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치명적이고 치기어린 상상

5장에서는 영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화 별로 안 보는 나에게도 꽤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다.

특히 <위험한 정사>가 이 지경(?)이 된 과정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 영화를 안 본 것 같지만 안 봐도 알 것 같은 내용인데, 처음 작가가 썼을 때는 "바람 핀 남성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것! 그러나 이 인간 저 인간 간섭하고 뜯어 고치며 결국 개봉한 내용은 180도 뒤바뀌었다. '바람 핀 남성'의 윤리적 책임 같은 건 온데간데 없고, '유부남을 꼬신 꽃뱀'의 처참한 말로와 가정을 지켜낸 승리만이 남았다. 남자의 아내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순종적 여성상이 되고(원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캐릭터였다고), 먼저 유혹을 한 것도 여자 쪽이 되며(원래는 남자가 파티에서 받은 여자의 번호가 적인 수첩을 찾아 전화를 거는 거였다고), 유혹한 싱글 여성은 완전 미친년이 되고, 그 말로는 부부에게 살해당하는 것(원래는 혼자 집에서 자살하는 거였다고). 영화 개봉 당시 관객들 중 남자들은 흥분하여 제발 저 나쁜 년을 죽여 버리라고 외쳐 대고, 여자들은 침묵했다는, 1980년대 영화가 추구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풍경까지. 



인용문


1970년대 여성 영화에 열광한 여성들은 남자 품귀 현상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30세를 넘긴 싱글 여성들이 아니라 복종과 억압, 고되고 단조로운 일상과 멸시에 살짝 맛이 간 교외의 주부들이었다. - 214

1970년대 여성 영화에서 분석의 대상은 여성이 아니라 미국의 결혼이었고, 대화는 전통적인 결혼 관계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헤집는다. ˝나 같은 여자는 두 배 더 열심히 일하지. 그래서 얻는 게 뭔지 알아? (업 더 샌드박스)에서 주부 마거릿으로 나오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는 역사학 교수인 남편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임신선과 정맥류라고. 당신은 한 가지 일을 하지만 난 아흔일곱 가지 일을 해. 어쩌면 난 〈타임> 표지에 실려야 할 사람이야. 올해의 걸레질 선수! 세탁실의 여왕! 팅커토이 전문가!˝   - 215

1980년대 미국 영화 산업은 독립적인 여성을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으로 묘사하고, 쾌락을 좇는다는 이유로 이들을 처벌하지 않는 영화 프로젝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싫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위험한 정사> 직후 개봉된 <패티 록스 Patti Rocks>(1988)를 제작한 그웬 필드Gwen Fiald 의 경험은 1980년대에 이런 주제에 대한 할리우드의 적개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척도라 할 수 있다. 필드의 영화에서 자기주장이 강한 한 싱글 여성은 결혼을 피하고(˝결혼하면 살찐단 말야˝ 하고 그녀는 농담을 한다), 성관계를 즐기고, 흔자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선택을 하지만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그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패티 록스>는 비평가들로부터는 상당한 호평을 받았지만 할리우드의 수호자들로부터는 반감과 거부감 말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필드는 영화사들로부터 차례차례 외면당했는데, 매번 이유는 같았다. 이들은 영화가 아무하고나 즐기는 성관계에 탐닉하는 싱글 여성을 보여 주기 때문에 메시지가 ‘무책임‘하다고 그녀에게 말했다(발정난 총각들이 아무데나 씨를 뿌리고 다니는< 세 남자와 아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같은 도덕적인 우려를 표출하지 않았다). - 229

1980년대 말 이런 류의 많은 영화에서 남성과 여성은 사태를 매듭짓기 위해 더 이상 끝까지 노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똑같은 영화에서 함께 어울리지도 않는다. 반격 성향의 1950년대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여성들은 결국 스크린에서 밀려남으로써 침묵당한다. 1980년대 말에 만개한 터프가이 영화에서 남성 주인공은 남자밖에 없는 전쟁 지역과 황량한 서부로 향한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전쟁 영화와 액션 영화의 폭력 수위가 올라가면서 (<프레데터>, <다이하드>, <다이하드 2>, 〈로보캅>, <로보캅 2>, 〈리쎌 웨폰>, <폭풍의 질주>, <토탈리콜〉) 여성들은 말없고 부차적인 캐릭터로 축소되거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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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8-23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장에도 영화 ‘위험한 정사‘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나오는데 저는 둘 다 봤거든요
해리~~는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다시 봐야 할 것 같고
위험한 정사는 마이클 더글러스가 유부남이었다는 게 문제였죠~~
5장에서 어떻게 서술되어 있을지 궁금해요.

