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라고 알아버리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이제 더 이상 내 비밀을 고민을 누구에게 털어버리지 못하는구나 하는 벽앞에 마주한 순간이다.

땅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떼를 쓰고 얼굴이 부 ㄺ어지도록 바락바락 울어버리는 걸로 누군가에게 짐을 맡겨버리고 결과를 바꾸어내는 능력을 상실한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다.

 

드라마 "학교"에는 그렇게 더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고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청춘들과 그런 한때를 겪고 자라왔다는 걸 모두 잊어버린 어른들의 이야기이다, 아니 알고도 모른 척하는 어른과 청소년의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가 재미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여기저기 미디어에 재미있단다 하고 소개되어야 보기시작하는 미련하고 늘 한박자 늦은 움직임으로 어제 드디어 미련하게 11편을 모두 시청했다.

재미있다. 마음이 아프다. 먹먹하다. 부끄럽다. 무섭다...

이제 11살 되는 딸아이와 함께 보면서 아이의 질문에 내가 쉽게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왜 모두 학교에 함께 있으면 안되는지. 저 선생님은 도데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 나중에 엄마도 저럴건지, 등등등

그리고 나도 질문을 해봤다. 아니 질문이라기 보다 묻고 싶었다, 행여 그 작은 입에서 정답이 나올지 몰라서 ,,,

만약 너희반에 종호같은 친구가 있다면 그래서 너를 때리고 돈을 뺏고 공부시간에 방해를 한다면 너는 그 친구가 함께 있는게 좋을까 아니면 학교에 나오지 않는것이 좋을까? 강선생님같은 수업과 정선생님 같은 수업중 어떤게 더 좋으니?

아이도 장황하게 말하지만 뭐라고 꼭 꼬집어 말하지는 못한다

나쁜 친구 는 싫지만 그렇다고 교실에서 쫓겨난다는 건 어마어마한 상실감이라는 것도 알고

점수를 잘 받아서 칭찬듣고 싶어하지만 재미있고 편안 수업도 필요하고....어렵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힘들었던건  붕괴해가는 교실이 학교가 아니었다,

이제 내가 드라마에 나오는 그 누구도 이해되지 않은 사람 이 없고 공감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그건 내가 너무나 넓은 마음과 깊은 이해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속에 아직도 ㄴㅏㅁ아있는 정의감 올바름에 대한 신념과 함께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남을 밟고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아직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남순이와 흥수 그리고 종호의 관계도 마음아프고 정선생님의 약하지만 강한 신념에도 박수를 보내지만  교장의 고민과 민기엄마의 마음도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사처럼 누구나 교실에서 받아주어야 한다는 관용을 가지고 있지만 만약 내 아이가 당하는 입장이라면 내 아이에게 피해가 가는 입장이라면 그때는 이기적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는 모습이 아마도 내게도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교실 폭력도 두렵고 성적으로 아이들을 줄 세워서 낮은 점수의 아이들은 마으껏 모욕해도 된다고 하는 어른들도 무섭고  그런 어른들을 따라하는 아이들의 순진한 이기심도 무섭고 보이는 ㅅ만 보고 판단해버리는 단숨함도 무섭지만 정말 무서운건 세상시류에 따라 그렇게 변해가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내 자신이 제일 무섭다,

 

 

학생들은  보이게 작고 하찮아 보이는 문제를 끙끙 앓고 깊게 고민하는 이유가 더 이상 그 문제를 남과 함꼐 할 수 없고 남에게 떠넘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른이 보기엔 너무 쉽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인건 그걸 고스란히 혼자 지고 가야하는 첫 문제이기 대문이 아닐까,.. 피하지 않고 걱부하지 않고 고스란히 지고 가는 그 우둔하고 정직함이 학생들을 힘들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남순이나 흥수의 무게만큼이나 그 교실에서 몇안되는 대사를 하고 조금은 얄미워보이는 경민이나 계나리나 민기들의 고민도 결코 가볍지는 않다,

대학은 가야하고 성적은 나와야 하고 그렇게 몰아가는 건 세상인데 변명도 저항도 할 수 없고 그냥 가장 약하고 만만한 정선생을 상대로 화풀이하고 짜증을 내고 있을 뿐이다.

