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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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를 악인, 유비를 선인으로 말하는 것은 정사의 입장에선 분명 왜곡이다. 정사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의 입장에서 기술하며 조조를 나쁘게 그리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조를 나쁘게 보는 관점이 공식화된 것은 삼국지연의에서였다. 그리고 경극에서도 조조는 악인이다. 관객들은 조조가 이길 때면 한숨을 쉬고 유비가 이기면 기뻐했다. 왜 그랬을까?

 

대다수 중국인은 우주가 언제나 어떤 조화를 유지하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인가 나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그것은 분명 이 세상에 그에 상응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위진남북조의 분열기에는 바로 조조가 그런 사람에 해당된다.”

 

그러나 조조는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던 뛰어난 정치가가 아닌가? 지금으로선 조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잔인한 면이 있었고 모략을 쓰기는 했지만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서 보는 관점에 익숙한 지금 사람들에겐 그런 것으로 조조를 탄핵하는 것은 그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비친다. 난세를 끝낸다는 목적을 위해선 권력을 잡고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깨끗한 일이 아니다. 고고한 척하면서 손을 더렵히지 않고 어떻게 대의를 이룬단 말인가? 말로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조조는 비난하고 유비는 찬양하지만 유비 역시 조조 못지 않게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조조를 나쁘게 본 것은 민초들만이 아니었다. 유비를 정통으로 보고 조조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관점은 송대 성리학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교적 질서를 무너트린 사람이라 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 중에도 이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첸무가 그런 예이다. 중국의 역사편찬 전통을 오늘에[ 되살린 대가로 여겨지는 그조차 조조의 찬탈행위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황제제도 아래에서 자연적인 질서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행해지는 일방통행이었다. 만약 군주 스스로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오직 군주만이 우주의 지고무상한 도덕과 지혜를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3제로는 군주가 하급계층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다. 더욱이 그토록 광대한 영토 안에서 상충하는 숱한 이해관계가 모두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궁중의 황제라는 자리에는 신비로운 이미지가 있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황제는 그야말로 책임있는 중재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황제가 학식이 풍부하고 사리에 밝은 백관들에게 기대한 것은 다만 자신에 대한 신앙심일 뿐이었다. 만약 백관들 모두가 자기억제와 겸양의 미덕을 가장 큰 신조로 견지하고 잇었다면 그 어떤 충돌도 해결화지 못ㄹ할 것이 없고 또 극복하지 못할 기술상의 어려움도 결코없었을 것이다. 조조의 잘못은 거친 방법으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도 잇지만 대중이 굳게 믿는 신화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려는 언행을 서슴지 않은 데도 잇다. 첸무는 국가는 원래 정신적인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을 관리하는데 따른 기술상의 어려움 때문ㅇ사회적 가치의 총체로 삼을 수 있는 세습군주제를 시행해야 했다. 이는 나름 일리 있는 것이다.”

 

