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 슬라브 문학 1
까렐 차뻭 지음, 김희숙 옮김 / 길(도서출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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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꽤 지났지만 까렐 차뻭이 '로봇(R.U.R)'에서 보여 준 실험정신은 여전히 신선하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실험정신의 의미를 좀 자세히 살펴보면 형식면에서는 연극과 SF의 혁명적 만남을 주선한 것이고 내용면에서는 프랑켄슈타인 신화(神話)에 대한 현대적 논의의 불씨를 제공한 것이다.

감히 이 작품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의 역사적 가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나는 후자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왜냐하면 연극과 SF의 만남은 현재까지 그리 활발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 둘의 만남이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둘의 만남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일회성으로 그치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어 진행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프랑켄슈타인 신화(神話)와 관련된 논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 역시 단순히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정리해 버리기에는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비록 희곡 '로봇(R.U.R)'의 내용이 좀 구식이긴 하지만 작품 안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방식의 논의들은 이 후에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진행된 논의의 원형이라고 할만하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후에 나온 아시모프의 로봇시리즈를 비롯한 로봇과 관련된 수많은 작품들은 희곡 '로봇(R.U.R)'의 주제에 따른 변주곡이라 할 수 있다.

미래에 진행될 이러한 논의들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 작품의 구성 역시 순서대로 차근차근 주제를 진행시킨다. 서막에 나온 로숨(Rossum) 집안의 가족사는 초기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을 위해 탄생한 로봇 공장의 역사를 통해 기계문명이 가져 올 비인간화를 얘기한다. 1막과 2막은 로봇을 둘러싼 인간들의 동상이몽, 진화(進化)된 로봇들의 반란과 예견된 인류시대의 종말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막을 내렸다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프랑켄슈타인 신화(神話)를 보여준 평범한 희곡이라는 평가 이상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3막은 감정을 가진 로봇 헬레나와 쁘리무스가 등장하고 이들은 서로를 위해 희생을 자처한다. 이에 감동한 유일한 인간 알뀌스트는 생체실험(?) 대신 그들을 세상 속으로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마치 아담을 에덴으로 보낸 야훼처럼.

이 희곡의 각 막마다 제시된 주제만으로도 한 편의 작품을 쓸 수 있을 정도이다. 비록 작가는 이런 엄청난 비중의 주제를 한 편으로 엮는 대담함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작품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허술한 극 구조와 평면적인 인물배치라는 역효과를 낳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백년 가까이 지난 작품의 완성도를 이제 와서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로봇(R.U.R)'을 읽는 재미는 단순히 작품의 완성도를 넘어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매일 먹는 순대 국밥 집말고 원조 순대 국밥 집을 찾아가서 먹는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는지. 원조 로봇의 모습과 '로봇(R.U.R)'을 둘러 싼 논의들의 원형을 음미(吟味)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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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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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산울림 극장에서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부조리극이라는 말이 풍기듯 왠지 난해하고 알쏭달쏭한 말 투성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굉장히 유쾌하고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항상 그렇진 않지만 예상이 빗나가는 것이 가끔은 즐거울 때가 있다. 그런데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것 또한 과연 즐거운 일일까?

고전에 속한 희곡들이 대개 그렇듯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또한 대단한 인내 없이는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고전 중에 읽기 어려운 작품을 꼽으라면 첫 번째로 꼽히지 않을까 싶다. 혹시 대학에 막 입학하여 지성인이라는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이 책을 택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지루한 이야기의 전개나 인물의 장황한 대사 때문에 이런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요소를 갖고 있는 고전들은 수두룩하고 책을 읽겠다고 맘먹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감수를 하는 부분이다. 그런 작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것이 어려운 원인은 정작 다른 데 있다. 이 작품을 읽기 힘든 진짜 원인은 지루한 이야기라고 할 만한 이야기조차도 없다는 것이며 거기에 무의미한 대화가 이 작품의 난독(難讀)에 더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사실 이 작품의 위대함은 위의 질문에 대한 답 속에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내포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이전의 작가들이 쓴 작품들은-소설이나 희곡이나 뭐든 간에-처음과는 다른 어떤 결말을 향하여 이야기가 진행된다. 예를 들면 착한 인물이 결국에 가서 나쁜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어떤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무의미한 행위와 지리한 일상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고도를 기다리며' 속에는 '이야기'가 없다기 보다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형식'이 없다. 브레히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예술의 목적인 카타르시스를 부정하면서 이성의 예술이라는 혁명을 이룩했다면 베케트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방식을 부정함으로써 무의미의 혁명을 시도한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의미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그의 혁명적인 이야기 방식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인 셈이다.

