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사드
페터 바이스 지음, 최병준 옮김 / 예니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마라, 사드, 브레히트, 피터 브룩, 이 들 모두가 이 작품 안에 들어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라/사드
페터 바이스 지음, 최병준 옮김 / 예니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이제는 좀 뜸 해졌지만, 사실 요즘 대학극단들이 무슨 연극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이 작품도 '한때 잘 나가던' 대학극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한때 잘나가던' 이라는 수식어가 괜한 거부감을 일으키긴 하지만 몇가지 예를 꼽아보면,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는 한국적인 브레히트 극이 가장 잘 형식화 된 극으로 80년대 대학가의 유명한 레파토리 였다. 이윤택의 <시민 k>도 80년대 중후반의 대학가를 주름잡던 연극 중의 하나였다. <마라/사드>는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비슷한 시기이리라, 여러 대학 극단에서 자주 공연한 연극중의 하나다. 

오히려 흔한 레파토리일 것 같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나 체홉의 사실주의 극들이 그리 자주 무대로 올려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너무 어려워서인가? 이건 적절한 이유가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훨씬 더 난해한 작품들이 무대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와 체홉의 작품들은 주제나 형식이 난해하기 보다는 그 작품의 깊이를 드러내기 어렵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뭘 말하려는 지는 알겠는데 이걸 우리같은 풋내기들이 할 수 있을까?, 정도의 고민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살핀다면, <마라/사드>는 왜 대학내에서 자주 공연되는 지 알 수 없는 연극중의 하나이다. 우선 대학생들이 접근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무겁고 어렵다. 게다가 좀 생소하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성적이면서 정치적인 내용들이다. 원제는 훨씬 더 길지만 약칭 제목인 <마라/사드>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마라와 사드의 대립이 이 연극의 주된 내용이다. 이 둘의 대립을 아주 단순화해서 정리하면, 욕망(사드)과 이성(마라)의 대립이면서 동시에 세계는 개선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인물(사드)과 세계를 개선하느라고 '피로'해진 인물(마라)의 대립이다. 이 둘의 세계관의 대립 주변에는 왕정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대립이 존재하고 이 들의 끊임없는 대립은 결국 마라를 피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세계를 개선하려는 꿈을 꾸었던 인물은 결국 목욕탕 속에서 살해된다.

<사드 씨의 지도하에 샤랑통 요양원의 연극반이 공연한 장 폴 마라에 대한 박해와 암살>, 이것이 이 연극의 원제이다. 이 엄청나게 긴 제목은 연극의 내용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연극의 형식적인 면을 드러낸다. 요양원의 환자들의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에 의한 연기는 브레히트 적인 방식이 연극에 도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워낙에 브레히트는 혁명의 도구로 '서사극'을 개발하였지만 이 연극에서는 '혁명의 불가능성'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아르토의 잔혹극적인 요소들과 브레히트의 서사극 기법들이 섞이면서 이 연극은 형식적으로도 복잡한 형태를 보인다. 이 작품이 대학생들이 공연하기에 그리 만만한 연극이 아니라는 두번째 근거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 작품을 연극화하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다. 희곡을 읽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마라/사드>를 읽는 것은 즐겁다. 시적인 대사와 변화무쌍한 형식들. 즐거운 이유는 많다. 다시 얘기할 것 없이 앞서 얘기했던 이 작품이 연극으로 올려지기 어려운 이유들이 고스란히 이 희곡을 읽는 재미가 된다. 사실 이 작품을 피터 브룩이 어떻게 무대화했을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극 클라시커 50 14
노르베르트 아벨스 지음, 인성기 옮김 / 해냄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연극. 이 책의 제목은 단도직입적이면서도 간단명료하다. 그래서 마음에 쏙 든다. 사실 책방을 떠돌아다니는 책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제목을 봐서는 도대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책들 말이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이 표방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너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연극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책 '연극'은 50개의 희곡 작품들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평을 보는 것이 따분한 일인 것처럼 보지 않은, 심지어 볼 수 없는 연극 평을 보는 것 역시 따분한 일임에 틀림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가 아닌 무려 오십 개의 연극 평을 보라고 한다면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책 '연극'을 읽는 일은 분명 무지무지하게 따분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이 책에 소개된 작품의 공연을 다 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넘어서 연극을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이 책은 정말 말 그대로 '딱'이다. 각각의 작품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저자의 평, 그리고 공연사진으로 구성된 각 장의 내용은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앞으로 보게 될 지도 모를 연극에 대한 정보가 되고 본 사람들에겐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사진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고 상대적으로 글이 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책방에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손에 잡히는 아무 희곡이나 읽어보는 것이 연례행사였던 연극반 시절을 떠올리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정말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이 책이 필요 없는 사람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어떤 사람들일까? 하나 하나 꼽아보자. 우선 그리스 비극이 뭔지 셰익스피어가 왜 위대한 극작가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 책은 필요가 없다. 두 번째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는 왜 혁명적인 발상인지 세일즈맨이 죽은 게 도대체 어쨌다는 건지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고도를 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지를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필요 없다. 뭘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느냐, 한마디로 연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 정도론 좀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인 '연극'은 단순히 극예술로서의 '연극'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50개의 희곡을 통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연극의 역사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류가 만들어 온 극(劇)예술의 역사이면서 근본적으로는 모든 허구적 이야기들의 역사이다. 진실이 아닌 거짓의 역사. 현실이 아닌 상상의 역사. 완벽한 외모의 클레오파트라가 아닌 조금 높거나 혹은 조금 낮은 코의 클레오파트라가 존재하는 역사. 논픽션의 역사가 아닌 픽션의 역사. 따라서 픽션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 좀 심하게 말하면 픽션이 논픽션을 압도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픽션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이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허구도 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문득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다'. 이 말은 곧 '픽션은 논픽션의 거울이다'라는 말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범우희곡선 5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1998년 3월
평점 :
품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야 별로 우습지도 않은 우스갯소리지만, 시쳇말로 썰렁한 개그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붕어빵 속에는 붕어가 없고, 칼국수에 칼이 없고, 곰탕에 곰이 없는 것처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작품 속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없다, 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단지 이것만을 확인하기 위해 애써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서점에서 슬쩍 앞 부분 몇 쪽만 읽으면 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작품의 맨 앞 부분에 나오니까.

