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4 사계절 1318 문고 24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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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보다도 우선 토끼가 주인공이라는 것이 맘에 걸린다. 사자, 호랑이, 독수리 그것도 아니라면 늑대나 곰과 같은 힘세고 멋진 맹수들도 많은데 왜 하필 토끼일까. 그리고 하나 더! 환타지라니! 근데 표지가 영...... 환타지 소설의 책표지라면 뭔가 의미심장하고 알쏭달쏭하고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횅한 풀밭과 아무 특징없는 토끼 한마리라니. 이 책에 대한 수많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첫인상이 주는 불안감 때문에 1권만 샀다. 재미없으면 팔려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면서도 결국 읽기 시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토끼가 주인공인 환타지라는 것이 대체 어떤 걸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귀엽고 겁많고 소심할 것만 같은 토끼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환타지는 어떤 것일까. 우선 슈퍼 토끼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초인적, 아니 초묘(?) 적인 토끼의 신비한 탄생, 여우와 개와 고양이와 인간을 물리적으로 압도하는 능력을 갖게 된 토끼가 만들어어 내는 갖가지 영웅담! 근데 이건 너무 빤하잖아. 아마 애들도 이런 이야긴 시시해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마법에 걸린 토끼 공주와 왕자님과의 사랑이야기는 어떨까?  계모인 마녀의 마법에 걸려 토끼가 된, 물론 이것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같지만, 공주는 사랑하는 이의 눈물이 닿는 순간 마법에 풀리게 된다. 마녀가 풀어 놓은 늑대에게 쫓기던 토끼 공주는 우연이 왕자님에 의해서 구출된다. 그리고 여차저차 해서 이 둘은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또 여차저차해서 마녀를 물리치게 되고, 그리고? 뭐 그냥 둘이 잘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 근데 이것도 영......  

1권을 읽고 나서 느낀 첫번째 생각은 이 소설 속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환타지'는 없다는 것이다. 표지 그림이 아주 잘(?) 보여주듯 이 소설이 보여주는 환타지 속에는 들판과 토끼 밖에 없다. 헤이즐, 파이버, 빅윅, 스트로베리, 댄더라이언 등등의 토끼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단지 풀을 뜯고, 엘릴(토끼어로 토끼들의 '적')을 피해서 도망다니고, 짝짓기를 위해서 암토끼를 찾아다니는 게 고작이다.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물리적 능력이래야 기껏해야 고양이를 혼내주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들포드 마을을 떠나 워터십 다운에 정착하는 토끼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아니, 풀뜯고(토끼어로 '실플레이'), 도망다니고, 굴파는 얘기가 어떻게 흥미진진한 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언뜻 생각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지극히 '토끼'스럽다는 점이다. 앞서 내가 얘기한 슈퍼 토끼와, 마법에 걸린 토끼들와, 왕자와 공주님 이야기는 토끼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실제로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힘센 악당들을 물리치고,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마법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인간들의 '환타지'라면, 엘릴들로부터 꾀를 내어 달아나고, 짝짓기를 할 암토끼를 찾아 목숨을 걸고, 힘센 토끼(운드워트)로 부터 자신의 마을을 지켜내는 이야기가 바로 토끼들의 소박한 '환타지'다.  

하지만 만약 토끼들의 소박한 환타지가 인간들의 것보다 좀 더 '현실적'이라고 느낀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슈퍼맨과 공주님과 마녀가 사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 속에 나오는 토끼들처럼 미래를 불안해 하고, 수많은 적(경쟁자)들을 피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워터십 다운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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