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이 태어나던 해에 나는 UPS 배달부에게 적절치 못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를 유혹하려 했다는 뜻은 아니다(분유 얼룩이 묻은 티셔츠 차림으로 누군가를 유혹하기란 쉽지 않다). 그가 물건을 배달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그를 붙잡아두려 했을 뿐이다. 나는 어른 대화 상대가 너무 절실했다. 내가 날씨나 뉴스, 심지어 택배의 무게를 들먹이며 대화를 시도하면 배달부는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그머니랄 것도 없이 트럭으로 꽁무니를 뺐다.
당시에 나는 집에서 글을 썼고, 그 말인즉슨 하루 종일 분유를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거나 아무튼 사랑스럽기는 해도 손이 많이 가고 빽뺵 울어대는 재주가 탁월한 4.5킬로그램의 인간을 돌보지 않을 때면, 파자마 차림으로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있었다는 뜻이다. - 240쪽
방송국에서 드라마 만드는 일을 하다가, 취재를 위해 찾아간 응급실에 매료된 후 의대에 진학했으나, 저널리즘에 뜻을 품고 레지턴트 과정을 밟지 않은 저자는, 정자은행에서 구매한(!) 정자로 수정에 성공하여 아이를 갖는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 어른과의 대화가 절실했던 저자가 택배 배달원을 붙잡고 자꾸 말을 걸려했던 일화에 웃음이 난다. 휴직하고 아이를 돌보던 그때, 주말에는 남편과 대화가 가능했음에도 어른의 대화가 그리웠는데, 혼자서 아이를 키우던 저자의 마음은 더 절박했으리라. 많은 여성들이 '독박육아'라면서 한숨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때로는 혼자서 아이 한명을 돌보는 일이, 둘이서 아이 두 명을 돌보는 일보다 힘들게 느껴진다. 힘듦을 알아주고 서로 하소연을 하고, 어른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 또 아이를 맡겨놓고 편안히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것, 그건 사소하지 않다.
그렇게 우스운 일화로 보였던 배달원과의 대화시도는 뜻밖에 감동적인 드라마가 된다. 집에서 혼자 글쓰며 아이 돌보는 외로운 생활을 하다보니 본래 사람에 가까이 다가가길 원했던 저자는 정신과 전문의 과정을 그만둔 것을 후회하며 대학 학장님에게 전화를 건다. 학장님은 그녀의 삶을 바꿔준 조언을 한다. 너의 능력과 관심사를 잘 섞어놓은 일, 그것은 바로 임상 심리학이라고! 그길로 저자는 심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다.
이 대화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부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 대학원 수학 능력 시험인 GRE를 봤다. 현지 대학원에 원서를 넣고, 이후 몇 년 동안 공부해서 학위를 땄다. 그러는 동안에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공유하기 위해 계속 글을 썼고, 내 삶이 바뀐 것처럼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도록 돕는 법을 배웠다.
그 사이에 내 아들은 말을 하더니 걷기 시작했고, UPS 배달부가 전해주는 물건도 차츰 기저귀에서 레고로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을 앞뒀을 때 그 소식을 UPS 배달부에게 말했다.
그가 트럭으로 슬그머니 내빼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는 대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나를 안아주었다.
(...)
담당 UPS 배달부와 포옹을 하고 있는 내 심정은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그는 자신도 전할 소식이 있다고 했다. 더 이상 이 지역을 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도 나처럼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집세를 아끼기 위해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그곳은 여기서 몇 시간 거리였다. 그는 인테리어 전문가가 되고 싶어 했다.
"당신이야말로 축하를 받아야겠네요!" 이번에는 내가 그를 안아주었다. "저도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 242, 243쪽
아이 키우면서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는 저자의 모습이 대단하고, 사무적인 관계일 뿐이었던 UPS(찾아보니 UNITED PARCEL SERVICE INCORPORATED의 약자인 모양) 배달원과 감정적 유대가 생기는 장면은 아름답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택배 서비스를 생각해보면 씁쓸한데, 하나라도 빨리 배달을 끝내야 하는 배달원들은 잡담 따위 나눌 시간이 없고, 배달원으로 속여 집에 들어오려는 범죄자를 두려워하는 소비자들은 문앞에 두고 갈 것을 요청한다. 새벽배송은 언제 왔다 갔는지 알지도 못한다. 옛날에는 배달원에게 드릴 병음료를 사놨다가 건네드리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어렵다. 이런 드라마는 우리 삶에서 발생할 수 없게 되었다. 범죄드라마라면 모를까..
다락방님의 키오스크에 관한 글을 읽으니, 세상이 참 팍팍해져 간다는, 수십 년 전부터 어르신들이 중얼거리듯 말했던 그 익숙한 말이 새삼 떠오른다. 편리함이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전 출근길을 걷는데, 뭔가가 위에서 아래로, 바로 내 눈앞을 스쳐 툭 떨어졌다. 열매 같은 건가, 내려다보니 아주 작은 새였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바로 이책, <침묵의 봄> 표지. 딱 이거.
새는 발을 살짝 떠는 듯 하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새를 건드려봤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죽은 듯했다. 인도 한가운데라 사람들에게 밟힐 것 같아서, 살며시 주워들어 옆으로 옮겨 두었다. 내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의 작은 새였다.
대체 왜 죽었을까? 추락사를 할 만큼 날지 못할 어린 새는 아닌 것 같고 원래 크기가 작은 새인 것 같은데. 병에 걸렸나. 뜬금없이 닥친 새의 죽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슬퍼할 만큼 촉촉한 감수성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어쩐지 인간 때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매일 자동차전용도로를 달리다보니 길가에 쓰러져 있는 동물 사체들도 종종 스치듯 목격하곤 하는데, 그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가장 내 마음을 슬프게 했던 도로 위 장면은 트럭 짐칸 가득 설치된 철조망 상자에 갇힌 채 부리들만 살짝 내밀고 짹짹대며 어디론가 실려가던 수많은 병아리들이었다. 고개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할 것 같은 그 어린 것들의 모습은 비참했고, 닭과 달걀을 비롯한 각종 육류를 매일매일 소비하며 살고 있는 인간은 부끄러웠다. 그날 저녁에도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일 내 모습이. 너희들의 생명 뿐 아니라 온 삶을 착취하여 내 아이들을 살찌우고 있구나.
이 죄는, 미친듯한 폭우와 폭염의 이 기후변화에 의해 전 지구인이 받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래의 지구 환경은 또 우리 아이들이 지고 가야 할 짐이 되겠지..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잔물결이 일듯이, 유독물질의 연쇄 작용을 일으켜 죽음의 물결을 퍼뜨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쪽 접시에는 딱정벌레들이 갉아먹은 나뭇잎을 올려놓고, 다른 쪽 접시에는 유독성 살충제가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몽둥이에 스러져간 새들의 잔해와 다양한 빛깔의 가련한 깃털들을 올려놓은 채 저울질한 사람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들의 부드러운 날개가 모두 사라져버린 황폐한 세상이 되더라도 벌레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설령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가 결정을 내릴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우리가 잠시 권력을 맡긴 관리들이다. 이들은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가 깊고도 엄연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 소홀한 틈을 타 위험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 <침묵의 봄>, 153~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