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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 - 범우희곡선 6 ㅣ 범우희곡선 6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199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월이 가면 사람들은 누구나 성장이라는 홍역을 치룬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가정과 사회가 요구하는 정신적, 육체적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신화를 거세당하게 된다. 신화는 사라지고 일상만 남는 것이다. 글머리치고는 좀 거창했지만 피터 셰퍼가 '에쿠우스'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신화가 거세된 일상이다.
연극이 생소한 일반인은 익숙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연극에 관심이 있었거나 젊은 날 연극을 만들어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작품이다. 그냥 '에쿠우스'라고 하지 않고 실험 극단의 간판 연극 (연우무대의 '한씨연대기'나 산울림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에쿠우스'라고 하면 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것으로 부족하다면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자.
작품 속의 주인공 '알런'을 맡았던 배우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 좀 더 접근하기 쉬울 지도 모르겠다. '쉬리', '취화선'으로 영화판의 흥행보증 수표로 떠오른 최민식과 영화 '나쁜 남자'와 드라마 '피아노'로 한층 주가를 올리고 있는 조재현이 이미 오래 전에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인 '알랭' 역으로 연기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한 걸까. 그래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이 작품을 읽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혹 약간의 관심이라도 생긴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말의 눈을 찌른 소년 알런과 그의 정신분석과 치료를 의뢰 받은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스릴러와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공식 같은 이야기 전개를 상상할 지도 모른다. 굳이 예를 들자면, 다이사트는 알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말들의 죽음과 관련된 거대한 음모를 밝혀낸다 또는 다이사트는 알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지만 사실은 알랭이 모두 저지른 것임이 맨 마지막에 드러난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예상했던 기막힌 반전도 추리를 하는 정신과 의사도 없다.
이 작품의 큰 줄기는 의사인 다이사트가 환자 알런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반복적인 꿈을 통해 다이사트는 자신의 일이 인간이 갖고 있는 신성함에 대한 욕망을 거세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신화의 거세를 거부한 알런을 과연 치료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물론 작가의 편에서 답을 말한다면 '아니오' 이다. 쓰다보니 '에쿠우스'가 굉장히 어려운 작품인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막상 읽으면 전혀 어렵지 않다. 모호한 주제를 재미있게 바꿔 놓는 피터 셰퍼의 탁월한 재능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