중국이 하나의 제국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통일이었고 그 문화의 가치는 군주가 상징햇다. 그러나 조조는 제국의 기초에 있는 군주의 신성함을 모독했고 제국의 뿌리인 정신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조조를 비난한 것은 그런 이유이다. 조조는 내용에 관심이 있는 실용주의자엿지만 제국을 떠받치는 것은 내용이 아닌 형식이었고 그 형식을 무시한 조조는 비난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조조가 비난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중국의 한계였다고 본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중국은 언제나 실질보다는 형식을 앞세우는 관료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정치적인 국가가 되었다.” 저자는 그 시작을 주나라의 봉건제도라 말한다. 주공이 창안한 주나라의 시스템에서 핵심은 봉건제도와 종법을 결합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봉건만으로는 원심력이 작용해 오래가는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 주나라의 시스템이 수백년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후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이유는 공적 시스템을 가족제도와 묶어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는데 있다. “훗날 유교라고 일컬어지게 된 이 평화공존의 관념은 공자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문왕과 주공에 힘입은 바 크다.” 공적 시스템에 사적 시스템을 결합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아이디어는 이후 유교의 정치적 비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진관다오는 이러한 시스템을 종법적 와 봉건적 의 동형구조(종법일체화 구조)라 말한다. 유교 禮制의 핵시은 종법제도이다. 그러나 유교는 그 종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틀었다. “종법제의 외형적 틀은 유지하되 그 내용에는 질적 전환이 있었다.” 원래 종법이란 귀족들의 친족관계를 규정하는 틀이다. 유교 이전의 귀족이란 유럽이나 일본의 중세와 마찬가지로 무사 귀족이었다ㅓ. “갑골문에서 친족을 뜻하는 이 깃발과 화살의 표상임은 시사적이다. 제후를 뜻하는 역시 화살()을 든 인간()을 표상한다. 고대 세계에서 족은 전투집단이었고 제후한 이 전투 집단의 장수, 사령관이었다. 유교에서 이루어진 종법의 질적전환의 핵심은 군사적 친족주의에서 윤리적 친족주의로의 전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군사적 친족주의로서 종법제의 핵심은 군사적 지배체제의 계승원리였다. 그 시기의 예란 그러한 군사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의례에 다음 아니었다. 그러나 공맹에 의해 재정비된 예제의 핵심은 오히려 이 군사적 성격을 탈색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적 질서 안에서 군왕과 가부장은 더 이상 군사적 지도자, 자의적 절대자일 수 없다. 부자와 군신의 관계는 군사적 질서가 아닌 윤리적 질서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전통 속에서 전통을 변환시켜야 한다. 전통의 이름으로 전통을 바꾸어야 한다. 이 노선은 현실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역사 속에서 유교의 승리를 보장해준 원천이었다. 친족주의의 핵심은 벤자민 슈우러츠가 고대중국에서 정립된 문명적 정향이라 강조했던 조상숭배다. 이 정향은 고대로부터 워낙 깊이 자리 잡은 것이었기 때문에 유교의 윤리적 변형조차 이 정향 위에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상래)

 

