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책 안 읽는 사회

지하철만 타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책 읽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생활에 지치기도 했겠지만 책에 눈길을 주는 이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출판계가 잘될 턱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이든 신문.잡지든 글로 된 상품을 사는 데 들인 돈은 한 가구에 1만원 남짓. 이 중 신문 구입비가 3000원에 채 못 미친다는 것은 이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나로서도 반성할 부분이 있으니까 접어 두자. 하지만 책을 사는 데 들인 돈이 한 가구-한 사람이 아니다!-에 월 7000원 남짓이라는 건 조금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느니,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식의 얘기로 무게 잡을 생각은 없다. 인터넷이 지식소통의 원천으로 자리 잡고, 눈이건 마음이건 돌릴 데가 수없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런 얘기 해 봐야 씨가 쉽게 먹히지 않을 거라는 사실, 나도 자식 셋 키워 봐서 안다.

하지만 몇 마디쯤은 책을 위해 변명을 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즘 중산층의 복원, 일자리 만들기가 주요한 국가적 화두다. 사회적 일자리 창출 운운하며 증세 카드를 꺼내들었다가 머쓱해 있긴 하지만, 정부도 과제의 중요성만큼은 인식하고 있는 듯싶다.

도대체 대한민국에 출판사가 몇 개나 있을까. 자그만치 2만 개를 웃돈다. 이 중 지난해 책을 한 가지라도 낸 출판사가 2200여 개다. 출판업계 종사자 수는 정확한 통계조차 없지만 최소한 출판사 1곳에 1명이야 있을 게고, 그나마 '돌아가는' 2200여 개 출판사가 평균 8명을 고용한다 하니 얼추 잡아 4만명 안팎 될 것이라는 게 출판계 쪽 얘기다. 그렇다면 만약 가구당 한 달 책값을 지금보다 1만원만 더 쓴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용이 이뤄질까.

2000년 통계이긴 하지만 출판업계 신입사원의 평균연봉은 1000만원이 채 안 된다. 저간의 사정으로 보아 이 수준이 별로 올랐을 것 같지는 않다. 책값을 1만원만 더 쓴다면 고용의 질도 한층 높아지지 않을까.

나는 이런 게 일자리 만들기요, 중산층 복원의 올바른 길이라 본다. 사회적 일자리 창출? 저소득층.노인계층에 대한 대책은 될는지 몰라도 중산층 복원의 길은 아니다. 스스로의 적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적절한 보수를 받을 때 느끼는 직업적 자부심이야말로 중산층 복원의 키워드다.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남 걱정할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 땐 한번 이런 생각도 해 보자. 대한민국 부모들, 자식 대학 보내는 데는 필사적이다. 그런데 요즘 대학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게 논술이다. 어렵다는 둥, 채점이 자의적이라는 둥 여러 소리가 있지만 주요 대학 입시의 큰 줄기는 논술 강화로 갈 게 분명해 보인다. 옳은 방향이기도 하고, 이른바 3불정책으로 손발이 묶인 대학으로선 변별력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논술은 글이고, 글을 잘 쓰는 기본은 글을 많이 읽고 보는 것이다.

2004년 말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흥미있는 통계를 발표한 적이 있다. 가정환경과 자녀 학업성적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것인데 그중 하나가 집에 책이 많이 있는-이 조사에서는 300권 이상-집의 자녀가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더라는 얘기였다. 흔히 논술도 과외나 학원에서 잠깐 배우면 되는 '기술'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그리 간단치 않다. 뭐 콘텐트가 있어야 글도 쓸 거 아닌가. 글쓰기를 위한 잔기술이 필요없는 건 아니지만 승부는 결코 그런 데서 나지 않는다. 핵심은 콘텐트고, 그 원천은 평소의 글읽기다.

이것만으로도 성이 안 찬다면, 특히 인터넷 세상에서 웬 책이냐고 한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보라 권하고 싶다. 인터넷 세상에 글 잘 쓰는 분이 많다. 그들의 글에 녹아 있는 정보나 논리의 가닥이 인터넷 서핑만으로 가능했을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내공은 부단한 책읽기에서 길러진 것일 게다. 그러니 일류 인터넷 논객이 되기 위해서도 책은 필요하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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