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책읽는 모임에 참석하면서 좋은 점은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된다는 점이다.

책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나 지식이 느는 건 아니지만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때로는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고 이것저것 사정으로 연기되는 경우고 많지만 그래도 꾸준히 뭔가를 읽어간다는 건

내게 큰 수확이다.

혼자라면 읽을 엄두도 나지 않았을 책들을 함께 읽는다는 것 그게 참 좋다.

이번에 읽었던 책은 헷세의 '데미안이다,

 

이 책을 마직막으로 읽었던게 고3때였다.

대입을 코앞인데 혼자 고민하고 방황하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반항을 하면서 읽었던 책

그때 다 이해했다거나 공감을 했다는 기억은 없다.

다만 시험공부안하고 엉뚱한 책을 본다고 혼났던 기억이 있고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목이 데미안인데 왜 주인공은 데미안이 아니라 싱클레어인가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다.

역시나 그때도 기억에 남았던 건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꺠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혼자 밑줄긋고 그렇지 세계를 깨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거 같고 내 세계를 깨는 일이 이런 입시는 아닐거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대학만 가면 뭔가 새로운 세계를 갈거라는 믿음도 있었던거 같고 암튼 그랬다.

 

그리고 이제 나이 먹어 다시 읽는 데미안은 어렵고 철학적인 수사가 많은 책이 아니라 어떤 소년의 성장기로 읽혔다.

이미 방황하고 고민했떤 시기를 지났기때문일까.. 하는 서글픔도 묻어난다.

싱클레어의 누구와도 나눌수 없는 고민들, 가족에게도 말 할 수 없고 말하고 싶지 않는 심정, 사실 털어놓고 부모에게 매달리기만 해도 거의가 해결될 수 있었던 프란츠와의 관계도 그렇고 그 후에 만난 데미안이 주는 충격들 고민들 불쾌감 거부 그러나 말 할 수 없는 이끌림 등등 그건 대 문호인 헷세여서 가능한게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오고 견뎌낸 사람이람 ㄴ 일반적으로 앓아왔던 통과의례같은 몸살이 아니었나 싶다. 다만 헷세여서 이렇게 후세에 남을 기록이 되는 것이고 일반 범인들은 그냥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서 돌아볼 뿐이고...

돌아보면 별 것도 아닌일에 밤잠을 못자고 고민하고 행여 부모님이 아실까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나도 있다. 야단맞고 무시당하고 친구에게 배신 당한 기억들을 혼자 끙끙거리며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들었던 기억.. 그런데 그런 깊이를 알 수 없었던 그 당시의 고통도 언제 어떻게 없어졌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그렇게 유치하게 (지금 돌아보면)아픈 고민이 있었다는 건 기억이 나지만 어쩐 계기로 어떻게 헤쳐왔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렇게 자라면서 시간이 해결해주는 부분도 있고 어쩌면 그 고통을 이겨낸 과정자체가 고통보다 더 큰 악몽같아서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싱클레어도 그런 악몽의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프란츠라는 괴물에게 쫒기는 것, 그건 훝날 보면 별일 아니고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만 해도 풀릴 일이지만 혼자 비밀을 만들고 끙끙거리느라 더 부풀린다.  나의 수치심을 누군가가 알아차린다는 것 누군가에게 들킨다는 것이 그때는 죽음만큼 부끄럽고 치욕스럽다. 사실 그 수치심이라는 것이  속된말로 한순간의 쪽팔림으로 드러내 버리면 별거 아닌것이지만 감추고 끙끙거리는 사이 점점 부풀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압박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걸... 그 나이때는 모른다. 오로지 그 수치심만 보일 뿐이다,

 

프란츠를 몰아내준 데미안에게 싱클레어는 끌리면서도 두렵다 누군가에게 또 끌려가고 주도권을 내어준다는 것이 맘에 걸린다. 그의 말들은 내가 알던 다정하고 밝은 진리와는 반대에 있고 내가 끌리고 유혹을 느끼는 어둡고 침침한 그곳같아서 끌리면서도 두렵다.