이게 아닌건 알지만  지금은 공부를 할때고 성적을 올려야하고 대학을 가야 내 인생이 낙오되지 않는다면서 끊임없는 공포감을 조장하면서 몰아가는 사회때문에  이기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에서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는 지훈이 에피였다,

내가 변하면 뭔가 할 줄 알았는데 될  줄 알았는데 변하는 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울것겉은 그 아이 표정이 마음 아프다.

예전 어떤 선배엄마가 그랬다. 아이를 믿고 기다리고 자기가 알때까지 두었더니 결국 알고 공부해야겠다는 시기가 오더라 하지만 그때는 이미 시작하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그동안 하지 않은 공부를 보충하기엔 너무 양이 많고 힘들어서 힘들게 마음을 잡은 아이가 다시 흔들리더라.. 그러니 아이를 믿고 기다리겠다고 하더라도 어릴적 부터 조금씩 기본은 시키면서 놓아주어야 한다고.. 반 농담 반 한탄겸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본이 없으면, 아니 어느정도 바탕을 하지 않으면 ㄴㅏ중에 더 힘들다 기회도 없다.

그렇게 우스개로 플려듣고 전했던 말이  드라마에서 무섭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 그저 늦은 출발 더 많은 노력을 요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든 기회의 문이 닫히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  어느 한 순간을 늫치면 사방의 모든 문이 닫히는 것일 뿐이는 무서운 현실을 보여준다.

 

아이들을 교실에 모으고 함께 하자고 한다는 이상주의 아래 역으로 차별받고 방해받는 아이들도 있고 또 그렇게 잘 따라오고 이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자니 뒤에 쳐져 있는 많은 아이들이 걸리고

그저 난 내 아이가 앞자리라면 이렇게 이기적으로 주장할 것이고 뒷자리의 아이라면 또 이렇게 정의감을 외쳐댈거라는 것만 처절 알아버렸다.

이제 남은 5화에서 어떤 이야기가 더  어떻게 전개되고 마무리 될지는 모르겠다.

여태 끌어온 것처럼 섯부른 희망이나 낙관을 주는 않을거 같다.

 

한겨레였나?

40대가 의외로 이 드라마에 많이 빠지고 공감한다고 했던가

정의를 외치며 살았는데 지금은 내 이기심에 급급하고 내 울타리를 지키는게 더 중요해지고 조금 비겁하게 살아가는게 이득이라는 것도 알았고 남 위에 서야 편ㅇ하다는 것도 체험했고 공부를 통한 계급변동도 맛본 사람들이 이제 그 경험치를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부으면서 한편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또 한눈은 감는다. 그리고 화면속에서 아직도 정의롭고 고군분투하는 정선생님을 응원하면서도  이왕이면 나 아닌 다른이가 그렇게 정의를 위해 싸워주기를 바라는 앞장서주기를 바라는 치사함으로 드라마를 보지 않을까...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변해가는 내가 제일 무서운 나의 샹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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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책읽는 모임에 참석하면서 좋은 점은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된다는 점이다.

책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나 지식이 느는 건 아니지만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때로는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고 이것저것 사정으로 연기되는 경우고 많지만 그래도 꾸준히 뭔가를 읽어간다는 건

내게 큰 수확이다.

혼자라면 읽을 엄두도 나지 않았을 책들을 함께 읽는다는 것 그게 참 좋다.

이번에 읽었던 책은 헷세의 '데미안이다,

 

이 책을 마직막으로 읽었던게 고3때였다.

대입을 코앞인데 혼자 고민하고 방황하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반항을 하면서 읽었던 책

그때 다 이해했다거나 공감을 했다는 기억은 없다.

다만 시험공부안하고 엉뚱한 책을 본다고 혼났던 기억이 있고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목이 데미안인데 왜 주인공은 데미안이 아니라 싱클레어인가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다.