농담처럼. 작품의 배경인 '극락' 거리를 지나는 전차의 이름이 바로 '욕망'이다. 굳이 한국말로 한다면 욕망호. 무궁화호, 통일호, 새마을호 같이 거룩한 이름을 제쳐두고 뜬금 없이 욕망호라니. 그것도 극락로(路)를 지나다니는 욕망호라. 종로를 지나는 1호선도 아니고, 충정로를 지나는 2호선도 아니고, 또 충무로를 지나는 3호선도 아니고 대학로를 지나는 4호선도 아니고, 극락로의 욕망호라니. 좀 우습다. 하지만 잊지 말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희곡 속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진짜'(?) 등장한다.

일 주일 전 일간지 문화면에는 브로드웨이의 새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소개하는 기사가 한 면 가득히 실렸다. 한국 연극은 자세히 소개 좀 안 해주나. 가서 볼 수도 없는 브로드웨이 극장에는 왠 지대한 관심? 궁시렁 궁시렁. 터무니없는 시기와 영양가 없는 불평불만이 뒤섞인 푸념을 하다가 절로 하! 하고 나오는 신음소리. 블랭취를 맡은 글렌 글로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싸늘함과 오싹함이라니. 대(大) 배우는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해도 기(氣)가 마구 뿜어져 나오나 보다.

사진만 슬쩍 봤는 대도 이렇게 가슴이 바싹 오그라들 것 같다니! 허무맹랑한 꿈. 이 연극을 직접 보고 싶다. 물론 불가능하다. 접자. 그 꿈을 접자마자 생각난 것은 다름 아닌 범우사 문고판의 표지였다. 왜냐하면 거기에선 젊은 말론 브란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스탠리 코왈스키. 더 할 나위 없이 멋진 악역. 이 보다 더 멋진 악역이 또 있을까. '베니스의 상인' 속의 비정한 샤일록보다, '오델로'의 간교한 이아고 보다 더 멋진 악역을 꼽으라면 난 단연코 스탠리 코왈스키를 꼽고 싶다. 블랭취와 스탠리.

결국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바닥에 내팽겨진 채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눈빛을 뿜어내는 블랭취와 야비함으로 똘똘 뭉친 스탠리 코왈스키로 요약된다. 난 여전히 매력적이다, 난 순수하다, 난 금욕적이다. 이런 수많은 거짓으로 치장된 '극락'의 거리에서 블랭취를 꺼낸 것은 순종적인 동생 스텔라의 애정도 아니고 어두운 조명 탓에 한 눈에 반해 버린 뜨내기 건달의 사랑도 아니다.