 

허용된 밝은 세계에서는 숨기고 은폐해야 하는 하나의 원시적 충동이 내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야만 했던 시절이 왔다. 나의 호기심이 찾은 것, 꿈과 기쁨과 두려움이 내게 가져다 준것, 사춘기의 큰 비밀 그것은 내 유년의 평화에 감싸인 행복감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다른 모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닌 아이의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내 의식은 집안의 허용된 세계속에 살았으며 어렴풋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세계는 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꿈, 충동. 은밀한 소망들 속에서 살았다. 그 위에서 저 의식적 삶이 만드는 다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 속에서 유년의 세계가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에 이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건 유혹적이고 아름답다. 어둡고 옳지않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그렇게 끌리면서도 이건 아니라고 내면에서는 소리치고 그러면서도 가고 싶다고 느낀다. 부모몰래  금지된 영화를 보고 금지된 장소를 흘낏거리고 술을 마시고 담배도 물어보면서 집에 돌아와 부모의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보면 찔리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저런 착한 분들을 속인다는 것에 죄의식도 갖지만 유혹이 주는 달콤함을 거부할만큼 강한 의지도 없다. 아니  그 의지만큼 유혹에 흔들리려는 의지도 반대쪽으로 강하다.

그렇다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이 모두 비행이고 올바르지 않고 선도가 필요한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 깨닫게 된다. 그렇게 흔들리고 경험하면서 성장한다는 걸 그때는 모른다

이미 다 컸다는  우월감도 생기고 저항도 느낀다.

결국 자기자신을 컨트롤하고 다스리는 건 자신일 뿐이다.

부모님도 또 다른 누군가도 그저 조언자일뿐이고 타인일 뿐이다.

 

내 자신의 신화 두 세계 혹은 세계의 두 절반 -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관한 생각이었던것이다, 나의 문제가 모든 인간의 문제 모든 삶과 생각의 문제라는 통찰이 갑자기 신성한 그림자처럼 나를 뒤덮었다. 그리고 가장 나다운 개인적인 삶과 생각이 얼마나 깊이거대한 사유의 영원한 흐름에 관여되어 있는가를 보고 갑자기 느끼게 되자 두려움과 경외심이 나를 압도했다. 그 통찰은 즐겁지 않았다. 확인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는데도 왠지 즐겁질 않았다. 그 통찰은 가혹했다. 맛이 떫었다. 그 안에는 일말의 책임의식이 이제는 어린애일 수 없다는 홀로 서 있다는울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방황으로 세계관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 혹은 커지거나 왜곡될 수도 있는 것 그건 이제 내 책임이다. 내가 내 고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나눌 수 없어지면서 어떤 행동이나 사고도 오롯히 내몴으로 남는다. 그건 성장이기도 했고 거기에 따른 책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싸인하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다. 마트에서 식당에서 혹은 은행에서 펜을 들고 멋지게 싸인하는 모습이 부럽다. 나도 멋진 싸인을 가지고 싶고 여기저기 남기고 싶다.

그러나 그 싸인이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내가 지겠다'라는 의미라는 건 알지 못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내 싸인을 가진다는 것은 내가 나를 책임져야하고 누군가에게 미룰 수도 없고 전가할 수 없다는 고독감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어른들이 하는 말.."누군가 간섭하고 잔소리할때가 좋을때"라는 말을 그 나이때는 모른다.

다만 조금씩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 이건 내 책임일거라는 막연한 긴장감이 생기는 시기이기도 하다.

더이상 어린아이도 아니라는 조금 쓸쓸하고 무서운 느낌을 지나면서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다.

그때 부모가 할일은.. 어쩌면 싱클레어의 부모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해주고 기다려주고 다시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는 것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는 동안 부모도 점점 그 책임이 줄어들겠지만 오히려 그 책임감이 없어지는 과정이 두렵고 걱정스러워 계속 손을 놓지 못하고 팔이 늘어지고 꺽여도 어쩔 줄 모르고 꼭 쥐고 있는 경우도 생긴다.

 

성장하면서 나는 내가 참 싫었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성격이 마음에 들지않고 심지어무탈하고 여유로운 환경도 맘에 들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어찌어찌했더라면 내부모가 조금 어찌어쩌한 사람이라면... 배부른 줄 모르고 고민하고 투정하면서 이 모든걸 변화하는 것도 내 하기 나름이라는 조금 어처구니없어보이는 책임감도 느끼고 그랬던거 같다.

그리고 지금 성장기의 내 아이도 맘에 드는게 하나도 없어보인다.

생긴것도 키가 남들보다 큰 것도 손재주가 없는 것도 다리가 긁은 것도 아마 말은 하지 않아도 제 부모에 대한 불만도 많으리라 짐작된다.