역시나 그때도 기억에 남았던 건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꺠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혼자 밑줄긋고 그렇지 세계를 깨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거 같고 내 세계를 깨는 일이 이런 입시는 아닐거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대학만 가면 뭔가 새로운 세계를 갈거라는 믿음도 있었던거 같고 암튼 그랬다.

 

그리고 이제 나이 먹어 다시 읽는 데미안은 어렵고 철학적인 수사가 많은 책이 아니라 어떤 소년의 성장기로 읽혔다.

이미 방황하고 고민했떤 시기를 지났기때문일까.. 하는 서글픔도 묻어난다.

싱클레어의 누구와도 나눌수 없는 고민들, 가족에게도 말 할 수 없고 말하고 싶지 않는 심정, 사실 털어놓고 부모에게 매달리기만 해도 거의가 해결될 수 있었던 프란츠와의 관계도 그렇고 그 후에 만난 데미안이 주는 충격들 고민들 불쾌감 거부 그러나 말 할 수 없는 이끌림 등등 그건 대 문호인 헷세여서 가능한게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오고 견뎌낸 사람이람 ㄴ 일반적으로 앓아왔던 통과의례같은 몸살이 아니었나 싶다. 다만 헷세여서 이렇게 후세에 남을 기록이 되는 것이고 일반 범인들은 그냥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서 돌아볼 뿐이고...

돌아보면 별 것도 아닌일에 밤잠을 못자고 고민하고 행여 부모님이 아실까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나도 있다. 야단맞고 무시당하고 친구에게 배신 당한 기억들을 혼자 끙끙거리며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들었던 기억.. 그런데 그런 깊이를 알 수 없었던 그 당시의 고통도 언제 어떻게 없어졌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그렇게 유치하게 (지금 돌아보면)아픈 고민이 있었다는 건 기억이 나지만 어쩐 계기로 어떻게 헤쳐왔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렇게 자라면서 시간이 해결해주는 부분도 있고 어쩌면 그 고통을 이겨낸 과정자체가 고통보다 더 큰 악몽같아서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싱클레어도 그런 악몽의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프란츠라는 괴물에게 쫒기는 것, 그건 훝날 보면 별일 아니고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만 해도 풀릴 일이지만 혼자 비밀을 만들고 끙끙거리느라 더 부풀린다.  나의 수치심을 누군가가 알아차린다는 것 누군가에게 들킨다는 것이 그때는 죽음만큼 부끄럽고 치욕스럽다. 사실 그 수치심이라는 것이  속된말로 한순간의 쪽팔림으로 드러내 버리면 별거 아닌것이지만 감추고 끙끙거리는 사이 점점 부풀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압박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걸... 그 나이때는 모른다. 오로지 그 수치심만 보일 뿐이다,

 

프란츠를 몰아내준 데미안에게 싱클레어는 끌리면서도 두렵다 누군가에게 또 끌려가고 주도권을 내어준다는 것이 맘에 걸린다. 그의 말들은 내가 알던 다정하고 밝은 진리와는 반대에 있고 내가 끌리고 유혹을 느끼는 어둡고 침침한 그곳같아서 끌리면서도 두렵다.

 

허용된 밝은 세계에서는 숨기고 은폐해야 하는 하나의 원시적 충동이 내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야만 했던 시절이 왔다. 나의 호기심이 찾은 것, 꿈과 기쁨과 두려움이 내게 가져다 준것, 사춘기의 큰 비밀 그것은 내 유년의 평화에 감싸인 행복감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다른 모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닌 아이의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내 의식은 집안의 허용된 세계속에 살았으며 어렴풋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세계는 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꿈, 충동. 은밀한 소망들 속에서 살았다. 그 위에서 저 의식적 삶이 만드는 다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 속에서 유년의 세계가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에 이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건 유혹적이고 아름답다. 어둡고 옳지않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그렇게 끌리면서도 이건 아니라고 내면에서는 소리치고 그러면서도 가고 싶다고 느낀다. 부모몰래  금지된 영화를 보고 금지된 장소를 흘낏거리고 술을 마시고 담배도 물어보면서 집에 돌아와 부모의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보면 찔리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저런 착한 분들을 속인다는 것에 죄의식도 갖지만 유혹이 주는 달콤함을 거부할만큼 강한 의지도 없다. 아니  그 의지만큼 유혹에 흔들리려는 의지도 반대쪽으로 강하다.

