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전쟁 - 중국 vs 미국,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프랑수아 랑글레 지음, 이세진 옮김 / 소와당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에피소드가 두 가지 잇다. 하나는 (2008) 8월초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벌인 짧은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9 15일 리먼 브러더스 파산이다.” 두 에피소드는 탈냉전 시대의 종식을 보여준다.” (캘리니코스) 두 에피소드 중 리먼브러더스 파산은 이해하기 쉽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무너졌다는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러나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은 설명이 필요하다.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탈냉전시대는 미국 헤게모니의 정점처럼 보였다. 그 시절 미국의 세계전략 중 하나는 러시아를 봉쇄해 다시는 과거와 같은 슈퍼파워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시 부활했다. 물론 러시아가 옛 소련이나 러시아 제국을 부활시키려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옛 제국의 영역에서 러시아 중심의 제도적 구조와 지리적 관계구조를 새로 창출하고 있다는 말이 옳다. 세계수준에서 러시아는 이 새로운 지역적 파워를 이용해 미국이 우위를 잃고 있는 세계체제에서 일정한 구실을 하고 싶어한다.”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은 러시아의 그런 전략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이 뒷배를 봐주던 그루지야에 전쟁을 걸 수 있었던 직접적 이유는 미국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미국의 권력이 쇠퇴하는 훨씬 더 장기적인 지정학적 과정의 한 단계라 캘리니코스는 말한다.

 

부시 2세 정부가 추진했던 세계적 프라젝트를 논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 프라젝트의 재앙적 실패야말로 여러모로 오늘날의 세계정세를 만든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부시 2세의 프라젝트는 부시 1세와 빌 클린턴 정부의 노선을 더 과격하게 추진한 것이라 이해람이 가장 적절하다. 부시 부자와 큰린턴은 모두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이 되긴 했지만 세계의 경제력 분포가 바뀌면서 전보다 미국경제의 비중이 축소되고 동아시아의 비중이 확대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부시 부자와 큰린턴 모두 2차대전 이후 확립된 국제 공조체제를 유지, 확대해 미국의 헤게모니를 굳히려 했다. 그러나 부시 2세정부는 미국의 양대 비교우위인 펜타곤과 달러의 힘을 부시 1세나 클린턴 정부 때보다 더 일방적이고 공격적으로 휘둘렀다.” (캘리니코스)

 

달러는 이번 위기로 무너졌다. 그리고 펜타곤도 이라크에서 무너졌다. “프리드먼이 쌍둥이 위기라 부른 2008년의 위기 때문에 부시의 프라젝트는 더욱 엉망이 돼 버렸다. 우선 부시 정부는 캅카스 지역에서 러시아를 도발해 또 다른 역풍을 자초했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한가지 핵심은 러시아가 약해진 것을 틈타 유럽연합과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장해 러시아를 포위하는 동시에 미국의 영향력을 유라시아 대륙 깊숙이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전략은 그루지아에서 러시아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 군사력의 한꼐를 보여주는 징후일 뿐 아니라 지난 70년간 미국이 구축하고 점진적으로 확장해온 초국적 자유자본주의공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징후로 읽혔다. 지금은 오직 미국만이 진정한 글로벌 파워다. 그러나 그 때문에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자신의 역량을 더 넓게 분산해야 하고 폴 케네디가 제국의 과잉확장이라 부른 위험에 노출되었다. 러시아는 바로 미국의 과잉확장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금융위기로 미국의 헤게모니는 더욱 금이 갔다. 그것은 이라크의 재앙 이후 또 하나의 엄청난 상징적 타격이다. 잘 나간다던 영미식 자본주의가 별안간 자폭하면서 세계경제까지 함께 끌어내렷으니 말이다.” (캘리니코스)

 

금융위기는 더 직접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약화시켰다. 앞으로 미국정부는 경제위기에 대처하느라 정치적, 경제적 자원을 소진하게 될 것이고 다른 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캘리니코스)

 

그러나 미국 헤게모니는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 왜 일까? “위기가 닥쳤을 때 다른 경제체제들이 대부분 미국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엇기 때문이다. 미국을 가장 소리 높여 비난하던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는 완전히 찌그러졌다.” (닐 퍼거슨) 미국이 약해졌지만 그 약해진 미국조차 상대할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앞으로 수십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경제대국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캘리니코스) 미국은 과거 그들의 경쟁우위를 보장해주엇던 것을 아직 잃지 않았다. 그 힘 덕분에 미국은 19세기 말에 비스마르크가 건설한 독일처럼 될 잠재역이 있다. 당시 독일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서로 맺고 잇던 관계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각각의 주요 국가와 맺은 유럽의 정직한 중재자였다. 말하자면 독일은 유럽 국가 체제의 허브였다.” (자카리아)

 

자카리아의 말은 미국은 경제위기로 약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국가 체제 속에서 극점을 차지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관리되는 강대국들의 합창곡을 계속 지휘할 수 있을” (캘리니코스)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 합창곡은 갈수록 불협화음이 될 공산이 크다. 그 이유는 미국이 중심에 있었던 그 허브의 그물망이 찢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캘리니코스 그루지야 사태를 중요한 사건으로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만 그 그물망을 찢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돌의 전주곡이라 이책의 저자는 본다.

