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핑퐁>(박민규 장편, 펌-오마이에서)

다 죽이는 걸 써보고 싶었다
[오마이뉴스 2006-09-22 17:35]    
[오마이뉴스 조은미 기자] 그는 새까만 고글을 쓰고 나타났다. 고글의 고무줄이 그의 머리 뒤로 둥그렇게 돌아가 뒤통수를 단단하게 껴안았다.

머리는 길었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긴 머리를 질끈 묶었다. 최근 <카스테라>를 낼 때만 해도 뽀글뽀글 볶아 펑키하게 부풀렸던 주홍색 머리는 다시 얌전한 생머리로 돌아갔다.

하얀색 티셔츠 위에 그려진 그림이 강렬했다. 까만색 그림 속 인간들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그림 위에 하얀 아이팟이 매달려 꼼짝도 안 했다. 복잡했다.

"완전 칩거죠. 글을 쓰는 거 외에는 기타, 하고 그 외엔…."

그는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말은 느릿느릿, 생각하는 듯, 할 말이 없는 듯, 뭔가 물으면 "으음…" 스타일로 포즈를 잡고, 받아적기 너무나 좋게 천천히 말했다. 강렬한 이미지와 느리고 참한 말투가 묘하게 충돌했다.

어째, 말투가 누굴 닮았네…. 곰곰이 생각하다 엘리베이터에서 퍼뜩 생각났다. 맞다. 전유성이다. 물론 전유성보단 굵고 저음이지만.

ⓒ2006 이장욱(창비)
진득진득한 암울한 위로 핑.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대번에 팬클럽을 거느린 박민규가 돌아왔다. 아니, 또 사고를 쳤다. 이번엔 <핑퐁(창비)>이다.

맞다. 탁구를 가리키는 핑퐁이다. 그렇다면 탁구 선수들의 애환과 좌절과 로망을 그렸느냐? 물론 아니다. 이번엔 '왕따'다. 그것도 덜 자란 중학생이다. 이 어린 남학생이 꾸는 꿈은 섬찟하다. 다수인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게 꿈이다.

그런데 왜 하필 왕따일까? 그것도 10대 이야기를? 혹시 어린 시절 경험일까? 아니면 뉴스를 보다가? 아니면 그가 처음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고 누차 말한 것처럼 이종격투기를 보다가?

"우연이었죠. 커피 마시고 있는데, 음악이 '퍼햅스 러브'가 나오는데, 앞에 통유리가 길쪽으로 나있었어요. 그걸 보고 있는데 이 앞에서 누가 맞고 있으면 분위기가 희한하겠다. 중학생 누군가 맞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생각만 하고 요즘 중학생에 대한 취재는 전혀 안한 거?

"취재하면 더 잔인한 일이 많을 거예요."

어쨌든 이 <핑퐁>도 잔인하다. 왕따 소년 '못'과 '모아이'(둘 다 별명이다)는 못 볼 꼴을 당한다. 이야기는 탁구공처럼 핑. 퐁. 어디로 튈지 모르게 튀지만, 그 밑바닥엔 진득진득한 암울함이 물먹은 카펫처럼 좌악 깔려있다.

"남 비판할 만한 자격은 못 되고요. 저를 포함해서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안될 거 같아요. 인류라는 게. 그렇잖아요. 전쟁도 할 만큼 많이 했고, 해봤고, 종교문제 여러 가지 2000년 동안 해봤잖아요. 지금은 선진국도 많고, 잘 살고, 하지만 잘 사는 민족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왜 사는지 알고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아무리 잘 살아도. 왜 사는지 모르고 살잖아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죽여주는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는 많은 희망을 가지잖아요. 누가 살아남고…. 정말 다 죽이는 걸 한 번 써보고 싶었어요. (두 주인공이) 동성이니 2세가 태어날 확률도 없잖아요. 희망 아니죠."

이렇게 절망적일 수가. 그렇다면 그는 항상 날마다 이렇게 죽고 싶은 생각만 할까?
"아니죠. 평소에 절대 그런 얘기 안 하죠. 평소 잘 살아야겠다 싶죠. 그래서 죽여야겠다 생각한 거구요."

야구 다음은 탁구?