그렇다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이 모두 비행이고 올바르지 않고 선도가 필요한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 깨닫게 된다. 그렇게 흔들리고 경험하면서 성장한다는 걸 그때는 모른다

이미 다 컸다는  우월감도 생기고 저항도 느낀다.

결국 자기자신을 컨트롤하고 다스리는 건 자신일 뿐이다.

부모님도 또 다른 누군가도 그저 조언자일뿐이고 타인일 뿐이다.

 

내 자신의 신화 두 세계 혹은 세계의 두 절반 -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관한 생각이었던것이다, 나의 문제가 모든 인간의 문제 모든 삶과 생각의 문제라는 통찰이 갑자기 신성한 그림자처럼 나를 뒤덮었다. 그리고 가장 나다운 개인적인 삶과 생각이 얼마나 깊이거대한 사유의 영원한 흐름에 관여되어 있는가를 보고 갑자기 느끼게 되자 두려움과 경외심이 나를 압도했다. 그 통찰은 즐겁지 않았다. 확인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는데도 왠지 즐겁질 않았다. 그 통찰은 가혹했다. 맛이 떫었다. 그 안에는 일말의 책임의식이 이제는 어린애일 수 없다는 홀로 서 있다는울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방황으로 세계관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 혹은 커지거나 왜곡될 수도 있는 것 그건 이제 내 책임이다. 내가 내 고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나눌 수 없어지면서 어떤 행동이나 사고도 오롯히 내몴으로 남는다. 그건 성장이기도 했고 거기에 따른 책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싸인하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다. 마트에서 식당에서 혹은 은행에서 펜을 들고 멋지게 싸인하는 모습이 부럽다. 나도 멋진 싸인을 가지고 싶고 여기저기 남기고 싶다.

그러나 그 싸인이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내가 지겠다'라는 의미라는 건 알지 못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내 싸인을 가진다는 것은 내가 나를 책임져야하고 누군가에게 미룰 수도 없고 전가할 수 없다는 고독감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어른들이 하는 말.."누군가 간섭하고 잔소리할때가 좋을때"라는 말을 그 나이때는 모른다.

다만 조금씩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 이건 내 책임일거라는 막연한 긴장감이 생기는 시기이기도 하다.

더이상 어린아이도 아니라는 조금 쓸쓸하고 무서운 느낌을 지나면서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다.

그때 부모가 할일은.. 어쩌면 싱클레어의 부모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해주고 기다려주고 다시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는 것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는 동안 부모도 점점 그 책임이 줄어들겠지만 오히려 그 책임감이 없어지는 과정이 두렵고 걱정스러워 계속 손을 놓지 못하고 팔이 늘어지고 꺽여도 어쩔 줄 모르고 꼭 쥐고 있는 경우도 생긴다.

 

성장하면서 나는 내가 참 싫었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성격이 마음에 들지않고 심지어무탈하고 여유로운 환경도 맘에 들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어찌어찌했더라면 내부모가 조금 어찌어쩌한 사람이라면... 배부른 줄 모르고 고민하고 투정하면서 이 모든걸 변화하는 것도 내 하기 나름이라는 조금 어처구니없어보이는 책임감도 느끼고 그랬던거 같다.

그리고 지금 성장기의 내 아이도 맘에 드는게 하나도 없어보인다.

생긴것도 키가 남들보다 큰 것도 손재주가 없는 것도 다리가 긁은 것도 아마 말은 하지 않아도 제 부모에 대한 불만도 많으리라 짐작된다.

