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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실록 구절을 토대로 역사적 상상력 가미 대장금·왕의 남자 등 탄생


조선왕조실록은 보물창고죠.”‘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을 쓴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의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보물창고에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왕의 남자’가 나왔고,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드라마 ‘대장금’이 보물이 되어 나왔다.

‘왕의 남자’는 연산군일기 11년 12월 29일에 나오는 ‘공길(孔吉)’이라는 배우 이름에서 싹이 텄다. 실록에서 공길의 직업은 우인(優人)으로 나타난다. 우인은 재인·광대와 같은 명칭이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보다 앞서 우인(優人)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와 장난(老遊戱)을 하며 아뢰기를,

“전하는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皐陶)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어느 때나 있는 것이 아니나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논어(論語)》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流配)하였다.

>연산군 궁에서 나례·노유희 즐겨

실록에 나타나는 ‘우인 공길’이라는 단 한 구절에다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하면서 연극 ‘이(爾)’와 영화 ‘왕의 남자’가 탄생했다. 희곡의 원작자인 김태웅 씨는 ‘왕이 왕답지 않다’라며 왕에게 맞선 우인 공길에 주목했다. 김씨는 “왕과 광대의 관계가 흥미로워 소재로 삼았다”면서 “이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왕과 광대의 관계가 드러날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가 이 구절을 처음 본 것은 실록이 아니라 사진실 씨가 쓴 ‘한국연극사’(태학사)에서였다. 사씨는 공연의 한 형식인 소학지희(笑謔之戱)를 설명하면서 연산군일기를 인용했다.

재담이나 음담패설, 성대모사, 흉내내기 등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는 놀이인 소학지희는 소품이나 연극적인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영화에서는 광대인 공길과 장생이 소학지희를 통해 연산군의 웃음보를 터뜨리게 한다. 소학지희는 문종실록에 그 이름을 드러낸다. 문종 원년 6월 10일자에 “수척(水尺)·승광대(僧廣大) 등과 같은 ‘웃고 희학하는 놀이(笑謔之戱)’는 늘여 세워서 인원 수를 갖추어 놓기만 하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산군이 또 다른 광대와 만나게 되는 것은 연산 5년 12월 30일자 실록에 나타나 있다. 인양전에서 행해진 나례(의식의 한 형식)에서 우인(광대) ‘공결’이란 자가 공길처럼 ‘유식한 문자’(?)를 쓰다가 왕의 노여움으로 곤장 60대를 맞는다. 이때 승지 등이 ‘공결은 배우로서 단지 놀이하는 것을 알 뿐인데 어찌 예절로써 책망하오리까’하고 간한다.

연산군이 이처럼 궁 안에서 광대들이 펼치는 나례나 노유희를 즐겼다는 것이 연극 ‘이’와 영화 ‘왕의 남자’의 뼈대가 된다. 이 뼈대에 김태웅 씨는 연산군일기와 소설가 박종화의 책 ‘금삼의 피’를 통해 얻은 연산군 대의 역사적인 사건을 살로 붙였다. 김씨는 “연산군일기를 통독한 것은 아니지만 관심이 있는 부분을 발췌해 읽었다”고 말했다. 실록의 역사적 사실이 역사적 상상력에 녹아흘러내린 것. 연극에서는 공길 외에 연산군·녹수·박원종·정판수·윤지상·홍내관·장생 등이 등장한다. 이들 중 연산군·녹수·공길·박원종은 실록에 실제로 이름이 나타난 인물이다.

영화에는 연극에 없던 처선이라는 내관이 등장한다. 처선은 광대패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이고 이들에게 신하들의 비리와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떠올리게 하는 놀이를 하게 한다.

의녀 장금이 중종실록에 등장

연산군 일기에서 내관인 김처선은 아무 이유도 없이 연산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으로 서술돼 있다. ‘인조실록’에는 바른 말을 하다 죽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인조가 ‘김처선은 술에 취하여 망령된 말을 해 스스로 실수하였고,(…) 바른말 하는 데 뜻을 두었던 것이 아니니 수록할 것이 없다’고 전교를 내렸다.

공길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과 영화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소재는 동성애. 하지만 실록에서는 연산군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한 구절도 나타나 있지 않다. 김태웅 씨는 “옛날 광대패에 남색이 많았다는 사실과 연산군의 성적 취향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상상했다”고 말했다.

드라마 ‘대장금’은 중종실록을 통해 형상화됐다. 중종실록에는 의녀 장금(長今)이 10번 등장한다. 이 기록을 토대로 ‘대장금’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드라마로 펼쳐진다. 대장금 작가인 김영현 씨는 이병훈 PD(대장금 연출)에게서 의녀의 존재를 들어 알게 됐다. 김씨는 “이 PD가 드라마 허준을 만들면서 의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소재를 줬다”고 말했다.

