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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ㅣ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예술에 관한 한 자명한 것은 없다는 것이 자명하게 되었다’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첫머리이다. 서문도 없는 이책의 처음은 미학의 대상이 모호하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Today it goes without saying that nothing concerning art goes without saying, much less without thinking. Everything about art has become problematic: its inner life, its relation to society, even it sright to exist.”
그게 뭐가 문제인가? 딱 보면 아는 그런 예술이란 나이브할 뿐이다. 그런 예술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얻지 않았는가? 얼핏 옳게 들린다. 20세기의 예술은 그 어느 시대에도 가능하지 않았던 다양성을 자랑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험해왔다. 실험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아도르노는 이렇게 반박한다. “What looked at first like an expansion of art turned out to be its contraction. The great expanse of the unforeseen which revolutionary artistic movements began to explore around 1910 did not live up to the promise of happiness and adventure it had held out. What has happened instead is that the process begun at that time came to corrode the very same categories which were its own reason for being.”
다양성은 예술의 자율성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다양성은 자유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사회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이 문제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예술은 청중 또는 관객을 전제로 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청중(또는 관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타자를 전제로 하는 예술은 대중예술이라 불린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차이는 타자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유를 얻은 예술을 난해해진 동시에 무가치해졌다. 자유로워지면서 즉 사회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면서 예술은 이해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도대체 왜 있어야 하는지, 타자에게 자신의 존재할 이유를 주장할 근거도 없어졌다.
난해함이란 자유의 선언이다. 나는 너에게 이해를 구할 이유가 없다는 선언이다. 난해함은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20세기 예술은 대중을 잃었기에 예술되었지만 예술이 되면서 그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예술이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맑스주의도 대중을 잃어버리면서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맑스주의 이론은 대중의 혁명운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라야 비로소 그에 적합한 지평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대중 혁명운동이 존재하지 않거나 좌절당하면 맑스주의 이론 역시 어쩔 수 없이 기형적이 되거나 퇴화한다.” NLR 편집장이었던 페리 앤더슨의 말이다.
앤더슨의 ‘서구 맑스주의 연구’란 책은 왜 이렇게 서구 맑스주의는 난해하게 되었는가란 질문에서 시작한다. 색깔이야 어쨌든 맑스는 사회과학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그 아버지들 중 맑스는 특별하다. 그의 색깔이 아니라 문체에서. ‘그렇다고? 어디 그말이 맞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러 이러 하게 되는데 결론은 이렇게 되지 않는가?’ 맑스의 논쟁 스타일은 상대의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 주장에 따라 논의를 확장한다. 그리고 그 논리의 확장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를 보여조는 식이다. 그 결론은 논쟁의 상대방도 웃게 만든다. 맑스의 문장은 읽는 재미가 있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알기쉬움은 서구 맑스주의에선 사라졌다. 앤더슨은 그 이유를 독자의 상실에서 찾는다.
“경제이론이나 정치이론에서 서구 맑스주의가 쌓은 지적 업적은 사실상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경제와 정치 어느 분야이든 중요한 저작이 출판되지 않았다.” 서구 맑스주의의 무게 중심은 “철학으로 근본적인 이동”했다. 루카치로부터 알뛰세까지, 코르쉬에서 콜레티에 이르는 전체 맑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그 전통 내에 전문적인 철학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점이다.”
실천이 살아있던 1차대전이전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닫ㅇ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대학에서 사회주의를 떠드는 ‘교수 사회주의자’ 즉 ‘강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경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은 이론과 실천을 정치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학에 자리잡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대전 이후 맑스주의이론은 전적으로 대학에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당에서 대학으로의 후퇴, 왜 후퇴했는가? 그 이유를 앤더슨은 레닌의 말을 빌려 정리한다. “올바른 혁명이론은 진정한 대중 그리고 진정한 혁명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때라야 비로소 최종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맑스주의 이론의 진보는 그 시대가 처한 물질적 생산조건-그 시대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실천-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앤더슨은 말한다.
서구 맑스주의의 난해함 다시 말하자면 그 불모성은 혁명운동의 소멸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혁명운동이 소멸되었는가? 이책의 저자는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 때문이엇다고 말한다.
