 언젠가 이렇게 서서히 길들여져서 어떤 의문도 없이 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편안하고 익숙하게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따져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과 언젠가 내가  익숙하게 퍼질러 있다가 수렁에 빠져 있게 되는 나를 발견할지 모른다는 강박이죠.

세상을 의심하고 아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되는  어디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 이 세상이라는 경고가 빨간 점등과 함께 깜빡이면서 내가 쑥 들어와버렸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죽고 딸은 혼자가 됩니다.

그 딸은 이제 스스로 살아가야 할테고 어떤 시도도 할겁니다.

많이 불안하고 상처받을테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주저앉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딸이 무엇보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먼저 들여다 보고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와 친해지면 좋겠습니다. 다시 성장기가 되어 자아를 찾는 과정을 경험하기를 말입니다.

 

소소하고 별 이야기 아닌 짧은 이야기가 섬찟할 수도 있다는 묘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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