맹자는 양주와 묵적에 대해 단호한 태도로 추호의 융통성도 보이지 않은 채 아비도 임금도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짐승과 같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타협의 여지를 인정하지 앙ㄶ는 태도에 대해 오늘날의 독자들은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이해된다. 농민대중 속에 기층조직을 꾸리는 방법으로 혈족의 단결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엇다. 여기서 당연회 도출되는 결론은 가부장적인 의미의 세급군주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혈연관계에 멀고 가까움이 있듯이 남에 대한 호의도 반드시 친소(親疏)의 구분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개인이 사사로운 이익을 기준으로 행동한다거나 남들을 모두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호소력이 있을 수 잇겠집만 고대중국에서는 오히려 현실성 없는 주장이엇다; 우선 법률 면에서 중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왕조시대를 통틀어 중국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형법을 변함없이 유지햇다. 그 형법은 친족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하게 결합된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한편, 형법의 범위 내에서의 정당한 행동을 옹호한 것이다. 유교를 신조로 하는 통치자들은 법률을 제정하면서 남자의 지위를 여자보다 높게 정했고 연소자보다 연장자의 권위를 더 세워주었으며 학식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일반 서민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들은 분명 이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이 제도에서 비롯된 안정과 질서는 일찍이 해외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유교의 승리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었다. 조상숭배를 윤리화해 천하를 장악했지만 바로 이 승리는 진관다오가 초안정구조라 불렀던 친족질서()와 국가질서()大一統 체제의 항구적 보수성의 근거가 된다.” (김상래) 그러나 이 시스템의 안정성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었다. “그것은 평균적 민중의 최소한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최고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햇다. 조직이 단순하고 능률이 낮은 이 정치체제는 탄력성이 결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힘도 부족했다.” 그 시스템은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위한 것이었지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묻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스템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했고 의례적인 것에 치우치고 실질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더 집착하는 태도는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그 뒤로도 수천년이나 이어지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저자는 논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중국의 경우 지난 십수 세기에 걸쳐 지속된 기본적인 요소는 2세기에 이미 갖춰져 있엇다. 장기적으로 보면 당시의 중국이 정치적으로 조숙했던 것은 하나의 큰 성취엿다. 그러나 중국인들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햇다. 표면상으로는 기원전에 벌써 이 같은 체제가 존재한 점에서 보면 국가의 조직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층은 아무래도 조잡하여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후세의 기준으로 보면 더욱 그러했다.” 중국경제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과대성장국가론이라 할 수있다. 문명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본다면 국가와 사회, 경제가 균형을 이룰 때 그 성장잠재력이 크다. 그러나 중국은 기원전에 이미 제국이란 정치시스템이 완성도 높은 수준에 올랐지만 사회와 경제는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엇다. 이 때 문제는 시스템의 불균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제국이 망하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 200년이란 짧은 간격으로 반복된 이유를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한다. 제국이란 정치 시스템은 한대 이래로 축적된 농업적 재력이 일단 안정상태에 이르자 이를 저해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도상으로 이를 더욱 강화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문명의 시스템은 저수준의 균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저자는 낮은 수준의 균형에 제국 시스템이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전체적으로 중국문명이란 시스템은 저효율일 수 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프로세스는 이렇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료정부는 부담은 많은 반면에 실효는 적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적당히 책임을 면하기 위해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료정부도 납세자인 수백만 또는 수천만의 가난한 농민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청렴하지 않으면 아되었다. 자기억제와 상호존중을 중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은 많은 분쟁을 사전에 억누르는 역할을 했다. 혈연관계에 기초한 전통적인 사회질서에 만략 법에 의한 제재규정이 마련된다면 개인의 권리와 소유권 등을포함한 많은 법해석상의 유연성을 배제하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각 종족에게 그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잇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덕분에 관료조직은 행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덜 수 잇었다. 이와 함께 시가의 창작이나 경학의 연구에 능했던 관료들은 자신의 직무에 엄밀하게 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는 법을 적용하는 면에서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각 지역의 특수성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최소한의 공통요소를 전국적인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문인관료의 모든 관직은 사실상 호환될 수 있었으며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추상적인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다스릴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시정방향은 고려되엇지만 그 밖의 특수한 상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허한 체제가 부적절하다는 것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에 들어맞지도 않았다. 이는 교통과 통신 등 당시의 문화기술 수준보다는 중국 특유의 광대함과 복잡함이 이를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명백하다.”

 