마치 절대로 읽지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 같아 한마디 덧붙인다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것이 최악의 선택일 것이라는 것은 단지 내 개인적인 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은 언제든 빗나갈 가능성이 있다. 몇 년 전의 경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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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범우희곡선 1
아더 밀러 지음, 오화섭 옮김 / 범우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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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라면 너무 우아한 찬사이고, 마릴린 먼로의 연인이라면 너무 세속적인 느낌이 들지만 이러저러한 찬사들 모두가 아서밀러라는 작가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세일즈 맨의 죽음'은 '시련'과 함께 그를 미국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작품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혹은 풍미하고 있는 위대한 희곡 작품들중의 하나이다. 난 20세기의 사람들이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를 생각하면서 셰익스피어와 그의 비극들을 생각하는 것 처럼 한 23세기 쯤이 되면-사람들이 그 때까지 연극을 하고 있을 지는 미지수지만- 20세기를 생각하면서 아서 밀러와 그의 사실주의 비극들을 연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비극들 중에 첫번째는 단연코 '세일즈 맨의 죽음'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주의할 점이 있다. 대단한 감동이나 멋진 독백,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작품 속에는 셰익스피어가 그려 낸 극단적인 상황도, 섬뜩한 동기를 가진 인물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도 없다. 주인공인 윌리 로만은 평범하고 늙은 세일즈맨일 뿐이다. 그에겐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와 더 나은 노년을 위한 작은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대상도 질투하는 대상도 없다. 물론 그가 약간 이기적이며 자신과 아들의 친구를 시기하지만 그것 때문에 파멸에 이를 정도는 아니다.

동시대의 극작가들이 그려낸 인물들과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갖는 격정도 '에쿠우스'의 신비로움도 '아마데우스'의 우아함도 없다. 윌리 로만이 얻으려고 하는 것은 떠돌이 세일즈 맨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여 사무적인 일을 하며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것이다. 약간의 이기심과 소박한 꿈. 객지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천박한 애인이 있고 집에는 순진한 마누라가 있다. 두 아들은 장래가 보장되어 있지는 않지만 건강하다.

윌리 로만이 가지고 있는 이 모든 평범한 요소들은 현대인들이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세일즈 맨의 죽음'의 윌리 로만이 '햄릿'과 '블랑쉬'를 제치고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 이유 역시 바로 이 평범함 때문이다. 윌리 로만의 이러한 평범함은 고귀한 신분이나 비범한 주인공만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아서 밀러 이전의 고전극들의 선입관을 통쾌하게 뒤집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서 밀러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끝은 윌리의 죽음이 아니라 윌리의 장례식장이다.세일즈맨을 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윌리 로만의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가족들은 허탈해하고 절망한다. 비록 윌리 로만의 장례식장을 찾은 유일한 친구 '찰리'가 유족들에게 '그러나 아버지는 위대했다'라는 말로 위로하지만 여전히 장례식장은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아들인 비프와 해피 역시 미래의 희망을 얘기하지만 그들의 말은 공허하고 절망적인 메아리처럼 느껴지고 두 형제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희망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난해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말한 작품 의도는 고전극에 대한 도전이자 일종의 실험이라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지만 그의 말을 바꾸어 해석하면 평범한 현대인 모두 비극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생각처럼 현대인 누구나 윌리 로만처럼 벼랑 끝에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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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백 희곡전집 1 이강백 희곡전집 1
이강백 지음 / 평민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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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사에서 나온, 정확히 말하면 나오고 있는 이강백 희곡전집 시리즈는 희곡작가로서 그의 변모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작가 생활도 오래되었고 상을 받은 작품도 워낙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흥행작(?)을 꼽으라고 한다면 제19회 서울연극제 희곡상과 제4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영월행 기행'과 제 22회 서울 연극제 희곡상과 연출상등 5개 분야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 '느낌, 극락같은'을 들 수 있다.

