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잘된 번역? 우리말 다듬기가 더 힘들죠”- 천병희

 

[잠깐!이 역자] “잘된 번역? 우리말 다듬기가 더 힘들죠”


“책을 읽는 것도 시간 투자예요. 그런 면에선 고전을 읽는 것이 수익률이 제일 좋아요. 남는 장사지요. 고전 안에는 모든 게 다 있거든요.”

가령 ‘파우스트’를 한글 번역판이 아닌 독일어 원서로 읽는 덴 상당한 수준의 어학 실력이 요구된다. 그걸 한국어로 번역하려면 더욱 높은 자질이 필요할 것이다. 외국어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소양도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천병희(67) 단국대 명예교수(독문학)는 지난 30여 년 간 그리스어·라틴어 원전을 번역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세네카의 ‘인생이 왜 짧은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모두 20권이 넘는다. 그가 이번에는 ‘그리스를 만든 영웅들’(숲)을 번역했다. 우리가 흔히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라 부르는 책이다.

“처음 문장을 봤을 때 해석이 되는 경우는 10문장 가운데 2개 정도밖에 안돼요. 여러 번 읽어야 하고, 독일어 등 다른 언어의 번역도 참고한 뒤에야 완전히 뜻이 새겨져요. 그리스어는 문자도 생긴 게 아예 달라선지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선진 외국은 원전에 대한 주석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하는 분위기여서 훌륭한 주석서가 많아 도움을 크게 받는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때는 영어·독일어 등 주석서만 15권을 참고했다. 책 구입비만 300만원.

▲ 30년 동안 그리스·라틴어 원전 번역을 해 온 천병희 교수.“ 정말 어려운 문장을 만나면 겨울에도 사타구니에 땀띠가 날 정도로 고생을 합니다.” 사진=최인호·프리랜서 사진가
“물론 해당 외국어가 어렵다는 게 가장 큰 장벽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리말 다듬기가 더 힘들어요. 이전에는 될수록 직역(直譯)을 했지요. 정확하게만 번역하면 문제가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요즘 영어본을 보니까 과감하게 의역(意譯)을 한 경우가 많더군요. 잘 이해 되게끔 말이지요. 사실 직역에 집착하면 모호한 번역이 될 때가 적잖거든요.”

그는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식사와 휴식 시간을 빼고 매일 7시간 씩 번역에 매달린다. 관련 자료를 모두 참고하기에 그래 봤자 몇 쪽 나가지 못한다. 적합한 우리말은 국어사전을 뒤적이는 숫자에 비례해서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었다. “똑 떨어지는 말이 분명 있을 텐데” 싶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국어 사전을 들춘다. 순 우리말은 한자말보다 더 함축적일 경우에만 쓴다.

천 교수는 학부(서울대 독문과) 시절부터 유난히 고전, 특히 문학을 좋아했다. “독일문학 책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읽었을 거라고 자부합니다. 정음사·을유문화사 등 세계문학전집은 나와 있는 걸 다 보았으니까.”

그리스·라틴어의 세계에는 1961년 독일에서 유학하며 흠뻑 매료됐다. ‘장래가 보이지 않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발을 뺄 수 없었다. 5년 만에 귀국, 운 좋게 대학 강단에 섰지만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3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10년 자격 정지를 당했다. 생계를 위해 번역을 해야 했고, 1972년 첫 그리스어 원전 번역인 플라톤의 ‘국가’를 낸 뒤 여기까지 왔다.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고전 한 권만 추천을 부탁했다. “직장인들에겐 ‘그리스를 만든 영웅들’을 권합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를 제공해 줄 겁니다. 대학생이라면 ‘일리아스’가 최고지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실마리를 줄테니. 중년 이상에게는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가 큰 위안이 될 겁니다.”

신용관기자 qq@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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