엉뚱하게도 그녀를 구출(?)해낸 건 스탠리였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탠리의 강간이다. 그로 인해 거짓과 현실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깨지고 이것은 블랭취를 화려한 '극락의 거리'가 아닌 비참한 '현실의 거리'로 원상복귀 시킨다. 그녀가 감추고 싶어했던 진실은-남편은 동성애자였고 그래서 자살했으며 그녀 자신도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와의 추문 때문에 극락의 거리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모두 백일하에 드러나고 블랭취는 이 모든 것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미쳐 버린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결론이 '극락로'의 '욕망호'에 모두 들어있다고 말하면 너무 억진가? 작가의 의도를 얼기설기 끼워 맞춰보면 대충 이렇다. 블랭취에겐 극락의 거리가 진짜 극락의 거리였던 것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그런 극락 말이다. 하지만 블랭취를 이 거리로 데려온 것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농담같은 대사는 그것이 한낱 블랭취 개인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것을 의미한다. 현실은 반드시 그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스탠리 코왈스키 행했던 강간처럼, 아주 야비한 방법을 통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호프 희곡 전집 1 - 단막극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이주영 옮김 / 연극과인간 / 200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체홉의 희곡을 읽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바냐 아저씨도, 벚꽃 동산도, 갈매기도, 세자매도 그 어떤 작품도. 따라서 체홉이 쓴 희곡은 내게는 세상에 없는 작품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체홉에 대한 선입견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몇 가지 말해 보자면, 체홉을 읽는 것은 굉장히 지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쓸데없이 길고 그에 비해 구성은 초라하고 단순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등장인물들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고 하나같이 모두 수다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들은 정확히 말하면 선입견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그의 작품들의 특징이다. 길이가 짧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체홉의 단막극들도 이런 선입견, 아니 특징들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물론 그의 작품의 이런 특징들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작품을 직접 읽고 나면 이 모든 선입견들은 사실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아무리 요즘에 상연되는 연극들이 말보다는 움직임, 내적인 긴장보다는 외형적인 볼거리를 강조한다고 하지만 결국 '희곡', 넓게 보면 '극'이라는 형식에서 더 중요한 것은, 움직임을 통한 외형적 볼거리보다는 말과 침묵을 통해 그려지는 인물, 그리고 그 인물들이 갈등이 빚어내는 내적인 긴장이다. 체홉은 대가답게 단막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러한 단순한 진리를 아주 단순한 구성에 담아 보여준다.

희곡을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체홉이 쓴 단편 소설들처럼 그의 단막극도 단순한 구성과 인물 배치를 통해 극적인 완결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체홉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장기-희극적인 캐릭터를 통해 일상적 비극의 단면을 보여주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준다. 곰, 청혼, 백조의 노래 같은 작품들은 몇 번을 읽어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연극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좋은 단막극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실 간단한 연극 하나 만들려고 단막극 대본을 찾다보면 너무 작품의 폭이 좁아 고민하게 된다. 왜냐하면 단막극이라는 형식은 신춘문예나 부조리극 작가들의 희곡집, 사실 둘 모두 부조리한 경향이 있다, 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출판된 희곡집에서는 그리 흔한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간 엉뚱한 결론. 책이 집으로 배달 된 다음에 냄새를 맡아보았다. 웬 냄새? 혹시 책을 먹기라도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냥 버릇이다. 책의 냄새를 맡아보면 이게 잘 팔리는 책인지 잘 안 팔리는 책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잘 팔리는 책들은 막 자른 나무에서 나는 향긋한 종이 냄새가 난다. 하지만 잘 안 팔리는 책들, 다시 말하면 곧 절판될 것 같은 책들은 어제 벗어 논 양말에서 나는, 고린내 비슷한 냄새가 난다. 아마도 창고에 오래 쌓여 있으면 서 밴 습기 때문에 나는 냄새인 것 같다. 이 책에서는 후자의 냄새가 난다. 물론 체홉의 단막극이 케케묵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또 이 책의 고린내가 약간 마음에 걸리지만 이 책의 내용만은 신선하다, 오늘 아침 아줌마가 배달해 준 우유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