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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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사람들에게 <공중곡예사>를 추천해주고 나서 들었던 말중에 하나는 '너무 길다' 였다. 너무 길다? 사실 절대적인 분량으로 보면 그리 긴 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보다 긴 소설이 얼마나 많은가! '길다'라는 표현을 좀 다른 말로 하면, '지루하다'는 것이고 지루하다는 것은 군더더기가 많다는 뜻이다. 십여년전에는 주위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최근에 수업 때문에 다시 읽어보니 그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그 사람들 말마따나 좀 '길다'.

주인공은 당대 최고수인 사부를 만나 비장의 권법을 배운다. 권법을 배우는 데에 뭐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밥하고, 밥먹고-제자가 밥먹을 때 방해하는 사부는 꼭 등장한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물길어오고 등등등. 비장의 권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는데, 훈련이란게 맨날 그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 이 모든 자질구레한 가사업무(?)에 익숙해질 즈음에 사부의 경쟁자가 등장한다. 사부는 경쟁자와 결투 중에 죽고, 제자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절치부심한 주인공은 사부를 죽인 원수와 운명의 한 판 승부를 벌인다. 현란한 손놀림, 발놀림, 드디어 필, 살, 기. 모두 다 알다시피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하늘로 붕 떠올라 공중에서 한 합을 겨룬 후에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먼저 주인공이 털썩 무릎을 꿇는다. 원수의 얼굴이 천천히 클로스 업 된다. 그가 씨익 웃는데.....헉, 입에서, 피가! 그리고 반대편의 주인공이 서서히 힘겹게 일어난다. 주인공이 승리한 것이다. 

월트가 공중부양술을 터득하여 공연을 하고, 사부를 죽인 외삼촌 슬림에게 복수하는 순간까지 만을 놓고 보면, <공중곡예사>는 어렸을 적 숱하게 봐왔던 중국 무협 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다. 근데, 슬림은 죽었는데, 원수를 갚았는데, 끝날 때가 됐는데, 이 소설은 그 곳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월트는 슬림이 속했던 조직의 보스 밑으로 들어가고, '미스터 버티고'라는 술집을 차리고, 야구 선수 디지를 협박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고, 결혼하고, 늙고, 폐인이 되고...... 모든 무협 영화가 끝난 지점에서 이 소설은 다시 시작한다. 마치 무협영화의 지루한 후일담을 읽는 듯한 기분이다. 원수를 갚은 주인공은 하산하여 술집을 차리고, 속 깊은 옆집 아가씨와 결혼하고, 그들을 쏙 빼닮은 애들을 낳고, 아이들과 손자들과 함께 늙어가고...... 하지만 이런 후일담을 구구절절 얘기해주는 무협영화는 없다. 어떤 무협영화도 주인공이 원수를 갚은 후에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는지를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는다. 왜냐고?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주위사람들이 이 소설이 지루하다고 한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익히 알고 있던 무협 이야기의 종착역에서 다시 출발하는,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공중부양술의 영웅 월트의, 험난하면서도 초라한 인생후반부가 너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하지만 이 소설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보너스 트랙(?) 덕택에 <공중곡예사>는 '원더보이' 월트의 모험담이 아닌 '인간' 월트의 성장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변모한다. 아마도 작가가 이런 '변모'를 통해서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알려준, 비범한 일들 속에 존재하는 평범한 진리가 아닐까 싶다. 다른 소설 속에서 폴오스터가 보여줬던 것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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