싱클레어도 역시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난 반년동안 나는 매우 빨리 자랐다. 그리하여 키가 훌쩍 컸고 마르고 미완성인 채 세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소년의 사랑스러움은 내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이 나를 별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느꼈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어쩌면 성장이라는 것이 그러한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부정하고 미워하면서 나를 객관화시킬 수도 있고 세상과 떨어뜨려놓아서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시큰둥하게 혹은 시니컬하고 삐딱하게 바라보는 과정도 지나야 하는 것이다.

내가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어쩌면 못나고 자신없어하는 행동임에도 남들 눈에는 더없이 건방지고 무례한 행동들이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만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싱클레어도 수업을 빠지고 술에 빠지고 잘난척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상이 맘에 들지 않아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조언자를 만난다.그리고 누군가에게 조언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늘 나에게 열중해 있었다. 늘 나 자신에게 그리고 마침내 한 번인생의 한토막을 살아보기를. 나에게 나온 무엇인가를 세계안에다 주기를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했다.

 

그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잔신에게로 가는 길 위의 또 한걸음이었다. 나는 당시에 열여덟살의 평범치 않은 젊은이였다. 수백가지 일에서 조숙하고 다른 수백가지 일에서 몹시 뒤쳐지고 무력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주 우쭐하고 교만했으나 또 꼭 그만큼 자주 의기소침하고 굴욕스러워했다. 어떤 때는 자신을 천재로 생각하는 가 하면 어떤 때는 절반쯤 돌았다고 생각했다.또래들의 기쁨과 생활을 같이 하는 것이 잘 되질 않았고 자주 비난과 근심으로 자신을 소모했다. 마치 내가 절망으로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기라도 하듯이 마치 내게 삶이 닫혀져 있기다도 하듯이..

 

그 사이 나를 내면적으로 키워준 것은 학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분 좋았던 것은 나 자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감이었다. 나 자신의 꿈 생각 예감에 대한 커가는 신뢰였다. 그리고 내가 나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힘에 대한 늘어나는 앎이었다.

 

누구나 관삼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내가 아벨이라고 믿었는데 어쩌면 표적을 가진 카인인지모른다는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스스로 누려왔던 따뜻하고 밝은 집과 부모님을 거부하고 싶은 충동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참 아프고 힘든일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가치가 높을 수 없다는 게  세상살이의 법칙이듯이 성장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루어 질 수 없고 누가 대신 할 수 없다. 다만 때가 달라서 누군가는 이르게 시작하고 누군가는 늦게 시작할 뿐이고 누군가는 둔감해서 혹은 안정적이어서 쉽게 겪기도 하고 누군가는 깊은 흉터를 남길만큼 길고 고약하게 겪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밑줄을 그을 만한 말들이 많았고 성찰하게 하는 구절도 많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가장 끌어당기는 것은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 에바부인의 말들이 아니라 그 말들을 받아들이고 내것으로 만들어나거나 무시하는 싱클레어의 고민이 더 와닿는다.

여러가지 말들에 흔들리고 스스로를 고민에 빠뜨리면서도 점차 성장하고 있는 소년이 더 눈에 보인다. 이 성장이 어쩌면 한때의 방황일 뿐이고 치기였다고  판결이 나더라도 그것이 허무하고 의미없다고 할 수는 없을것이다. 한때의 방황이 모든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나자신에게 대해 이렇게 골몰히 집중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그런 걱정은 접어도 되지 않을까

 

나이를 먹어서 읽은 책이어서 일까 이 책의 싱클레어도 호밀밭을 지키고 싶어하는 홀든도 모두 내 자식처럼 느껴진다. 한때는 나와 동일시 했던 인물들이 이제는 자식같다는게 좀 서글프기도 하지만 오롯이 혼자 흔들리고 격어내는 그들의 성장통만은 대견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이제 그 성장통앞에 서 있는 내 아이도 이렇게 대견하게 고민하고 흔들리기를 욕심내 본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 읽었던 느낌 그리고 세상을 조금 살아내고 읽었었을때의 느낌을 비교해보는 것도 꽤 괜찮았다.