건수하 2023-08-23 21:07   좋아요 3 | URL
해리~ 를 어릴때 봤을 때 멕 라이언이 ㅇㄹㄱㅈ 연기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2장에 나왔던 건… 그사 기억이 안 나네요?;;;

독서괭 2023-08-23 21:17   좋아요 1 | URL
저 해리는 봤을 것 같은데 정말 기억이 안 나요 ㅋㅋ 맥라이언 영화 한때 많이 봤는데..^^
저도 2장에 해리가 나왔던가 기억이 안 납니더 ㅋㅋㅋ

미미 2023-08-23 1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나마 <에일리언>같은 영화는 여성이 다 쓸어버리니 뭔가 통쾌했는데 시리즈 전체로 보면 진짜 힘은 역시 남성사회에 있더군요. 한참 앞서 나가고 계신 괭님 파이팅입니다.^^
저는 슬금슬금 거북이처럼, 그러나 흥미진진해서 잘 읽고 있어용.ㅎㅎㅎ
괭님 백래시 관련해서 쓰신 글들 다 너무 좋아요!

독서괭 2023-08-23 21:18   좋아요 1 | URL
전 그 유명한 에일리언도 안 봤네요^^;;; 시리즈 전체로 보면 느낌이 다르군요? 쩝…
워낙 두껍다 보니 다 잊어먹을 것 같아서 한장 읽을 때마다 정리중입니다. 대충이나마^^ 감사해요 미미님, 미미님도 꾸준히 끝까지!

미미 2023-08-23 21:47   좋아요 0 | URL
음음 괭님! 제가 잠시 나갔다가 들어오며 좀더 생각해보니 함께 읽은<여성괴물>도 떠오르고 에일리언은 (본래 만든 목적이 어떻건)기존의 통념을 깨는 측면이 더 강하네요. 정정합니다ㅋㅋㅋㅋ

다락방 2023-08-23 19: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킴 베이싱어 주연 나인하프 위크 부분 읽고 분노의 페이퍼 썼던 기억이 나네요. 위험한 정사는 백래시 읽다 보려고 다운 받고 보진 못했네요. 여자가 유혹했어도 어차피 남자가 아내 두고 바람핀 건 사실인데 가정 지킴 운운하다니. 아 짜증나..

건수하 2023-08-23 21:04   좋아요 1 | URL
게다가 부인이 죽이는 결말도 싫더라구요!

독서괭 2023-08-23 21:20   좋아요 1 | URL
분노의 페이퍼 찾아봐야겠네요 ㅋㅋㅋ 저 옛날에 나인하프위크 봤었는데.. 그나마 기어다니며 돈 줍는 거 시킨 후에는 여자가 떠나죠? 그것도 결말을 요상하게 바꾸려고 했었다니 거참…

잠자냥 2023-08-23 22:47   좋아요 2 | URL
이 책 읽으니 킴 베이싱어 불쌍… ㅠㅠ 요새 같으면 폭로해서 그 감독 묻어버렸을 텐데!!

건수하 2023-08-23 22:48   좋아요 1 | URL
킴 베이싱어 LA 컨피덴셜에서도 불쌍했는데 ㅠㅠ

건수하 2023-08-23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어제 오늘 5장 듣고 다시 또 들으며 열받았습니다…. 😤

독서괭 2023-08-23 21:21   좋아요 1 | URL
부인이 죽이는 결말이 딱~ 가정을 복구하는 건가봐요 그자들 생각에는? ㅋㅋㅋㅋ 6장에는 tv시리즈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수하님 고고!!

건수하 2023-08-23 23:41   좋아요 1 | URL
그니깐 지가 잘못해놓고 복구는 왜 부인이 하냔 말이죠 진짜 무책임함…

잠자냥 2023-08-23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를 많이 봤어서 그런지 이 장하고 광고 다룬 장(특히 게스 청바지 18놈들 -.-)이 흥미롭더군요…..

건수하 2023-08-23 23:41   좋아요 1 | URL
아 그 모델 생각나네요 ㅜㅜ 안나 니콜 스미스… 집사2가 좋아하는 -_-

독서괭 2023-08-27 08:22   좋아요 0 | URL
역시 잠자냥님, 영화 부분 아시는 게 많았을 듯요! 게스 청바지 18놈들 아직 못 읽었는데 궁금하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3-08-27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를 거의 안 봐서 그런지ㅋㅋㅋㅋ 이 책 읽을 때 영화랑 감독, 배우이름 나올 때 좀 멀게 느껴지기는 했습니다. 가끔 검색해 보기는 했지만 계속 나옴 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 보면서 아~~ 하고 있어요. 백래시 같이 읽으시니 이런 점도 좋네요!!

독서괭 2023-08-27 08:24   좋아요 0 | URL
저도요.. 통 몰라서 ㅋㅋ 다음 장 드라마는 더 모르겠는데 그래도 꽤 재밌더라구요. 미국상람들은 훨 재밌게 읽었겠지요? 여성주의책읽기 모임에서 이 책 예전에 같이 읽으신거죠?

단발머리 2023-08-27 08:51   좋아요 0 | URL
네~~~ 무려 첫번째 책이었습니다^^ 쪽수 계산하며 헉헉대며 읽었던 기억이 어제 같네요 (2018년) ㅋㅋㅋㅋ 독서괭님이 반장이신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도 항상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