저효율의 시스템이 수천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서 제국은 있어야만 했고 제국의 존재 자체가 중요기 때문이다. “맹자의 생존시기는 진시황의 통일과 불과 50년도 안 떨어졌지만 그는 이미 법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중앙권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찬동했다.” 법가와 유가가 다른 것은 방법일 뿐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맹자와 법가가 동의한 목적이란 국가의 폭력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폭력이 하나의 국가에 모아질 때 가능했다. 그러나 제국이 필요한 이유는 내란이란 폭력만이 아니었다. 제국이 성립한 후에도 중국이 제국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프론티어이다. “중국의 농경민과 변방의 유목민은 2000년에 걸친 항쟁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유목민족의 위협은 기원전 3세기부터 대단히 심각했다. 이간은 국면의 전개는 중국의 중앙집권화를 촉진햇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선이었다고 할 수있다. 그것은 제3의 지리적 요인으로 작용하여 중국 농업사회의 관료기구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아래에 놓이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이중톈은 이렇게 정리한다. “정권을 공고히 유지하는 데 능한 것은 역시 농경민족이다. 농업생산은 정성들여 조심스럽게 가꾸어야만 하며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천시, 지리, 인화가 중요하며 과도한 무력 사용은 결코 농경에 이롭지 않다. 그래서 춘추전국 시대에는 가을이 되어야 출병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농업생산을 보호하는 한편 무력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농경민족은 무력보다 권력에 더욱 치중했다. 비록 권력의 남용으로 농업생산이나 소농경제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지만 그 폐해는 무력의 그것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니 두가지 폐해 가운데 그나마 가벼운 쪽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면 농경민족은 暴民을 택하느니 暴君을 택한다. 차라리 신하로서 황제에게 복종하지 비적들에게 자신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집권의 국가제도는 중국과 같은 농경민족만 생각해낼 수 잇다. 농경민족은 문명 시대로 진입하면서 권력사회 심지어 권력집중사회를 건립해야만 한다. 무력사회에서 권력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은 일종의 진보이다. 사회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원가가 확실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권력은 일종의 비전형적 폭력이다. 굳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잇으며 심지어 폭력으로 실현할 숭 ㅓㅄ는 목적까지 달성할 수 잇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자원 지배와 부의 분배에 관한 방식은 결국 무력을 사용하는 쪽에서 자본이 덜 드는 권력 쪽으로 향하게 된다. 과거에 자원을 지배하고 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햇다. 맹자 이루상에서 땅을 다투는 전쟁으로 죽은 이들이 들판에 가득하고 성을 다투는 전쟁으로 죽은 이가 성 안 가득햇다고 한 것은 그 대가가 널마나 참혹한지 말해준다. 그런데 이제는 강압적인 것에서 연착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저 호령이나 문서 하나만으로도 행위가 금지될 수 있으니 이 어찌 효율적이라 하지 않겠는가? 집권과 통일은 역사의 요청이었으며 진과 한은 역사의 요구에 부응한 집행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국은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올리기도 했다. 제국은 의 대일통구조 위에 세워졋다. 제국이 안정적이려면 그 구조가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안정과 질서는 대가가 있었다. 사회를 그 구조에 맞도록 끼워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유학자들이 상업을 적대시한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상업에 있어서 경제적 자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자유가 제국의 권력과 호환되지 않는다 점이다. “어떤 권력 집중 사회나 권력 집중에서 전제로 발전하는 사회에서는 민간자본이 규모를 키워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제국과 맞먹는 재력 사회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과 왕국은 이처럼 민간자본으로 형성된 재력사회에 무너졋다. 중화제국의 통치자들은 상공업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었다. 중농억상이란 말이 제국의 역사에서 그치질 않았다. 진 왕조 건립 초기에 진시황은 천하의 부자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감시 삼독을 위해서였다. 한나라는 건립하자마자 억상정책을 시행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만한 거상대고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그래서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면 말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민간에서 운영되는 상공업에 대해 억제와 탄압을 가함으로써 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중톈)

 

결국 안정은 저효율을 대가로 얻어졌다. 그러나 저효율은 폭력의 통제란 최소한의 존재이유 조차 버겁게 만든다. “제국은 본질적으로 수탈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비록 이러한 수탈이 통상 비폭력 또는 비전형적 폭력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탈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제국의 몸통에 기생하는 흡혈동물인 통치집단이 만약 수탈을 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생이라 말한 까닭은 그들이 세금을 징수한 후 현대국가의 정부처럼 납세자에게 세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는데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수탈을 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없다. ‘좋은전제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는 개명 전제이고 가장 좋은수탈 역시 그저 제한적인 수탈에 불과하다.” (이중톈)

 

그러나 제국의 안정은 엘리트의 숫자를 늘린다. 늘어난 엘리트는 자신들이 기생하는 국가를 통해 자신들의 몫을 더 늘리려 한다. 결국 제국의 수요를 감당하기엔 제국 때문에 저효율로 유지되는 사회가 견딜 수 없다. 줄어드는 자원을 놓고 엘리트들의 경쟁이 격화되면 엘리트들은 귀족화되면서 제국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이 과정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제국의 탄생리뷰 참조)

 

