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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ㅣ 클라시커 50 14
노르베르트 아벨스 지음, 인성기 옮김 / 해냄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연극. 이 책의 제목은 단도직입적이면서도 간단명료하다. 그래서 마음에 쏙 든다. 사실 책방을 떠돌아다니는 책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제목을 봐서는 도대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책들 말이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이 표방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너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연극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책 '연극'은 50개의 희곡 작품들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평을 보는 것이 따분한 일인 것처럼 보지 않은, 심지어 볼 수 없는 연극 평을 보는 것 역시 따분한 일임에 틀림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가 아닌 무려 오십 개의 연극 평을 보라고 한다면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책 '연극'을 읽는 일은 분명 무지무지하게 따분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이 책에 소개된 작품의 공연을 다 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넘어서 연극을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이 책은 정말 말 그대로 '딱'이다. 각각의 작품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저자의 평, 그리고 공연사진으로 구성된 각 장의 내용은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앞으로 보게 될 지도 모를 연극에 대한 정보가 되고 본 사람들에겐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사진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고 상대적으로 글이 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책방에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손에 잡히는 아무 희곡이나 읽어보는 것이 연례행사였던 연극반 시절을 떠올리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정말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이 책이 필요 없는 사람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어떤 사람들일까? 하나 하나 꼽아보자. 우선 그리스 비극이 뭔지 셰익스피어가 왜 위대한 극작가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 책은 필요가 없다. 두 번째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는 왜 혁명적인 발상인지 세일즈맨이 죽은 게 도대체 어쨌다는 건지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고도를 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지를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필요 없다. 뭘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느냐, 한마디로 연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 정도론 좀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인 '연극'은 단순히 극예술로서의 '연극'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50개의 희곡을 통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연극의 역사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류가 만들어 온 극(劇)예술의 역사이면서 근본적으로는 모든 허구적 이야기들의 역사이다. 진실이 아닌 거짓의 역사. 현실이 아닌 상상의 역사. 완벽한 외모의 클레오파트라가 아닌 조금 높거나 혹은 조금 낮은 코의 클레오파트라가 존재하는 역사. 논픽션의 역사가 아닌 픽션의 역사. 따라서 픽션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 좀 심하게 말하면 픽션이 논픽션을 압도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픽션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이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허구도 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문득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다'. 이 말은 곧 '픽션은 논픽션의 거울이다'라는 말도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