 

미국 헤게모니의 붕괴조짐은 중국에 엄청난 여파를 남겼다. 바로 중국이 자신의 힘을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2010년 기준) 2년전부터 중국은 모든 영역에서 오만하게 자국의 힘을 시험해보고 있다. 영유권 분쟁 같은 쓸데없는 위신 세우기에 힘들 쏟는 것도 그 예이다. “중국은 세계경제위기를 계기로 자신의 패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확신은 과거의 패권국이나 패권국 후보들과는 심리적 배경이 아주 다르다고 저자는 본다. “중국인들에게 지금의 성공은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일종의 복수다. 200년간 세계최고의 자리를 감히 찬탈했던 서양인들에 대한 복수이다. 오늘날 중국의 성공은 민족주의적 상처를 달래기는커녕 더욱더 그 상처를 자극한다. 그러한 성곡이 강대국이 되겠다는 의지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과거에 누렸던 번영의 공백기는 이 정도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신흥강국들이 그렇듯 중국도 현재 세계의 패권을 쥔 미국이 자신의 앞길에 훼방을 놓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마땅히 누려야 할 위상을 누리고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미국이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독일이 영국이라는 당시의 강대국에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포위 컴플랙스는 평범한 중국인뿐 아니라 중국지도자들에게도 있다.”

 

저자는 그 콤플렉스가 피행망상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 뿌리는 미국과의 관계가 시작된 40년전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중미수교 40여년은 ‘9’로 끝나는 해마다 조금씩 더 복잡하고도 애매한 관계로 발전해왔다. 상대에 대한 감탄과 멸시, 상호필요와 성가신 의존성으로 이루어진 관계그 관계의 시작은 서로의 필요 때문에 시작되었다.

 

베트남에서 발을 뺄 궁리만 하던 닉슨에게 중국은 좋은 카드가 되어 주었다. 하노이를 지원하는 소련을 고립시켜 소련에게 타격을 주고 하노이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협상을 시작할 수 잇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은 좋은 카드였다. 점점 사이가 나빠지던 소련 대신 손을 잡을 상대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베이징은 미국과의 화해에서 유익한 교훈들을 끌어냈다. 우선 중국은 미국과의 알력 관계를 경험하면서 중국 밖의 세상을 다루는 법을 익혔다. 미국과의 관계는 중국에게 불리할 것이 없었다. 닉슨과 키신저의 태도는 중국인들에게 중국없이는 강대국도 제구실을 할 수없다는 생각을 굳혀주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은 자기 나라에서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중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중국은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 덩샤오핑은 미국의 기술력과 대기업들이 필요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미관계는 그 성격 자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중국입장에서나 미국입장에서나 소련이라는 곰을 궁지에 몰기 위해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적 계산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 관계는 중국입장에서 자존심을 끊임없이 건드려 댔다. 앞에선 중국만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뒤로는 반역도당, 대만에 무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선거때만 되면 베이징에 날아와 사진을 찍고 돌아간다. 만리장성에 찍은 사진은 세계의 리더라는 이미지를 팔아 표를 사는데 그만이기 때문이다. 닉슨도 그랫고 카터도 그랬으며 중국을 빨갱이라 욕하던 레이건도 그랬다.

 

정말 우끼는 건 매년 최혜국대우를 갱신할 때이다. “중국의 대미 수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미국의 최혜국 대우연례 갱신은 봄마다 빠지지 않는 코미디엿다. 이 코미디의 1막은 클린턴이 위협을 하고 미 의회가 적의를 드러내면 중국이 초조해한다. 2막에 들어가면 로비가 기승을 부린다. 1973년에 중국에 진출한 미국 주요기업들의 모임으로 설립된 미중무역전국위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단체들이 알력을 행사한다. 반체제 투사 몇 명 감싸겠다고 중국시장을 막아버렸다가는 미국 재계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있다고 경고를 하면서 말이다. 3막에 들어가면 미국 행정부가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한해 더 갱신해주고 그들의 후퇴를 감추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십분 활용하는 미국기업들에게 클린턴이 그러한 특혜를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처음 수교를 할 때만 해도 중국은 강대국으로 미국을 대우해주었고 미국도 중국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갈수록 미국은 중국을 아이 다루듯 인권이 어떠느니 설교를 늘어놓는다. 말만 그렇게 하는게 아니다. 은하호 사건같이 남의 상선을 불법으로 나포하고 나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혐의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사과하나 없다. 힘 없는 것이 죄다.