엘리트들의 자원과점, 즉 토지겸병은 중국의 역사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징병과 징세의 기초가 되었던 점은 우선 그 공평성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중국 농촌에 단일하고 균일한 초석을 다짐으로써 관료조직의 통제가 용이하도록 만들었다. 한 제국은 효()와 염(, 청렴함, 재물을 탐하지 않음)이라는 덕목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의 조정이 문치를 통한 응집력을 중시한 반면 경제적인 번영을 꾀할 뜻은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같은 조직과 구조는 토지의 집중현상으로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토지겸병은 우선 제국의 세수기반을 무너트려 제국의 최소 존재이유를 무너트린다. 그뿐 아니라 황제의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전해짐으로써 전국이 일원화되는 것이 전제정부의 일반적인 체제인데 만약 지방귀족 세력이 강해지면 이러한 체제는 그만큼 흔들리게 된다. 조씨가 한나라를 대신하고 사마씨가 위나라를 대신함으로써 전면적인 붕괴위기는 일단 넘길 수 있었지만 그 근본원인이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부분은 진관다오의 초안정구조론의 핵심이다. “구조형태상으로 말하자면 중국 봉건사회는 종법일체화의 구조엿고 그것은 두가지 조절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의 조절 메커니즘은 왕조의 안정기에 작용했는데 그것은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세가지의 하위 시스템을 강력히 통제하여 상호 적응시키거나 또한 신구조의 성장과 맹아의 상호결합 과정을 억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조절 메커니즘은 조직교란력의 증대를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지니지는 못햇다. 조직교란력이 일정 정도 증대하면 지주의 농민에 대한 착취는 필연적으로 한도를 넘어서서 국가는 대농민반란 가운데 붕괴되었다. 이때 두번째의 조절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한편에서는 종법일체화 구조가 왕조회복의 거푸집(유전자)을 제공하고 또한 대동란이 조직교란력을 소멸시켜 왕조회복의 가능성도 생겨났다. 다른 한편 대동란이 생산력의 축적을 가로막고 새롭게 생겨나는 맹아를 파괴함으로써 사회는 원래의 구조로 되돌아갔다. 이렇듯 두가지 조절 메커니즘이 번갈아 작용력을 발휘하며 사회구조의 거대한 안정성이 유지되었다. 이들 두 가지 조절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는 것이 초안정시스템이다.” (진관다오)

 

저자는 제1제국(저자가 진한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사라진 위진남북조의 300년이 제국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이 시대의 역사는 종합적인 구심력이 없는 대신 넓게 뻗어나갔다는 데 특징이 있다.” 진관다오가 말하는 종법일체화 구조에서는 다양성이 살아움직일 수 없다. 제국의 넓은 땅은 나름의 사정이 있고 사람도 사정이 있다. 그러나 제국이란 틀은 그 모든 다양성을 제국이란 대패로 밀어 같게 만든다. 그러나 300년이란 분열기는 그 다양성을 해방시켰다. “당이 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룬 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잇다. 우선 장장 3백여년에 걸친 동란이 한 원인이다. 위진남북조는 369년이란 세월 동안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생산했으며 나름의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활력이 없었다면 수의 창업 토대도 마련되지 않았을 것이고 대당의 성세도 존재할 수 없엇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당 태종 시절의 이른바 정관지치는 그 열매를 따먹은 것에 불과하다.” (이중톈)

 

그러나 당 왕조에서도 시스템의 불균형이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유가의 전통적인 왕조는 일종의 조직이었을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의 규범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둬야 한다. 그런 까닭에 전통적인 왕조는 면밀하고도 빈틈없는 방식으로 구성되지는 못햇다. 당왕조가 지방관리의 임면권을 확립한 이후로 공문서가 증가햇다. 그러나 문서처리는 갈수록 형식화되었고 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한다든가 유목민족에 대한 대책이라든가 수재나 한재에 대책, 황무지 개간 등의 행정에서 더 이상 실질적인 정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시스템의 불균형을 언급한다. “근대 서양의 상황과 비교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제도화된 사적인 이익이 정부와 대등한 지위를 가질 만큼 보장되지 못햇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그러한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개인이 정부에 도전할 수도 있었고 정부에 서비스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들도 부분적인 행정비용은 부담해야 했다. 여분의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잇는 대등한 위치의 민간조직이 없었던 당나라의 관료기구는 전적으로 관료의 명예라는 규범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대체로 하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언제나 매우 중요한 듯햇지만 모든 것이 산만했고 형식화된 상급의 행정기구는 언제나 일을 얼버무리거나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압력을 가하는 도리밖에 없엇다. 요컨대 전제정부는 전제권력자의 선택을 벗어날 수 없다. 중국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지방조직이나 기술적인 설비 면에서 미처 규모도 갖추기 전에 대제국의 통일이 실현되고 말았고 그로 인해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사이에 중간계층이 형성되지 않음으로써 오로지 전제군주가 자기 나름의 결단으로 이 결함을 보완하려고 했다.”