 
ⓒ2006 이장욱(창비)
그런데 신기하다. 그가 낸 첫 장편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한 마디로 야구다. 단세포적으로 나누면 야구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엔 <핑퐁>이다. 바로 탁구다. 그렇다면 왜 탁구일까? 축구는 <아내가 결혼했다>의 박현욱이 이미 써버려서?

"왜 그랬을까요. 진짜."

그가 되물었다. 자기도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아주 어눌한 목소리로. 그리고 또 덧붙였다. 알 수 없다는 듯이.

"다른 것도 많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다른 근사한 종목 다 놔두고 왜 하필 탁구였을까? 삼미 슈퍼스타즈가 한물 간 야구구단이었듯이 탁구도 한물 가서, 아무도 그 "핑. 퐁." 소리를 기억하지 않으며, 급기야 '우리의 옛것을 찾아서'에 곧 출연할 듯한 종목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만날 두들겨 맞는 중학생이 당구를 하나 축구를 하기도 그렇고 야구를 하기도 그렇잖아요. 그런 점이 많이 작용한 거 같아요. 축구나 야구는 혼자 여러 명 상대로 하잖아요. 몇 명 공격수가 볼 주고받거나 기회 균등하지도 않잖아요…. 하지만 탁구는…. 유일하게 내가 한번 치면 저쪽에서 한번 치고 그런 경기 같아요. 세상에 이견이 발생하는데…. 스포츠와 비슷해요. 한 명 상대로 여러 명이 상대하잖아요. 탁구는 근데 특별 케이스이구요…."

소설가 박민규 하면 이야기되는 게 꼭 있다. 스타일이다. 박민규식 스타일. 단락을 나누기보다 행간을 마구 나눠버리는 스타일? 또는 딱히 뭉뚱그려지지 않는 독특한 스타일? 그렇다면 얼핏 스타일리스트같이 느껴지는 그가, 지금 스타일을 바꿔볼 생각 같은 건 안 할까?

"굳이 '바꿔야겠다' 해서 그런 생각 없어요. 쓰고 싶은 대로 계속 쓸 거고 스타일 억지로 바꿔야지 한다고 바뀌나 싶기도 하고…. 음악하는 사람은 스무 살 때 데뷔곡 가지고 평생 불러야 하잖아요. 작가는 행복한 거예요. 스타일 바꾸기보다 인간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럼 이 인간은 어찌 바뀔까?

"모르겠어요. 희망이 있을지. 별 기대는 안 하는데 고만고만 하겠죠."

"행간 띄우는 거, 처음엔 몰랐어요"

 
ⓒ2006 창비
그래도 그렇지. 그는 어떻게 이렇게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글 쓰는 이의 강박 같은 엄밀한 단락 나누기를 해체할 생각을 했을까?

이번 <핑퐁>도 특이한 스타일이 등장한다. 지금껏 콩알만하던 글자는 갑자기 주인공인 '나', 별명이 '못'인 '나'가 혼자 독백할 때마다 깨알만한 크기로 바뀐다. 진짜다. 글자 크기가 깨일만 하다. 신기하다. 그리고 재밌다.

"이런 거 (글자) 작게 하고 행간 띄우고…. 처음엔 몰라서 그랬던 거예요. 처음 등단했을 때, 원고 가지고 '문학동네'인가? 편집자가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왜 이렇게 하는 게 아닌지 알 수 없었어요. 원래 다 붙이는 거래요. 생각해보니 왜 이리 하면 안 되는지 알 수 없었어요."

처음에 그렇게 다 붙이는 건지 몰라서 띄었고, 그 다음엔 왜 다 붙여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붙이지 않았다니. 이렇게 싱거울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그걸 모르다니. 그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글쓰기를 전공한 그가, 글쓰기의 기본인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될까? 아니면 소가 될까?

"그게 참 부끄러운 건데 내가 대학갈 인간이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 15등급까지 있었는데 진짜 15등급이었어요. 문창과(문예창작학과) 다닐 때 수업 거의 나간 적 없어요. 사람은 배워야겠다 생각하는데, 돌이킬 수 없는 거잖아요.

그거, <카스테라> 내고 알았어요. 전지적 작가 시점, 3인칭 시점…. 누가 '왜 1인칭만 쓰느냐?' 그래서 '1인칭이 뭐예요?' 그랬더니 '나'를 쓰는 거래요. 그래서 충격 받았어요. 다른 소설 보니까 '나'가 없어요. 사람은 정말 배워야 해요. 후회 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다' 생각해요. 문교부 교육 받지 않아서요. 어차피 독학이었으니까, 요즘 열심히 혼자 나름대로 노력 많이 해요."

