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희곡 전집 1 - 단막극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이주영 옮김 / 연극과인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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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체홉의 희곡을 읽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바냐 아저씨도, 벚꽃 동산도, 갈매기도, 세자매도 그 어떤 작품도. 따라서 체홉이 쓴 희곡은 내게는 세상에 없는 작품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체홉에 대한 선입견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몇 가지 말해 보자면, 체홉을 읽는 것은 굉장히 지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쓸데없이 길고 그에 비해 구성은 초라하고 단순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등장인물들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고 하나같이 모두 수다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들은 정확히 말하면 선입견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그의 작품들의 특징이다. 길이가 짧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체홉의 단막극들도 이런 선입견, 아니 특징들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물론 그의 작품의 이런 특징들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작품을 직접 읽고 나면 이 모든 선입견들은 사실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아무리 요즘에 상연되는 연극들이 말보다는 움직임, 내적인 긴장보다는 외형적인 볼거리를 강조한다고 하지만 결국 '희곡', 넓게 보면 '극'이라는 형식에서 더 중요한 것은, 움직임을 통한 외형적 볼거리보다는 말과 침묵을 통해 그려지는 인물, 그리고 그 인물들이 갈등이 빚어내는 내적인 긴장이다. 체홉은 대가답게 단막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러한 단순한 진리를 아주 단순한 구성에 담아 보여준다.

희곡을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체홉이 쓴 단편 소설들처럼 그의 단막극도 단순한 구성과 인물 배치를 통해 극적인 완결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체홉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장기-희극적인 캐릭터를 통해 일상적 비극의 단면을 보여주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준다. 곰, 청혼, 백조의 노래 같은 작품들은 몇 번을 읽어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연극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좋은 단막극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실 간단한 연극 하나 만들려고 단막극 대본을 찾다보면 너무 작품의 폭이 좁아 고민하게 된다. 왜냐하면 단막극이라는 형식은 신춘문예나 부조리극 작가들의 희곡집, 사실 둘 모두 부조리한 경향이 있다, 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출판된 희곡집에서는 그리 흔한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간 엉뚱한 결론. 책이 집으로 배달 된 다음에 냄새를 맡아보았다. 웬 냄새? 혹시 책을 먹기라도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냥 버릇이다. 책의 냄새를 맡아보면 이게 잘 팔리는 책인지 잘 안 팔리는 책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잘 팔리는 책들은 막 자른 나무에서 나는 향긋한 종이 냄새가 난다. 하지만 잘 안 팔리는 책들, 다시 말하면 곧 절판될 것 같은 책들은 어제 벗어 논 양말에서 나는, 고린내 비슷한 냄새가 난다. 아마도 창고에 오래 쌓여 있으면 서 밴 습기 때문에 나는 냄새인 것 같다. 이 책에서는 후자의 냄새가 난다. 물론 체홉의 단막극이 케케묵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또 이 책의 고린내가 약간 마음에 걸리지만 이 책의 내용만은 신선하다, 오늘 아침 아줌마가 배달해 준 우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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