 

당 왕조가 멸망한 요인은 도덕의 타락도 기율의 전면적인 해이도 아니었다. 바로 왕조의 창업 당시 갖추어졌던 조직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관료들의 형식 위주의 통제도 절절히 조정될 수 없었던 것이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왕조의 말기에 철저한 지방분권이 이루어져 군벌할거의 국면을 맞이했다.”

 

저자는 문제를 수량관리의 부재라 요약한다. 언듯 중국의 제국질서는 합리성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합리성은 목적적 합리성일 뿐 그 목적적 합리성을 구현할 도구적 합리성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제국의 위정자들이 수량관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혼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어떤 곳의 창고에는 그야말로 물품이 넘쳐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물자부족을 보고하는 경우가 허다햇다. 송대의 재정보고에서는 을 단위로 하는 곡물, 을 단위로 하는 동전, 疋을 단위로 하는 비단이 호환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일용품의 가격은 지역마다 달랐고 어떤 때는 같은 지역이라도 시간과 계절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기도 햇다 관방의 기록은 실질적인 교환율이 거의 세금징수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음을 인정하면서 그에 따라 백성은 호소할 데가 없는ㅊ지엿다고 서술하고 있다. 징세자와 세무관리가 서로 대립할 경우에는 세액을 각지의 정채진 액수에 따라 겨둘 것인지 실제상황에 맞추어 신축적으로 적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징수해야 할 세목과 이미 징수된 세목이 혼동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소실되거나 면세된 재물조차 징세대장에서 좀처럼 삭제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복식부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전 서양에서도 발생했지만 송대의 경우처럼 그렇게 놀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저자는 안록산의 난 이후 절도사들에 의해 제국이 사실상 분할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하북성 동남쪽에 잇던 성덕진 관할하의 4개주는 100년이 넘도록 왕씨 일족의 세력 범위 안에 잇었다. 이를 불안정한 징표라 할 수는 없다. 위박진의 하진도는 829년 군사들의 추대를 받은 뒤 비로소 중앙정부에 의해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관할하에 있던 7개주는 오늘날의 하북과 하남 사이에 걸쳐 있었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민심을 많이 얻어 그 직위를 자손에게 물려줄 있었다. 이러한 예는 곧 징세능력을 가진 자가 그 지역을 지배할 수 있다는 고금불변의 원칙을 실증해준다. 지역의 다양성이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제국의 일반체계를 능가하게 될 때 제국의 통제범위는 이전보다 줄어들지만 행정의 효과는 이전보다 높아졌다. 중국은 여전히 소규모 자작농이 주체를 이루는 국가엿다. 다만 개인의 경작규모와 지역별 생산력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새로운 세입은 주로 상업과 농업, 양조업, 광업, 내륙교역 등에서 얻을 수 잇었으며 심지어 화폐의 주조로도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과거처럼 관념적인 계획으로 국가를 운영하거나 지방호족이 좁은 지배영역을 확장하여 독립왕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군벌의 할거는 실로 그런 특수상황에 대한 역사의 답이었다. 이는 중앙정부가 전국에 걸쳐 일률적으로 세율을 적용하는 제도와는 다른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즉 해당지역의 실력자인 세습군벌이 세금을 부과했을 뿐 아니라 세금도 각 지역의 실정에 맞추어 납세자의 능력에 따라 분담하도록 햇다. 행정적인 면에서도 그 지방의 실정을 더욱 중시할 수있게 되엇고 지역의 개발도점차 촉진되었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호남에 있었던 마씨 일족은 차 산업을 발전시켜 수출까지 했고 전씨 일족은 절강에서 수리사업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왕씨 일족은 복건에서 대외무역을 크게 장려했다. 이와 같은 성취는 과거의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으로서는 원만하게 이루어내기 힘든 것이었다.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은 대체로 지역간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쪽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전체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햇다. ”