신기한 건 그뿐만 아니다. 이번 그가 낸 장편소설 <핑퐁>에는 특이한 게 더 있다. 소설 속에 소설이 등장한다. 존 메이슨이란 소설가가 썼다는 소설이다. 그런데 그게,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뻥'이다. 최근 진짜 소설가나 진짜 브랜드 이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 마당에,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가나 소설은 '뻥'이다. 그것도 다 그가 만든 거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가, 사실 또 그가 따로 만든 가짜 영화를 끼워넣은 것처럼? 소싯적 배운 소설 기법을 들먹여서 말하면 액자 구성이랄까?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찌 보면 식상하지만, 소설 읽어보면 기발하다는 생각이 물결치는 그런 생각을?

"처음, 그걸 구성이라 부르나? 그런 얘기를 같은 축으로 쓰면 어울리겠다. 처음 거기 사용한 존 메이슨 소설부터 썼어요. 인용할 수 있게. 그걸 골라서 넣었어요."

그런데 그는 다른 작가 책은 안 읽나?

"읽죠. 책 많이 읽어야지. 배운 게 없으니까. 책을 통해 배워야죠. 최근에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새벽에 읽다가 울고 그랬어요. 시집 많이 읽는 편이에요."

그는 시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영역이 시라나? 그래서 작가들이 모인 술자리에서도 소설가들만 있을 때는 방만하게 있다가 시인이 계시면 예의를 갖추고 공손하게 대한다고도 했다.

"전 고유명사 그냥 지어진 게 없다 생각해요. 시는 받아쓰기다 생각해요. 인간 쓴 게 아니고. 진짜 시인이 쓴 시는…. 가짜 시인 많지만. 소설은 한문 '小' 자 쓰잖아요. 시에 비해 분량은 많은데 처음 의아했어요. 써보니 알겠더라고요. 소설은 작은 이야길 길게 쓰는 거예요. 그냥 수다떠는 거요. 진짜 이야긴 시라 생각해요."

ⓒ2006 이장욱(창비)
이렇게 시를 흠모해 마지않는다면 과연 그가 시를 읽고만 있을까? 시를 "꿈같은 거"니 "멋진 영역"이니 온갖 찬사를 쏟아붓는 마당에? 그가 쑥스러운 듯이 사뭇 빨라진 어투로 말했다.

"사실은 지금도 몰래 쓰고 있어요. 습작이지만."

그럼 기타는? 무규칙이종소설가인 박민규는 가끔 밴드로 무대에도 섰다. 역시 무규칙이종예술가이며 <황신혜밴드>리더인 김형태와 같이. 그 밴드, 지금은 안 하나?

"어릴 때 꿈이 락밴드 가지는 게 꿈이었어요. '여생'이라 그러잖아요. 주어진 삶 살 동안 열심히 글 쓰고 나중에 여생 온다면, 머리 희끗희끗한 양반들 모아가지고 락밴드 하는 게 꿈이에요. 그 때까지 10년 남았나, 20년 남았나…. 매일 기타 연습해요. 기타 학원 다니고…. 기타 가방 메고 고삐리 애들하고 '중주주중' 이거 하고…. 네. 밤에."

성실하고 착한 무규칙이종 소설가

신기하다. 한편으론 오늘이라도 그래야할 듯이 "다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가, 아름다운 내일을 위해 오늘도 기타를 치다니? 인생에 희망이 없다는 듯이, 꿀 꿈이 없다는 듯이 말하는 그가 꾸는 노년의 꿈이라? 이거 어째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닌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되는 건가? 이런 말이 가당치 않지만.

"누구나 열심히 살지 않나요? 글…. 매일 써요. 쓰다 망치기도 하고. 애초 시작이 작가로 시작한 게 아니고…. 일반 직장 생활 8년 하다 하는 거라서요. 매일 8시간 일하는 게 당연하다 느껴져요."

무규칙이종소설가 박민규가 너무나 성실하고 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장인도 일, 좋아서만 하나요? 아니잖아요. 글 쓰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지겨울 때도 있구요. 그러다 깨지기도 하고. 작가도 잘못 써서 깨지기도 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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