싱클레어도 역시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난 반년동안 나는 매우 빨리 자랐다. 그리하여 키가 훌쩍 컸고 마르고 미완성인 채 세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소년의 사랑스러움은 내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이 나를 별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느꼈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어쩌면 성장이라는 것이 그러한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부정하고 미워하면서 나를 객관화시킬 수도 있고 세상과 떨어뜨려놓아서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시큰둥하게 혹은 시니컬하고 삐딱하게 바라보는 과정도 지나야 하는 것이다.

내가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어쩌면 못나고 자신없어하는 행동임에도 남들 눈에는 더없이 건방지고 무례한 행동들이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만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싱클레어도 수업을 빠지고 술에 빠지고 잘난척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상이 맘에 들지 않아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조언자를 만난다.그리고 누군가에게 조언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늘 나에게 열중해 있었다. 늘 나 자신에게 그리고 마침내 한 번인생의 한토막을 살아보기를. 나에게 나온 무엇인가를 세계안에다 주기를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했다.

 

그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잔신에게로 가는 길 위의 또 한걸음이었다. 나는 당시에 열여덟살의 평범치 않은 젊은이였다. 수백가지 일에서 조숙하고 다른 수백가지 일에서 몹시 뒤쳐지고 무력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주 우쭐하고 교만했으나 또 꼭 그만큼 자주 의기소침하고 굴욕스러워했다. 어떤 때는 자신을 천재로 생각하는 가 하면 어떤 때는 절반쯤 돌았다고 생각했다.또래들의 기쁨과 생활을 같이 하는 것이 잘 되질 않았고 자주 비난과 근심으로 자신을 소모했다. 마치 내가 절망으로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기라도 하듯이 마치 내게 삶이 닫혀져 있기다도 하듯이..

 

그 사이 나를 내면적으로 키워준 것은 학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분 좋았던 것은 나 자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감이었다. 나 자신의 꿈 생각 예감에 대한 커가는 신뢰였다. 그리고 내가 나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힘에 대한 늘어나는 앎이었다.

 

누구나 관삼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내가 아벨이라고 믿었는데 어쩌면 표적을 가진 카인인지모른다는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스스로 누려왔던 따뜻하고 밝은 집과 부모님을 거부하고 싶은 충동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참 아프고 힘든일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가치가 높을 수 없다는 게  세상살이의 법칙이듯이 성장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루어 질 수 없고 누가 대신 할 수 없다. 다만 때가 달라서 누군가는 이르게 시작하고 누군가는 늦게 시작할 뿐이고 누군가는 둔감해서 혹은 안정적이어서 쉽게 겪기도 하고 누군가는 깊은 흉터를 남길만큼 길고 고약하게 겪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밑줄을 그을 만한 말들이 많았고 성찰하게 하는 구절도 많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가장 끌어당기는 것은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 에바부인의 말들이 아니라 그 말들을 받아들이고 내것으로 만들어나거나 무시하는 싱클레어의 고민이 더 와닿는다.

여러가지 말들에 흔들리고 스스로를 고민에 빠뜨리면서도 점차 성장하고 있는 소년이 더 눈에 보인다. 이 성장이 어쩌면 한때의 방황일 뿐이고 치기였다고  판결이 나더라도 그것이 허무하고 의미없다고 할 수는 없을것이다. 한때의 방황이 모든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나자신에게 대해 이렇게 골몰히 집중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그런 걱정은 접어도 되지 않을까

 

나이를 먹어서 읽은 책이어서 일까 이 책의 싱클레어도 호밀밭을 지키고 싶어하는 홀든도 모두 내 자식처럼 느껴진다. 한때는 나와 동일시 했던 인물들이 이제는 자식같다는게 좀 서글프기도 하지만 오롯이 혼자 흔들리고 격어내는 그들의 성장통만은 대견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이제 그 성장통앞에 서 있는 내 아이도 이렇게 대견하게 고민하고 흔들리기를 욕심내 본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 읽었던 느낌 그리고 세상을 조금 살아내고 읽었었을때의 느낌을 비교해보는 것도 꽤 괜찮았다.

내 아이가 처음 이 책을 그리고 호밀밭을 잡았을때  어떤 구절에 밑줄을 그을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책을 폈을때도 그 구절에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새로운 밑줄이 생기고 지워질테지만 그 아이의 홀로가는 성장에 좋은 위안이 되어주면 좋겠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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