 

은하호 사건은 중국인들의 새로운 두려움을 기정사실화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독불장군 노릇을 하며 도발을 계속하리라는 두려움이엇다. 물론 소련의 붕괴로 중국은 무거운 부담 하나를 덜었다. 그러나 소련이 사라지자 천하는 미국의 것이 되었다. 이미 2년전에도 워싱턴은 걸프전을 자국의 이익에 이용한 바 있었다. 경제분야에서 중국은 이제 자국의 힘을 확신하고 상승국면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외교분야에서 중국인들은 유일한 강대국, 그들이 전략적 수단을 써볼 여지가 없는 대상을 상대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혼란에 빠진 지금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 누구에게 기대며 누구와 동맹을 맺는단 말인가? 자유주의 질서와 미국의 지배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서방사회를 안심시킨 반면 중국을 더욱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1999년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을 오폭한 사건은 중국을 드디어 폭발하게 햇다. “베이징에서 반미시위가 일어났다. 천안문 민주화운동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였다. 1949년 이래 중국의 민족주의가 이처럼 대대적으로 폭발하기는 처음이엇다. 중국의 반미운동은 중국이 서양 특히 미국에 얼마나 깊은 원한을 품고 잇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 사건은 중국인들의 상반된 두 감정, 즉 치욕의 한 세기에서 얻은 열등감과 위대한 제국의 유구한 역사에 뿌리내린 극도의 오만함을 자극했다.”

 

이후 두 감정 중 오만함이 더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200년대 초 중국은 과거 1850년대에 이미 이룩했던 높은 생활수준을 되찾는다.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서양의 20%수준이었?. 중국 역사상 생활수준이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때는 1975년 문화대혁명시기였는데 당시 중국의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서양의 7.5%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제성과는 중대한 전략적 변화,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의 입장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중국은 자율권을 얻엇다. 더욱 결정적인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있다. 중국은 서양의 경제모형과는 다르지만 효율성이 결코 뒤떨이지 않는 경제모형을 만들어냈다는 자각을 갖게 되었다. 중국의 경제적 상승은 워싱턴 합의를 활용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00년대 초에 자국의 힘과 성공에 대한 중국의 자각은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 이러한 계시와 자기에게 투사하는 이미지 덕분에 중국은 전방위적 외교에 나서게 된다. 이때 베이징은 중국의 약진이 불어일으키는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서양을 향한 새로운 컨셉의 선전공작을 편다. 화평굴기 즉 평화적 부상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 메시지의 의미는 명백하다. ‘강대국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지 말라. 우리가 언제나 차지했던 그 위상을 되찾게 되더라도 세계의 안정을 위협할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는 2008년 역전되는 듯했다. “중국은 미국을 호되게 후려친 글로벌경제위기를 희소식으로 받아들였다. 이 불황은 중국이 세계무대에 나서서 미국을 무릎 꿇릴 기회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미국이 그동안 지은 죄대로 벌을 받는다 여겼다.” 그러나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었다.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서 중국도 나름 호되게 당해야 햇다. 이후 중국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더 이상 겁낼 필요도 없고 덕분에 피까지 봤으니 할말은 하고 살아야 했다.

 

2009“4월 중순 중국중앙은행자 저유샤오촨이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그는 1971년 이후로 계속 변동하고 잇는 달러를 기분으로 하는 현 통화체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졌다. 저우샤호촨의 발언은 국제 금융계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중미관계가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은 미국의 세계경제 지배를 중국이라는 도전자가 정면으로 반박했다고 봐야 한다.” 그의 발언의 진의는 이런 것이었다. “달러화 때문에 자기네들이 가진 금융채권의 위험도가 커지고 그렇기 때문에 달러를 국제기준통화로 삼는 체제를 지지할 수 없다.” 다들 하는 생각이지만 중국은 이젠 그럴 말을 해도 될 때라고 본 것이다. 중국의 도발은 그외에도 여러 외교채널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오바마는 집에 난 불 때문에 중국과 불장난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만 했다.

 

미국과 중국은 충돌할 수 밖에 없는가? 현재로선 터무니 없다. 군사력이란 체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국방비는 5년마다 두배로 불어나고 잇다. 베이징의 국방예산이 워싱턴의 국방예산을 뛰어넘는데는 10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2020년에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 해도 미국의 힘으로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엄청난 적자의 제약에 매여 있으므로 중국의 전진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투자가 부담스럽다.”

 

물론 체급이 같아진다고 싸우란 법은 없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중국은 정복전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역사를 살펴보건대 단기간에 군비를 확충하고서 정작 그 군비를 사용하지 않었던 나라는 없다. 나라가 닫혀 있을 때에는 자국의 안보에만 집중했다. 대만과 티벳에 대한 집착은 포위 콤플렉스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은 20년전부터 크게 개방되엇고 중국은 자국 영토를 둘러싼 광대한 바다를, 석유와 원자재가 이동하는 전략적 경로를, 그리고 이러한 성장의 귀중한 동력을 공급하는 국가들을 주시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이 개방을 하기 전에는 이 나라의 주요한 이익지역은 대만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개방 이후에 이 지역은 동심원을 그리며 크게 확장되엇다. 중국이 자국에 없지만 꼭 필요한 상품의 수입에 의존하면 할수록 그 지역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해외에서 취득하는 광산, 기업, 인프라등의 자산이 늘어날수록 그러한 자산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미국도 자기네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해야 할 때에는 폭력을 동우너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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