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범우희곡선 5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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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 작품을 읽은 독자들에게야 별로 우습지도 않은 우스갯소리지만, 시쳇말로 썰렁한 개그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붕어빵 속에는 붕어가 없고, 칼국수에 칼이 없고, 곰탕에 곰이 없는 것처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작품 속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없다, 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단지 이것만을 확인하기 위해 애써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서점에서 슬쩍 앞 부분 몇 쪽만 읽으면 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작품의 맨 앞 부분에 나오니까.

농담처럼. 작품의 배경인 '극락' 거리를 지나는 전차의 이름이 바로 '욕망'이다. 굳이 한국말로 한다면 욕망호. 무궁화호, 통일호, 새마을호 같이 거룩한 이름을 제쳐두고 뜬금 없이 욕망호라니. 그것도 극락로(路)를 지나다니는 욕망호라. 종로를 지나는 1호선도 아니고, 충정로를 지나는 2호선도 아니고, 또 충무로를 지나는 3호선도 아니고 대학로를 지나는 4호선도 아니고, 극락로의 욕망호라니. 좀 우습다. 하지만 잊지 말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희곡 속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진짜'(?) 등장한다.

일 주일 전 일간지 문화면에는 브로드웨이의 새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소개하는 기사가 한 면 가득히 실렸다. 한국 연극은 자세히 소개 좀 안 해주나. 가서 볼 수도 없는 브로드웨이 극장에는 왠 지대한 관심? 궁시렁 궁시렁. 터무니없는 시기와 영양가 없는 불평불만이 뒤섞인 푸념을 하다가 절로 하! 하고 나오는 신음소리. 블랭취를 맡은 글렌 글로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싸늘함과 오싹함이라니. 대(大) 배우는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해도 기(氣)가 마구 뿜어져 나오나 보다.

사진만 슬쩍 봤는 대도 이렇게 가슴이 바싹 오그라들 것 같다니! 허무맹랑한 꿈. 이 연극을 직접 보고 싶다. 물론 불가능하다. 접자. 그 꿈을 접자마자 생각난 것은 다름 아닌 범우사 문고판의 표지였다. 왜냐하면 거기에선 젊은 말론 브란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스탠리 코왈스키. 더 할 나위 없이 멋진 악역. 이 보다 더 멋진 악역이 또 있을까. '베니스의 상인' 속의 비정한 샤일록보다, '오델로'의 간교한 이아고 보다 더 멋진 악역을 꼽으라면 난 단연코 스탠리 코왈스키를 꼽고 싶다. 블랭취와 스탠리.

결국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바닥에 내팽겨진 채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눈빛을 뿜어내는 블랭취와 야비함으로 똘똘 뭉친 스탠리 코왈스키로 요약된다. 난 여전히 매력적이다, 난 순수하다, 난 금욕적이다. 이런 수많은 거짓으로 치장된 '극락'의 거리에서 블랭취를 꺼낸 것은 순종적인 동생 스텔라의 애정도 아니고 어두운 조명 탓에 한 눈에 반해 버린 뜨내기 건달의 사랑도 아니다.

엉뚱하게도 그녀를 구출(?)해낸 건 스탠리였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탠리의 강간이다. 그로 인해 거짓과 현실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깨지고 이것은 블랭취를 화려한 '극락의 거리'가 아닌 비참한 '현실의 거리'로 원상복귀 시킨다. 그녀가 감추고 싶어했던 진실은-남편은 동성애자였고 그래서 자살했으며 그녀 자신도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와의 추문 때문에 극락의 거리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모두 백일하에 드러나고 블랭취는 이 모든 것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미쳐 버린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결론이 '극락로'의 '욕망호'에 모두 들어있다고 말하면 너무 억진가? 작가의 의도를 얼기설기 끼워 맞춰보면 대충 이렇다. 블랭취에겐 극락의 거리가 진짜 극락의 거리였던 것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그런 극락 말이다. 하지만 블랭취를 이 거리로 데려온 것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농담같은 대사는 그것이 한낱 블랭취 개인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것을 의미한다. 현실은 반드시 그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스탠리 코왈스키 행했던 강간처럼, 아주 야비한 방법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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