내 아이가 처음 이 책을 그리고 호밀밭을 잡았을때  어떤 구절에 밑줄을 그을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책을 폈을때도 그 구절에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새로운 밑줄이 생기고 지워질테지만 그 아이의 홀로가는 성장에 좋은 위안이 되어주면 좋겠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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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문화는 없는 줄 알았다.

운동장 하늘에는 만국기가 휘날리고 운동장을 빙 둘러서 천막이 쳐지고  아이들은 와아. 함성을 울리며 달리고 뛰고 그리고 부모들은 옹기종기모여 함꼐 도시락을 먹고... 뭐 그런 운동회

나의 초등 6년은 그런 운동회의 연속이었는데 막상 내가 학부형이 되면서는 첫 경험이었다.

아이가 벌써 6학년인데 첨이다.

 

뭐 큰아이 2학년때 그런 운동회를 할뻔 했다.

주위 아파트에서 민원이 들어올 만큼 음악을 울리며 연습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는 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런데 그 운동회를 하루 이틀 앞드고 가족여행이 잡혀 있어 아이는 운동회에 참여하지 못했다.

만일 그때 아이가 그 운동회에 꼭 참여해야 한다고 우겼다면 아마 여행을 미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너무나 쿨하게 운동회를 포기하고 여행을 가겠다고 했고

남녀학생 머릿수맞춰 짝을 지워놓은 선생님의 원망을 뒤로하며 운동회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교장이 바뀌어서인지

학부모가 참가하지 않는 아이들만의 운동회가 치러졌다.

그냥 하루 수업하지 않고 운동장에서 게임하고 달리기하는 것

그리고 급식먹고 간식먹고 돌아오는 것

그래서 나는 그 시절 내가 경험한 운동회를 학부모의 입장에서 한번도 해보지 못하고 끝날 줄 알았다. 그게 뭐 섭섭한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좋았다.

힘들게 도시락을 쌀 필요도 없고 뭔가 먹거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응원하고 사람들과 부대끼고 하는 거 없이 쿨하게 아침에 시원한 물이랑 간신 몇가지만 챙기고 나면 끝.

그리고 아이가 돌아오면 여느 때와 같은 일상

뭐 그렇게 흘러갔다.

아이도 경험을 못하였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고 부족함을 몰랐다.

 

그리고 전학..

6학년이 되어 첨응로 그런 고전적인 운동회를 경험한다.

물론 집에서 김밥을 싸고 닭을  튀기고 과일을 깍는 일은 없지만 반끼리  모여 함께 밥을 먹고 아이들을 응원하고....

아는 사람이 많고  엄마 참여가 있는 작은 아이반에서 주로 있었다

6학년 큰 빈이네는 아는 엄마도 없었고 잠깐 들렀을 때도 인원이 10명남짓이라 어색하기도 했다.

그렇게 작은 빈이네 엄마들이랑 밥 먹고 연습하고 참가하고 웃고 떠들다가 6학년이  공연이 되었다.

이제 다 크면 엄마들이 와서 사진을 ㅁ찍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동생만 챙기면 서운할거 같아서 신경써서 구경했따.

사회를 맡은 이가 말한다.

"이제   초등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6학년들 입니다. 열심히 응원해주세요.."

아... 그렇구나

이게 초등 마지막 운동회구나.

그리고 이런 고전적인 운동회의 처음이겠구나.

첫경험이 마지막이 되는 우리 큰 빈이

연습한대로 깃발춤이 멋있었고 무사히 끝났다.

1학년 꼬맹이들에 비해 키도 크고 몸동작도 크고 간혹 여기저기 시큰동하게 여기는 아이들 행동도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초등생들...

이런 것들이 이제 내년이면 중학생이다.

겨우 한 살 차이고 한학년차이지만  초등과 중등이 주는 말의 무게는 하늘과 땅차이다.

저 아이도 이제 어른이 되려고 하나보다

엄마 품을 떠나려고 하나보다..

코가 찡하고 맘이 뭉클하다.

어릴적 부터 유난히 키가 커서 늘  어리다는 생각을 못했다.