자본론 1권이 나오고 독일 사민당이 창당될 무렵만 해도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의 종말은 기정사실로 보엿다. 당시는 대공황의 시기였고 그것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장기불황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It’s hard time’이란 말을 인사말처럼 썼다.
시대가 그랬기에 “1890년대 초 맑스주의자들은 대략 10년 안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가능성이 높아고 생각했다. 이렇게 10년 정도의 비교적 잛은 기간이라면 맑스주의 정당의 임무는 예견된 그날을 준비하며 노동자들을 조직화해 대비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오지 않았다. 1890년대 자본주의는 기사회생했다. 대공황의 원인은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가 그랬듯이 이윤율저하경향이 문제엿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신을 재창조해냈고 부활에 성공햇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맑스주의자들의 대응은 초기기독교도들과 비슷했다.
초기기독교도들은 정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날은 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그날을 미래로 미뤘다. 맑스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말로 올지 안 올지도 알 수 없는 그날을 막연히 준비하면서 하고한 날 맑스 책 세미나나 하는 집단이 종교집단이지 정당인가? 그럴 수는 없다.”
첫번째 반응은 맑스주의 역사에서 악명 높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엿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입으로는 ‘임박한 혁명의 그날’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에선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상에서의 소박한 정치활동을 할 뿐이엇다. 막상 투쟁목표로 내건 것을 보면 기껏해야 일반적 참정권의 보장, 8시간 노동제, 언론, 출판의 자유, 지방자치권 등 김빠지는 것들이다. 이런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요구들이 도대체 거창한 사회주의 세계관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해명이 없다. 베른슈타인은 당의 이론과 실천의 어처구니없는 괴리를 지적하면서 이제 공염불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혁명주의’의 수사학을 걷어치우고 의회에서 다수석 점유를 통한 현실적인 권력 장악과 현실개혁에 집중하자고 호소한다. 그의 논점은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한 맑스주의의 예언이 현실을 빗나갔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 경제학은 더 이상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당시 유럽 사회주의정당의 현실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사회주의정당에서 ‘혁명’은 수사에 불과햇다. 저자는 볼세비즘, 사회민주주의 역시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에 대한 대응이었고 베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수정주의였다고 말한다.
맔스주의의 지적파산에 대해 지적으로(맔스주의식으로 말하면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레닌이엇다. 그의 제국주의론은 왜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해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가 보듯 볼세비즘은 실패했다
사민주의 역시 실패였다. 1차대전 후 영국의 노동당,독일의 사민당 등 각국에선 좌파정당들이 집권당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방향을 알려주던 교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교조를 버리지도 못하고 교조를 대신할 무엇을 찾지도 못한 가운데 오로지 일상의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공허한 혁명이란 수사대신) 윤리적 이상의 차원을 강조하고 이것으로 사회를 설득해야 한다는 필요성만을 강조할 뿐, 윤리적 이상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상을 사회 전체에 설득하는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운동이 힘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혁명이란 공허한 수사를 놓을 수는 없었다.
“교조없는 실천과 실천없는 교조가 결합된 기묘한 꼴”당시 상황을 정리한 말이다(‘정치가 우선한다’)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괴리하고 당의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정체성이 뒤죽박죽으로 모순된 상황에서는 국민 전체는 고사하고 노동자들이라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이 나올 턱이 없었다.”
저자는 당시 유럽 사회주의를 ‘무능’이란 한마디로 정리한다. 맑스를 대신 할 이론도 변해버린 상황에 맞는 실천도 실패한 말 그대로 맑스주의의 파산이엇다.