 

송 제국은 그런 발전을 배경으로 성립한 제국이다. 그러나 송 제국 역시 근대국가에서 볼 수 잇는 수량관리가 가능한 도구적 합리성이 없었다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당이 멸망한 후 510국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일어난 송 왕조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모병제로 군사를 조달한 왕조였다. 조광윤은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엇다. 이는 정책상의 역점이 정통을 중시하는 추상적 원칙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점과 중농정책에서 새로이 상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수동적인 지배에서 능동적인 지배로 전환되었다는 점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하여 송제국에는 한때 신선한 기풍이 감돌았다. 경제적인 면에서 송 왕조는 중국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도시가 번창했고 내륙의 운하에는 선박들이 빈번히 오갔으며 조선업도 비약적으로 성장햇다. 국내외의 교역량이 전에 없이 높은 수준에 달랫다. 동전의 유통은 그 뒤의 어느 왕조도 깨지 못할 신기록을 세웠다. 정부의 장려로 광업과 제련업도 크게 발전했다. 방직업과 양조업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군벌할거 시대의 발전을 바탕으로 송 왕조에서 제국의 시스템을 바꿔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송 왕조는 강력한 국가 아직 사회적으로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서둘러 금융관리 시스템 기술을 행정수단으로 삼으려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왕안석의 신법은 그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왕안석의 신법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비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잇었다. “오늘날의 고나점에서 왕안석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실로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다. 우리보다 9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이미 경제관리에 따른 국사의 처리를 제도화하려 했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더구나 그 범위나 심도는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엇다. 신종 조욱에게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국고가 충분해질 수 잇다고 말했던 그는 이미 신용대출의 방법이 경제성장을 자극할 수 잇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생산성이 증대되면 비록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더라도 그만큼의 증세효과를 거둘 수있다는 확장론적 안목은 분명 전통적인 경제안목과는 다른 것이엇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송 제국의 재정기구를 상업적인 성격으로 전환하려면 금융의 통제방식이 적절히 정비될 필요가 있었다. 송금통지서, 선하증권, 보험증권, 해손의 규정, 선박저당대차, 모험대차증서, 합자계약, 어업권 등이 모두 입법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아무런 장애없이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산상속이나 파산, 담보물 취득권 상실, 사기, 횡령 등에 대한 규정도 상업사회의 유동적인 상황과 서로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금전으로 통괄해야 이허나 것이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내륙 상업구조의 실상은 이 같은 요구를 충족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농업부문에서 자본축적을 이룰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은 조건이 지속되는 과정에서는 서비스와 관련된 사업이 생겨날 수가 없었고 발전할 수도 없었다. 통행료를 내는 국도도 건설되지 않앗고 정규적인 우편업무도 부재했다. 소송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민법의 발전도 지체되었다.” 이전과 이후의 제국들처럼 송나라가 전국적으로 일치된 국면을 보일 수 잇었던 것으 문화적 응집력에 서 발전한 사회규범 때문이지 금전의 힘과 그에 따른 교환성 때문이 아니었다.” 왕안석의 신법은 다만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이엇다. 중국의 정치적 통일은 그 수준이 국내의 경제조직을 훨씬 앞서 있었고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양쪽 모두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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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라더 2012-02-26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배경과 글씨 색이 너무 닮아있어서 읽기 힘들어요. ㅠㅠ

Lulu 2012-02-26 19:34   좋아요 0 | URL
그건 알라딘에서 설정합니다 ^^; 불편하시면 http://blog.naver.com/qrat 에서 보시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