남들보다 목하나 더 큰 키때문에 늘 큰 애 취급 받았고 또 어울리게 의젓하고 혼자 알아서 잘 하는 녀석이라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키가 컸을 뿐이지 생각이 컸거나 더 성숙한건 아니었다.

그런데 초년병 엄마는 그것까지 몰랐다.

큰 키 만큼 큰 아이라고만 생각하고 엄마의 기준은 자꾸자꾸 높아가기만 했다.

받아쓰기나 수학문제 틀리는게 이상하다고만 여겼고

한번 이야기하면 이해하지 못하는게 화가 났고 짜증이 났었다.

남들보다 못하는게 도무지 마뜩치 않았고 키가 큰 만큼 다른 부분도 앞서야 하는 거 아닌가

잘하는 건 당연하고 못하는 건 콕콕 눈에 밟혔다.

그런 단점이 더 크게 보여서 맘에 들지 않았고 화가 났다.

아이에게 화가 나는게 아니라 내가 만든 내 기준에 나 혼자 안달복달하고 흥분했었다.

그런데 둘째를 학교에 보내면서..

아 3년전 그 아이도 이렇게 아기였구나 이렇게 서툴렀구나 ... 하고 처음 알았다.

그렇게 알았으면서도 이 엄마는 여전히 변한 건 없었다.

그땐 아기였어도 지금은 3년이 지났는데 좀 더 의젓하고 할일을 알아서 잘 해야하는 거 아닌가

공부도 좀 더 하고 .

작은 아이는 숙제만 해도 대견했고 시험지에 동그라미가 몇개 보이기만 해도 맘이 뿌듯했는데

큰아이는  빈둥거리는 꼴을 못보겠고 뭐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내 마음이 불안했다.

그렇게 내마음을 볶아치고 아이에게도 다그치고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유년을 빼앗았던 아이가

이제 정말 그 유년기를 졸업하려고 한다.

 

아이랑 씨름하고 볶으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는데

막상 아이는 혼자 크고 있었다.

혼자 저만큼 자랐고 혼자 세상을 배우고 상처받고 치유하고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고 있었나보다

늘 큰아이로만 여기면서 한해한해 자라는 걸 놓치고 있는 내가 바보였는지...

큰아이답게 늘 기대하면서도 애틋함은 컸지만 그걸 표현할 줄 몰랐으니 그건 나도 엄마노릇 겨우 13살이라 그랬다고 변명해본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도 함꼐 나이를 먹는다.

아이가 한살이면 엄마도 한살이고 아이가 초등하교 1학년이면 엄마도 초등학교 1학년이 된다.

아이가 철이 없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엄마도 함께 죄충우돌하고 후회하지만 늘 혼나는 건 아이몫이다.

왜 그렇게 야무지지 못하는지 왜그렇게 실수만 하는지.. 함꼐 한다는 걸 모르고, 내 눈엔 내 허물은 보이지 않는다. 항상  두눈이 나에게 향하지 않고 아이에게만 뻗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둘째를 키우면 또 나아지느냐.... 그것도 아니다.

또 다시 반복이다. 이젠 한 술 더 떠서 좀 안다고 ,., 선무당이 되어서 아이를 잡는다.

 

전교생이 함께 서 있는데도 내 아이는 눈에 띈다.

키가 커서 그런것 만은 아닌거 같다.

그저 내 아이라 그렇다.

어디에 묻혀 있어도 내 아이가 틀리는 건 귀신같이 잡아내고 어딘가 이상하고 아파 보이는 것도 귀신같이 잡아낸다. 엄마노롯하면 는건 그것뿐이다.

 

이제 초등을 마치고 중학생이되면 무서운 사춘기가 기다린다.

이미 스타트는 끊었다.

어떻게 달려나갈지 어디로 달려나갈지 알 수 없다.

또 엄마도 함께 사춘기를 앓으며 치열하게 싸울것이다.

우짜든둥 아이를 이겨먹으려고 철없는 없마는 엉뚱한 최선을 다할 것이고

돌아서면 후회하고 머쓱해하는 걸 반복하게 될것이다.

아이는 그러면서 자랄것이라고 믿는다.

