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에서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몇차례의 유산은 물론, 출산을 하고도 몇달만에 아기가 병치레로 죽는 경험을 거친 후 선자를 가진다. 선자는 결혼할 수 없는 상대와의 관계에서 임신하여 노아를 낳지만, 둘째 모자수를 갖기 전 그도 여러 차례 유산을 겪는다. 모자수의 아내 유미도 몇 번의 유산 끝에 솔로몬을 무사히 낳는다. 모자수가 사별 후 사귄 여자 에쓰코의 딸 하나는 임신을 한 채 엄마에게 찾아온다. 

임신은 여성들의 삶에 찾아오는 거대한 습격이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원했지만 낳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든, 임신이 이루어지는 순간 여성의 몸은 결정권을 잃는다. 콩알만한 수정란이, 아직 인간의 형체가 전혀 나타나지도 않은 배아가 여성을 지배한다. 소중한 생명을 품은 자궁. 그속의 콩알을 위해 모든 욕구를 참아가며 몸을 보존해야만 하는 지엄한 명령. 


파리바게뜨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관련기사: “아파도 못 쉬고 유산까지… 여성 노동자 보호하라”

링크☞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3567


여성 직장인의 연간 유산율이 23%라는 것도 놀랍고,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들의 연간 유산율이 50%에 이른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직장 다니며 임신해서 유산 없이 두 아이를 낳은 나는 무척 운이 좋았던 것이다. 

임신한 여성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해주지 않는 직장에서 여성이 자연유산을 할 때, 누구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민사상 손해배상은 어렵게 인정이 될지 모르지만, 사업주에게 태아의 생명을 해친 죄를 묻지는 않는다. 하지만 똑같이 태아가 생명을 잃는 결과가 일어났음에도 그것이 여성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경우에는 그를 처벌하겠다는 것이 낙태죄다. 

위 기사에서 나오듯이 여성 직장인의 연간 유산율이 23%이고, 심지어 40대 이상 임신부의 자연유산율은 50.5%(세계일보 2015. 2. 3.자 기사, "40대이상 임산부 2명 중 1명 자연유산, 전연령 유산율 22.1%")라는데, 무리해서 일하다가 자연유산하면 면죄되고 출산 후 양육이 어려워서 임신중지를 선택하면 처벌되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100년이 지난 양진의, 선자의 이야기는 유미를, 하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그 시절에 비하면 유산율은 낮아졌을 테지만,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 부재라는 근본적 문제는 똑같다.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의학적 기술이 발전하고, 난임시술 후 선택적 유산이 합법적으로 행해지고, 나이나 환경으로 인해 취약한 계층 여성들이 이도저도 못하다가 결국 출산한 후 영아살해/유기에 빈번히 이르러도(영아살해 2달에 1번, 영아유기 1달이 10번꼴로 발생한다는 관련기사: https://view.asiae.co.kr/article/2022051910450657235), 낙태한 여성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형벌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게 성교할 거라고 본다(심지어 위헌소원에서 법무부 변론 내용 중에도 비슷한 취지가 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6023.html). 나는 그 주장의 저변에는 여성을 '이성적이지 못한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여성혐오가 깊이 깔려 있다고 여긴다. 가부장적으로 통제하는 국가가 없다면 여성은 무분별하게 성교하고 쉽게 낙태할 거라는 생각. 거기에는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결정하고 꾸려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도, '무분별한 성교'의 대상이 될 남성의 모습도 삭제되어 있다. 


낙태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결코 생명중시의 정언명령이 아니다. 그건 가부장제의 결과물이다. 만일 가모장제 사회였다면, 법은 여성의 낙태를 허용하고 여성을 임신시켜 낙태에 이르게 한 남성을 처벌했을 것이다. 그렇게 처벌하지 않으면 남성들이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게' 성교해서 여성을 임신시킬 테니까. 