저자는 수정주의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로 비그포르스의 사민당을 말한다. 흔히 그렇듯 진정한 혁신은 변방에서 일어났다
맑스주의의, 좌파의 지적 파산에 대한 비그포르스의 혁신은 두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베른슈타인이 주장하듯 정당으로서 좌파정당의 힘은 도덕적 이상에서 나오고 그 이상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좌파정당이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내용에 대해 베른슈타인은 분명하지 않았다. 비그포르스는 그에 대해 분명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내걸어야 할 윤리적 이상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상식’이 아니라 바로 노동계급의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윤리적 이상을 온 사회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과정이 바로 노동운동이며 사민주의운동이다.” 좌파정당도 현실의 정당이며 현실의 정치를 해야한다. 현실의 정당으로서 현실의 정치로서 구체성을 말한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이상 역시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그포르스는 “사민당이 노동자들과 온 사회성원 들 앞에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사회의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베른슈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주의의 유토피아를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사민주의 운동에 목표 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는 운동뿐’이란 입장었다. 그러나 비그포르스에게 사민주의 운동은 노동자가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마음 속에서 간절히 열망하는 윤리적 이상을 추출해 모든 사회성원의 동의를 얻은 가운데 그러한 윤리적 이상을 담은 사회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최대한 총체적으로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노동운동과 사민주의가 주어진 현 상황에서 실현해내고자 하는 ‘잠정적 유토피아’는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혁신인가? 비그포르스가 본 것은 생산의 주체이면서 그 대접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현실이엇다. “노동자들은 도처에서 정신적, 육체적 궁핍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차별과 경멸을 받았으며 생산현장에서는 그저 자본가와 경영자의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존재로서 다루어진다.” 비그포르스는 그런 현실에 대해 산업민주화를 말한다. 이전까지는 산업국유화가 좌파의 구호였지만 1차대전의 국가통제경제는 국유화가 대안으로서 끔찍하다는 실증이 되었다. 더군다나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은 국유화에 대한 지적 정당화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더군다나 스웨덴 사민당에선 당시 이론적 혁신이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소유권이란 사실 그다지 관계가 없는 혹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이런저런 권리들의 다발에 불과하다. 자본가가 기업에 대해 갖는 소유권 안에는 이윤을 챙길 권리, 경영자를 선임할 권리, 기업의 전략과 운영방침을 결정할 권리, 노동자를 고용, 해고할 권리, 가격을 결정할 권리 등 수많은 권리가 들어있다. 이 많은 권리의 다발인 소유권을 ‘사회가 일거에 빼앗아 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 사회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별쭝난 인격체이기에 어느날 갑자기 이 권리들을 일사분란하게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사민당의 소유권 개념에 대한 혁신은 “스웨덴 사민당이 좀더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인 사회민주주의적 경제 형태를 착상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소유권 다발을 조금씩 하나하나씩 제한하고 빼앗아 오면서 “경제와 사회에 대한 자본 권력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권 개념의 혁신은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와 함께 이후 스웨덴 사민당의 방향을 결정한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얼마든지 유토피아는 가능하다.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노동자들이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임노동의 폐지가 아니다. “그의 산업민주주의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사가 협조하면서 노동이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결정의 구상에 가깝다.” 산업구조를 바꾸면 “노동자를 차별하는 온갖 사회제도도 사라지게 된다. 노동자를 사회의 가장 소중한 생산의 주체로서 대접하는 공동체가 회복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평등한 사회성원으로 통합될 것이다.” 산업민주주의 덕분에 “스웨덴 사민당은 추상적 이론과 공상적 유토피아에 기대지 않고도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민주의 경제의 모습을 제시할 수 있었다.”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가 등장하고 현실정치에서 힘을 얻은 것은 대공황 덕분이엇다. 비그포르스는 산업민주주의를, 사민주의의의 이념을 ‘나라살림의 계획”이라 불렀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변함없지만 그 방향은 착취와 같은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이 아니라 나라 살림과 산업 전체를 효율적으로 조직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에 맞춰졌다. 그러자 사민당의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도 풀렸다. 이러한 방향 전환 덕에 당이 이제까지의 무능력과 무정책의 한계를 벗어나 나라 살림과 산업 전체의 효율적 조직이라는 목표에 맞추어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낼 있었다. 이제 사민당은 예전의 사민당이 아니었다. (1932년) 선거에서 정교한 경제이론의 논리와 구체적이고 명확한 정책했으며 그 내용은 특정 집단이나 이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바람에 정확히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민당 당원들의 운동은 신바람이 났고 곳곳에서 돌풍이 일어났다. 이후 1976년까지 44년이나 이어진 사민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