여태 혼자 잘 자란것 처럼 쑤욱 자라서 나를 놀라게 할테지...

 

아이의 처음아지 마지막 운동회...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그러나...

 

집에 와서  피곤해하는 아이에게 놀지 말고 쉬지말고 학원가라고 등떠미는 엄마도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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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1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 눈물이 왈칵하네요.

푸른희망 2012-10-17 18:45   좋아요 0 | URL
^^ 쑥스럽네요..
 

 

#1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깊은 우물을 속에 가지고 있어서 그 깊이가 얼마인지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쩌면 그 깊은 우물같은 속이 스스로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다.

   혼자 음악듣고 책읽고 뭔가를 먹고 혼자 걷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만 속으로 누구보다 외로움이 깊고 누군가 함께할 단짝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조금만 깊이 사귀게 되면 유머도 있고 재미있는 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다는 걸 알게된다

 특별한 재주가 있는 건 아니지만 운동신경도 조금 있고 음악이나 미술에 대한 관심도 있다 직접 하는 건 재주가 없다고 믿지만 심미안이나 감상능력은 누구못지 않다.

 가장 싫은 건 혼자 있고 싶어하는 자신을 누군가 자꾸 이유없이 건드리는 것

 그리고 어이없고 뜬금없는 말을 하는 엉뚱함을 이해할 수 없고 귀찮기만 하다.

  겉보기와는 달리 스스로 소심하고 세삼한 a형이라고 생각한다

  상처입기 쉽고 여린 속을 가졌지만 강해보이는 인상으로 누구나 착각하기 쉽다

 

#2 귀엽고 샹냥하지만 변덕이 심하다. 금방 뭐라도 줄듯이 상냥하고 기분이 좋다가도 무엇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아무도 모를만븜 우울하고 화낼만큼 변덕이 심하다.

누구에게나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고 그렇게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남도 좋아하리라고 믿고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면 속이 상하다.

혼자 있기보다는 누군가 함께 하는 게 더 좋지만 혼자서도 잘 논다.

타고난 미모와 귀염성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면이 있지만 조금 허당이 구석도 많다.

혼자 심심한건 못견딘다.

누군가 자기를 무시한다던가 빼놓는다는 것도 못견딘다.

농담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지만 유머코드가 굉장히 고지식하다

 

이 두 아이가 내 딸이다.

만약 내가 이 둘중 한명만 자식으로 두었더라면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아주 좁았을것이다.

어쩌면 어미란 것은 자기 자식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내 자식이 하는 말 행동 태도가 모든 세상의 기준이 되어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정 반대인 동성아이 둘을 키우다보니.. 세상은 정말 넓고 다양하다는 걸 매일매일 꺠우치면서 살고 있다.

사춘기에 들어서 예민해진 두 여자의 부딪침앞에서 나 스스로가 포청천이 되지 못함이 늘 한탄스럽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이말이 옳고 저 이야기를 들으면 저 말이 옳으니 내가 누구의 편을 들 수 있으며 내가 어떤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매읾 매일 내 말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고

매일 매일 내가 쟤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면서

엄마는 언제나 저쪽만 편든다고 그렇게 흔들어 대는데

나는 내가 내뱉는 말이 내가 하는 행동이 너무 두렵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렇게 전혀 다른 두 아이가 내가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주면서 시야를 넓혀준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이 두 아이를 이해하면 세상에 이해못할 일이 없을 것이니까...

오늘도 나는 세상을 한뼘 더 넓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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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빈이는 기다리고기다리던 선물 같은 존재고 

작은 빈이는 어느날 느닷없이 받은 서프라이즈선물같은 존재란다.. 

매일 투닥이며 엄마의 애정도를 체크하던 아이에게 어느날 맘 잡고 던진 말 

둘다 눈이 똥그래져서 어떤 선물이 더 좋은 건지 생각하고 고민하던데... 

기다리던 선물은 정말 바라는 거라 좋고.. 서프라이즈 선물은 예상못한 즐거움이라 좋고... 

둘다 좋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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