낙태죄의 완전하고 종국적인 폐지와 안전한 임신중단의 권리가 보장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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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5-30 19: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관련해 미국에서 만든 다큐를 조금봤는데 미국에서 꽤 오래 이 싸움이 있었더라구요. 페미니스트 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도 출연하던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요ㅜㅜ 대신 관심있으실것같아 기사링크 올립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3588667&memberNo=16432281&vType=VERTICAL

파리바게트 자연유산 이게 무슨일인지...저 안그래도 파업있고부터 이용안하는데요. 저기 다니는 아빠들 육아휴직은 아예 불가능하겠네요?ㅠ

독서괭 2022-05-30 21:33   좋아요 3 | URL
오 미미님 링크해주신 기사는 북플에서는 클릭이 안 되네요. 검색해보니 <reversing roe> 인 것 같아요. 이런 다큐도 있군요! 넷플 구독을 안 해서 ㅠ 2018 제작된 거라는데 최근에 더 핫하겠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은 이미 파바 불매중이시군요! 전 개인이 하는 동네빵집을 더 좋아해서 잘 안 가긴 했는데, 앞으로는 더 안 가야겠습니다.. 엄마들한테도 그러는데 아빠들 출휴/육휴는 택도 없겠네요 ㅠ

청아 2022-05-30 21:47   좋아요 2 | URL
네 그 제목 맞을거예요!!^^

얄라알라 2022-06-07 15:05   좋아요 2 | URL
미미님 덕분에 <reversing roe> 다큐를,
또 독서괭님 덕분에 파리바게트 이슈를 알게 되었습니다

˝곤이˝라는 뜻이군요.
roe.

청아 2022-06-07 15:38   좋아요 2 | URL
얄라알라님 넷플릭스에서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란
제목으로 보실 수 있어요^^

독서괭 2022-06-10 10:37   좋아요 1 | URL
roe는 사람 이름인데, 거기 곤이라는 뜻이 있군요? 가명인 걸로 알고 있는데 관련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새파랑 2022-05-30 21: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낙태도 임신중단도 당연한 권리가 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임신을 한쪽 성의 책임으로 모는건 잘못된것 같아요~!!

독서괭 2022-05-30 21:34   좋아요 4 | URL
맞슙니다~! 임신중단을 안전하게 잘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출산을 결심한 사람들을 위해 양육지원도 연결해주면 좋겠어요. 새파랑님 공감 감사해요~^^

레삭매냐 2022-06-02 1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느 기사에서 봤는데
미쿡의 총기 지지자들이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일
이라며 극렬하게 반대하
면서, 정작 사람들을 죽이
는 총기 규제에는 그야말
로 사생결단하듯이 반대한
다는 말에 기가 막혔습니다.

정말 이상한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율배반적
이구요.

독서괭 2022-06-02 12:47   좋아요 4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생명권을 이유로 낙태를 반대하는 거라면 다른 논점에도 일관성을 가져야 마땅할텐데 말이죠.
그냥 여성이나 취약계층이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거라고밖에는 ㅠㅠ

mini74 2022-06-03 12: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발명품이 피임약이라고. 여성을 해방시켰다고 하지만 왜 여성만? 남성피임약은 왜 앖지? 했는데 곧 나온다는 기사를 봤어요. 파리바게뜨 노동자들 ㅠㅠ 너무 속상하네요.

독서괭 2022-06-03 22:42   좋아요 3 | URL
그러네요! 그러고보니 왜 피임약은 여자만! 남성피임약이 나오는군요. 이제야 나오는 것도 희한하네요..
파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빨리 개선되길 빕니다 ㅜㅜ

얄라알라 2022-06-07 15: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파친코를 읽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더욱더 독서괭님의 글이 제가 가깝게 느껴집니다.

독서괭 2022-06-10 10:37   좋아요 1 | URL
저는 번역에 딱히 불만이 없었는데 번역이 별로라는 평도 있더라구요. 얄라님은 원서로 읽으시니 더욱 좋으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