김씨가 이용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CD. 김용숙 교수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라는 책과 중종실록을 통해 중종대의 의녀 장금은 21세기 TV 브라운관에 등장했다. 의녀제도에 관한 논문도 도움이 됐다. 김씨는 “연산군 뒤라서 그런지 중종 때 의녀 기록이 많았다”고 말했다. 연산군 때 의녀가 기녀처럼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중종 때는 이를 금지했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실제로 연산군일기에서는 의녀에 관한 기사가 34건이었으나 중종실록에는 3배에 가까운 94건으로 늘어났다.

장금이 맨 처음 등장한 것은 중종 10년(1515년) 3월 21일자 실록이다. “의녀인 장금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大故)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종이 되는 원자가 이해 2월 25일에 태어났다. 의녀인 장금이 출산을 돕는데 공이 있었다는 것이다. 장경왕후는 원자를 낳은 후 3월 2일 세상을 뜬다. 대고란 장경왕후가 죽었으니 치료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으로 추론된다. 대간이 왕에게 장금에게 벌을 줘야 한다고 하나 왕은 허락하지 않는다. 다음날인 3월 22일자 기록에도 대간이 또 주장했으나 왕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장금은 7년 후인 중종 17년에 대비를 치료한 공으로 쌀과 콩, 각 10석을 하사받은 것으로 기록된 후 중종 19년에는 ‘대장금’으로 나타난다. 장금에서 대장금으로 격상된 것이다. 중종 28년에는 왕의 병을 치유한 상으로 의녀 대장금은 쌀과 콩을 각각 15석 받는다. 중종 39년 실록(1월 29일)에는 왕이 감기로 기침을 하자 대장금에게 약을 의논하라고 내의원 제조에게 이를 만큼 대장금의 존재가 부각된다. 불과 며칠 뒤인 2월 9일에는 대장금에게 쌀과 콩을 합해 5석이 하사된다. 이해 10월에는 중종이 대변이 통하지 않은 병을 앓자, 대의원 제조에게 중종은 ‘내 병은 여의(장금)가 안다’라고 말한다. 이 문구를 통해 작가인 김영현씨는 드라마에서 장금을 왕의 주치의로까지 격상시킨다.

김씨는 “장금을 성공한 여의사로 만들어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를 부여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고전적인 내용에 ‘현대적인 발상’이 첨가됐다는 것이 작가의 이야기.

고려대 국문과 정창권 초빙교수는 “장금은 왕의 주치의가 아니라 요즘 같으면 간호사에 불과했다”면서 “진찰과 처방은 의원이 했다”고 말한다. 드라마 ‘대장금’이 ‘상당히 거친 추론’을 했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또다른 논란거리는 드라마 앞 부분에서 장금이 수라간에서 음식을 만드는 장면. 정 교수는 “의녀니까 음식을 많이 안다는 것은 추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작가인 김씨는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음식 이야기에서 시작해 의녀 이야기로 가는 스토리를 채택했다. 김씨는 “역사는 책을 통해서 얻었으면 한다”면서 “드라마 같은 대중매체에서는 다른 해석이나 상상력이 추가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요즘 SBS의 드라마 ‘서동요’를 통해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다모’도 실록 속 조선여형사가 모태

조선왕조실록이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탤런트 하지원이 출연해 인기를 모은 드라마 ‘다모’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 여형사의 존재가 씨앗이 됐다. 드라마 ‘여인천하’는 실록 속에 등장하는 인물인 정난정이 소재가 됐다. 명종실록에서는 정난정이 첩에서 정부인이 되기 위해 윤원형의 본처인 김씨를 독살했다고 신하들이 몇 번씩이나 왕에게 간한다. 정난정이 자살한 후에는 본처를 독살한 죄에다 간통한 죄까지 실록에 실릴 정도로 악녀로 묘사돼 있다. 당시 드라마에서 강수연이 이 역을 맡아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여인천하’는 원래 소설가인 박종화에 의해 1958년 신문에 연재된 소설. 박종화의 또 다른 작품인 ‘자고가는 저 구름아’는 2003년 TV에서 상영된 ‘왕의 여인’의 원작이다. 대하사극 ‘왕의 여인’에서는 선조와 광해군 부자로부터 다함께 총애를 받은 김개시(개똥)라는 궁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김개시는 광해군을 도와 정적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결과로, 인조반정 때 처형을 당한다. 광해군일기에는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았다’고 김개시를 나쁘게 서술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인 광해군 15년 3월 13일자 실록에는 “상궁 김개시(金介屎)를 베었다.(개시가 정업원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가 사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민가에 숨어 있었는데, 군인이 찾아내어 베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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