이 두 작품 모두 후반기의 작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가 단막극을 쓰던 시절의 희곡들이 담겨 있는 1권이 더 정이 간다. 그의 말에 의하면 1권 속의 작품들이 골방의 작업실에 갇혀 있던 자신을 햇살 가득한 세상으로 나오게 한 작품들이란다. 그런 탓에 초기의 우화적인 작품들은 지하실의 습기 찬 골방처럼 어둡고 쓸쓸하다.

1권에 포함된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셋'과 '결혼'이다. '셋'은 장님인 두 아버지와 죽음을 담보로 한 서커스를 하는 아들이 주인공이다. 무차별적인 운명을 상징하는 두 아버지와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인간을 상징하는 아들. 결국 아들은 죽고 두 아버지는 또 다른 공연을 준비한다. 인간은 아무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인생이라는 것은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반복적인 공연이다. 작가가 파악한 인간사에 대한 이러한 통찰을 우화적으로 드러낸 이 작품은 한국 연극사에 길이 남을 부조리극이자 블랙유머이다.

1권의 맨 마지막 작품 '결혼'은 '덤'이라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게 된 가난뱅이 백수, 백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하인이 등장한다. 시간이라는 하인은 남자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가지만 사랑은 인생의 '덤'으로 주어진다. 결국 영원한 것은 '덤'으로 주어진 사랑이라는 작가의 소박한 결론이 희극적으로 그려진 '결혼'은 1권의 작품 중에서 가장 밝고 대중적인 작품이다.

언제부터였는 지는 모르지만 연극은 의욕은 있으나 돈 없는 대학생들과 연극을 위해 대책 없는 충성을 맹세한 일부 가난한 예술인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전업희곡 작가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미련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런 미련한 선택을 수 십 년 째 고집하며 창작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이강백이다. 여기다 한 마디 더 보태면 돈 안 되는 연극서적을 꾸준히 출판하고 있는 평민사의 뚝심 또한 작가의 그것만큼이나 대단하다. 이 책은 이 둘의 뚝심이 만들어 낸 첫 결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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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 - 범우희곡선 6 범우희곡선 6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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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사람들은 누구나 성장이라는 홍역을 치룬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가정과 사회가 요구하는 정신적, 육체적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신화를 거세당하게 된다. 신화는 사라지고 일상만 남는 것이다. 글머리치고는 좀 거창했지만 피터 셰퍼가 '에쿠우스'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신화가 거세된 일상이다.

연극이 생소한 일반인은 익숙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연극에 관심이 있었거나 젊은 날 연극을 만들어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작품이다. 그냥 '에쿠우스'라고 하지 않고 실험 극단의 간판 연극 (연우무대의 '한씨연대기'나 산울림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에쿠우스'라고 하면 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것으로 부족하다면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자.

작품 속의 주인공 '알런'을 맡았던 배우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 좀 더 접근하기 쉬울 지도 모르겠다. '쉬리', '취화선'으로 영화판의 흥행보증 수표로 떠오른 최민식과 영화 '나쁜 남자'와 드라마 '피아노'로 한층 주가를 올리고 있는 조재현이 이미 오래 전에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인 '알랭' 역으로 연기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한 걸까. 그래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이 작품을 읽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혹 약간의 관심이라도 생긴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말의 눈을 찌른 소년 알런과 그의 정신분석과 치료를 의뢰 받은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스릴러와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공식 같은 이야기 전개를 상상할 지도 모른다. 굳이 예를 들자면, 다이사트는 알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말들의 죽음과 관련된 거대한 음모를 밝혀낸다 또는 다이사트는 알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지만 사실은 알랭이 모두 저지른 것임이 맨 마지막에 드러난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예상했던 기막힌 반전도 추리를 하는 정신과 의사도 없다.

이 작품의 큰 줄기는 의사인 다이사트가 환자 알런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반복적인 꿈을 통해 다이사트는 자신의 일이 인간이 갖고 있는 신성함에 대한 욕망을 거세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신화의 거세를 거부한 알런을 과연 치료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물론 작가의 편에서 답을 말한다면 '아니오' 이다. 쓰다보니 '에쿠우스'가 굉장히 어려운 작품인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막상 읽으면 전혀 어렵지 않다. 모호한 주제를 재미있게 바꿔 놓는 피터 셰퍼의 탁월한 재능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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